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64. 1861년 이탈리아 왕국 선포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즉위 및 토리노 임시 수도 체제

SSSCH 2025. 6. 1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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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3월 17일, 토리노 팰리스 카리냐노에서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 펼쳐졌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의회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신의 은총과 국민의 의지에 의한 이탈리아 국왕"으로 선포한 것이다. 천년 넘게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반도가 마침내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의 출발은 장밋빛 미래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베네치아와 로마라는 미완의 과제, 남북 간의 경제적 격차, 그리고 통일 국가를 실질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현실적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왕국 선포의 배경

가리발디의 천인대 원정이 성공하고 중부·남부 이탈리아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통합 주민투표가 통과된 후, 새로운 국가 체제 수립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1861년 1월 27일, 이탈리아 각지에서 선출된 의원들이 토리노에 모였다. 이는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의 전국 의회였다.

의회 구성은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 지형을 그대로 반영했다. 총 443명의 의원 중 피에몬테 출신이 84명, 롬바르디아 53명, 토스카나 59명, 에밀리아 35명, 나폴리 84명, 시칠리아 48명 등으로 분포했다. 흥미롭게도 베네치아와 로마에서도 망명 의원들이 선출되어 참석했는데, 이는 미래의 완전한 통일에 대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정치적 성향을 보면 온건 자유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카보우르의 '역사적 우파(Destra Storica)'가 주도권을 잡았고, 가리발디를 지지하는 민주주의자들과 마치니의 공화주의자들은 소수에 그쳤다. 이는 새로운 국가가 급진적 변화보다는 점진적 발전을 추구할 것임을 예고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국가 체제였다. 공화국이냐 왕국이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지만, 현실적 고려가 우선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미 사실상의 통일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고, 유럽 열강들과의 관계에서도 왕정이 더 안정적이라고 판단되었다. 3월 14일 의회 표결에서 왕정 수립이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즉위와 '이탈리아의 아버지'

3월 17일 오후 3시, 팰리스 카리냐노에서 왕국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의회 의장 우르바노 라타치가 장엄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신의 은총과 국민의 의지에 의하여 이탈리아 국왕이다!" 이 순간 토리노 전체가 환호성으로 가득 찼고, 각지에서 축포가 터졌다.

새로운 국왕은 자신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라고 명명했다. 이는 의미심장한 결정이었다. 만약 사르데냐-피에몬테의 계승자로만 본다면 '1세'가 되어야 했지만, 그는 사르데냐 왕가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이탈리아의 출발을 상징하고 싶었다. 이런 절충적 접근은 그의 정치적 감각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41세의 중년 군주였다. 키가 크고 수염이 인상적인 그는 서민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궁정의 화려한 의전보다는 군인들과 함께 야전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호했고, 피에몬테 방언을 즐겨 사용했다. 이런 성격은 귀족적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오히려 민중들에게는 친근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헌법 군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1848년 제정된 알베르토 헌법을 준수했고, 의회와 내각의 권한을 존중했다. 비록 때로는 정치에 개입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대체로 입헌군주의 한계를 지켰다. 이는 19세기 자유주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

국민들은 그를 '조국의 아버지(Padre della Patria)'라고 불렀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리소르지멘토의 복잡한 과정에서 그는 서로 다른 정치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 상징적 역할을 했다. 카보우르의 현실주의, 가리발디의 혁명 정신, 마치니의 이상주의가 모두 그의 왕권 아래에서 통합될 수 있었다.

토리노 임시 수도의 선택과 의미

새로운 왕국의 수도를 어디로 할 것인가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이론적으로는 로마가 당연한 선택이었다. 로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무엇보다 이탈리아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로마는 여전히 교황령 하에 있었고,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리노가 임시 수도로 선택되었다. 토리노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수도였고, 리소르지멘토의 실질적 출발점이었다. 1848년 이후 헌정 체제가 안정적으로 운영되었고, 행정 기구도 잘 갖춰져 있었다. 무엇보다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는 외침으로부터 안전함을 보장했다.

토리노의 도시 구조도 수도 역할에 적합했다. 17-18세기 사보이 공작들이 건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들과 넓은 대로들은 근대 국가의 위엄을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팰리스 레알레는 왕궁으로, 팰리스 카리냐노는 의회 건물로, 팰리스 마다마는 상원 건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토리노를 '임시' 수도로 명명한 것은 미래에 대한 명확한 의지 표명이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로마나 사망(Roma o morte)"이라는 구호를 채택했다. 이는 가리발디가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었는데, 로마 수복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베네치아도 반드시 되찾겠다는 의미였다.

토리노 시민들은 임시 수도 지정을 복잡한 심정으로 받아들였다.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지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젠가 수도가 다른 곳으로 이전될 것이라는 불안감도 있었다. 실제로 토리노는 향후 10여 년간 이탈리아의 정치·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초기 정부 구성과 카보우르의 역할

왕국 선포 후 가장 시급한 과제는 안정적인 정부 구성이었다. 의회는 만장일치로 카보우르를 초대 총리로 선출했다. 그는 이미 사르데냐-피에몬테 시절부터 뛰어난 행정가로 인정받고 있었고, 유럽 외교에서도 상당한 경험을 쌓고 있었다.

카보우르는 국민 통합 내각을 구성하려 노력했다. 각 지역 출신 인사들을 골고루 기용했고, 정치적 성향도 다양하게 반영했다. 외무장관에는 자신이 겸임했고, 내무장관에는 토스카나 출신의 베티노 리카솔리, 재무장관에는 나폴리 출신의 퀸티노 셀라를 임명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가리발디와 민주주의 세력을 어떻게 통합하느냐였다. 가리발디는 남부 해방의 영웅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급진성은 온건파들에게 우려를 자아냈다. 카보우르는 가리발디에게 군 총사령관직을 제안했지만, 가리발디는 이를 거부하고 카프레라 섬으로 은퇴했다. 이는 초기 정부에 아쉬운 부분이었다.

