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암살은 공화정을 구원하려던 음모자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로마는 더욱 심각한 내전과 무정부 상태에 빠졌고, 결국 카이사르보다도 더 강력한 개인 권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오른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대폰티펙스 마르쿠스 레피두스가 결성한 제2삼두정치는 공화정의 마지막 숨통을 끊었다. 특히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최종 대결인 악티움 해전은 로마사의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으며,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정치 체제인 프린키파트를 확립하여 로마 제정의 기초를 마련했다.
카이사르 암살 후 로마의 혼란
카이사르가 3월 15일 원로원에서 암살당한 후, 로마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암살을 주도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 '해방자들'은 공화정이 자동으로 복원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두고 여러 세력들이 격렬한 경쟁을 벌였다.
가장 먼저 전면에 나선 인물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최측근이자 집정관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카이사르파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장례식에서 감동적인 추도사를 낭독하여 민중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이는 암살자들이 로마를 떠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독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제동이 걸렸다. 카이사르의 유언이 공개되면서 그의 양자로 지명된 19세의 가이우스 옥타비우스(훗날의 옥타비아누스)가 등장한 것이다. 옥타비우스는 나이는 어렸지만 카이사르의 이름과 유산을 상속받은 법적 후계자였고, 이는 그에게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처음에 이 어린 후계자를 무시했지만, 옥타비우스가 카이사르의 개인 재산으로 민중들에게 돈을 나누어주고 퇴역군인들을 매수하기 시작하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더욱이 옥타비우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영리했는데, 키케로 등 원로원파와 손을 잡고 안토니우스를 견제하려 했다.
무티나 전쟁과 삼두정치의 등장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 사이의 갈등은 무티나(현재의 모데나)에서 무력 충돌로 번졌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이던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축출하려 했고, 원로원은 이를 막기 위해 옥타비우스에게 군사권을 부여했다. 이는 19세 청년에게 전례 없는 권한을 준 것이었다.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패배하여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도주했다. 하지만 이 승리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옥타비우스가 아니라 원로원이었다. 원로원은 이제 안토니우스가 제거되었으니 옥타비우스도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소외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정치적으로 매우 순진한 계산이었다.
옥타비우스는 원로원의 배신을 예상했다는 듯이 놀라운 정치적 감각을 보였다.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안토니우스와 화해를 추진했다. 동시에 기병대장(마기스테르 에퀴툼) 마르쿠스 레피두스도 이들과 손을 잡았다. 레피두스는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원전 43년 10월, 세 사람은 볼로냐 근처의 작은 섬에서 만나 제2삼두정치를 결성했다. 이는 제1삼두정치와 달리 법적으로 공인된 공식적인 직책이었다. 그들은 '국가 재건을 위한 삼두관(트리움비리 레이 푸블리카에 콘스티투엔다에)'이라는 5년 임기의 특별직을 만들어 맡았다.
금지령과 키케로의 죽음
삼두정치가 성립되자마자 이들이 단행한 첫 번째 조치는 술라 시대를 연상시키는 대규모 금지령이었다. 이들은 정적들의 명단을 공표하고 이들을 살해한 자에게 현상금을 지급했다. 이는 자금 확보와 정치적 복수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냉혹한 계산이었다.
가장 유명한 희생자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였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맹렬히 비판한 '필리피카' 연설로 유명했는데, 안토니우스는 그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를 보호하려 했지만, 안토니우스의 강력한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기원전 43년 12월, 키케로는 도주 중에 안토니우스의 추격대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머리와 오른손을 잘라 로마 포룸에 전시했다. 이는 웅변으로 자신을 공격한 자에 대한 잔혹한 복수였다. 키케로의 죽음은 공화정 전통의 마지막 수호자가 사라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금지령으로 약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이 살해되었다. 이는 로마 지배층의 대대적인 숙청이었으며, 막대한 재산이 몰수되어 삼두관들의 전쟁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마의 전통적인 정치 엘리트층이 거의 소멸되었다.
필리피 전투와 공화정의 종말
삼두관들의 다음 목표는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동방으로 도피하여 상당한 군대를 모집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서 각각 총독으로 활동하며 19개 군단의 대군을 조직했다. 이는 삼두관들에게 심각한 위협이었다.
기원전 42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28개 군단을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갔다. 레피두스는 이탈리아 본토의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두 차례에 걸쳐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첫 번째 필리피 전투에서는 브루투스가 옥타비아누스군을 격파했지만, 안토니우스가 카시우스군을 대파했다. 카시우스는 패배를 절망하여 자살했고, 이는 공화정파에게 큰 타격이었다. 브루투스는 홀로 저항을 계속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졌다.
두 번째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군은 완전히 패배했다. 브루투스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이로써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들이 모두 사라졌다. 필리피 전투의 승리는 공화정의 완전한 종말을 의미했다. 이제 로마는 돌이킬 수 없이 개인 권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세력 분할
필리피 전투 후 승리한 삼두관들은 로마 세계를 분할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와 동방을,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담당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과제인 퇴역군인들의 토지 분배는 옥타비아누스의 몫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에서 12만 명의 퇴역군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해야 했다. 이를 위해 18개 도시의 토지를 몰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주민들과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다. 특히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가 이러한 토지 몰수에 반대하여 페루지아 전쟁이 벌어졌다.
기원전 41-40년의 페루지아 전쟁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승리했지만, 이탈리아의 여론은 매우 악화되었다. 사람들은 옥타비아누스를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여겼다. 반면 동방에서 활동하는 안토니우스는 상대적으로 관대하고 매력적인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정책을 펼쳤고, 상호 견제와 경쟁이 심화되었다. 특히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합