행정 체계 구축도 중요한 과제였다.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법률, 화폐, 도량형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일해야 했다. 카보우르는 점진적 접근을 채택했다. 피에몬테의 제도를 기본으로 하되, 각 지역의 특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교육 제도 통일은 시급했다. 문맹률이 80%에 달하는 상황에서 국민 교육은 국가 통합의 기본 조건이었다. 카보우르는 의무 초등교육을 도입하고, 표준 이탈리아어 교육을 확산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는 막대한 예산과 시간이 필요한 장기 과제였다.

초기 왕국의 영토와 인구 구성

1861년 건국 당시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는 약 25만 평방킬로미터였다. 이는 현재 이탈리아의 약 8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베네치아(베네토 지방)와 로마(라치오 일부) 및 트렌티노가 아직 제외되어 있었지만, 이미 유럽의 중간 규모 강국에 해당하는 영토를 확보한 상태였다.

인구는 약 2,200만 명이었다. 이 중 피에몬테 280만, 롬바르디아 300만, 베네치아 제외 베네토 일부 50만, 리구리아 70만, 토스카나 190만, 에밀리아 120만, 나폴리 왕국 630만, 시칠리아 250만, 사르데냐 60만 등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러시아, 독일 연방,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였다.

하지만 이 숫자들은 새로운 국가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경제적 격차가 심각했다. 북부는 산업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남부는 여전히 봉건적 농업 사회였다. 1인당 소득 격차는 2배 이상 났고, 이런 차이는 통일 후 더욱 벌어질 조짐을 보였다.

언어 문제도 심각했다. 공식적으로는 이탈리아어가 국어였지만, 실제로 표준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구는 전체의 2.5%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각 지역의 방언을 사용했는데, 이들 방언 간의 차이는 때로는 서로 다른 언어 수준이었다. 시칠리아 농민과 베네치아 상인은 서로 의사소통이 어려울 정도였다.

종교적으로는 인구의 99% 이상이 가톨릭이었지만,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복잡했다.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 왕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새 정부에 협력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는 국민 통합에 큰 장애 요인이었다.

초기 대내외 정책의 기조

새로운 왕국의 대외 정책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절묘한 균형을 추구했다. 우선적 목표는 미완의 통일 완성이었다. 베네치아와 로마를 반드시 되찾겠다는 의지는 확고했지만, 방법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무력만으로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보우르는 다시 한 번 외교적 해법을 모색했다. 프로이센과의 연대를 통해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고, 프랑스와는 로마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동시에 영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얻어 국제적 고립을 피하려 했다. 이는 크림전쟁 이후 그가 구축해온 외교 네트워크를 활용한 전략이었다.

대내 정책에서는 자유주의적 근대화가 기본 방향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을 확산하고 철도망을 확충하여 국내 시장을 통합하려 했다. 정치적으로는 의회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법치주의를 확립하려 했다. 사회적으로는 교육 확산과 사회 이동성 증대를 통해 신분제 잔재를 철폐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재정이었다. 통일 전쟁과 국가 건설 비용으로 막대한 부채가 누적되었고, 새로운 세원 개발이 시급했다. 남부에서는 곧 강도 떼(브리간타지오)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비도 만만치 않았다.

교회와의 관계도 풀어야 할 숙제였다. 교황의 비협조는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참여를 제약했고, 이는 민주주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다. 하지만 교회와 정면 충돌할 경우 국민 분열이 더욱 심화될 우려도 있었다.

리소르지멘토의 미완성과 과제

1861년 왕국 선포는 분명히 역사적 성취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다. 리소르지멘토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베네치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지배 하에 있었고, 로마는 교황령으로 남아 있었다. 트렌티노와 이스트리아도 '미수복 이탈리아(Italia irredenta)'로 남겨져 있었다.

이런 미완성은 새로운 국가의 정통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국민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당시 정치가들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특히 베네치아인들과 로마인들은 아직 이탈리아 국민이 되지 못했고, 이들의 정체성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탈리아인 만들기'였다. 마씨모 다제글리오의 유명한 말처럼 "이탈리아를 만들었으니 이제 이탈리아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지역별 차이가 극심한 상황에서 통일된 국민 의식을 형성하는 것은 정치적 통합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경제적 통합도 마찬가지였다. 관세 동맹을 통해 무역은 자유화되었지만, 생산 구조의 차이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북부의 공업 발전은 남부 수공업을 몰락시킬 가능성이 높았고, 이는 새로운 갈등 요인이 될 수 있었다.

결론

1861년 이탈리아 왕국 선포는 천년 이상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반도가 정치적으로 통합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즉위와 토리노 임시 수도 체제는 새로운 국가의 출발을 상징했다. 이는 19세기 민족주의 시대에 이룩한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였고, 유럽 질서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왕국 선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베네치아와 로마라는 미완의 과제, 남북 간의 경제적 격차, 지역별 문화적 차이, 교회와의 갈등 등 수많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인 만들기'라는 과제는 정치적 통합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1861년의 성취는 결코 폄하될 수 없다. 카보우르의 현실주의 외교, 가리발디의 혁명적 열정, 그리고 각지 민중들의 자발적 참여가 결합되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무엇보다 민주적 절차를 통한 통일이라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사례였다. 토리노에서 시작된 새로운 이탈리아의 여정은 이후 160여 년간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의 이탈리아 공화국까지 이어지는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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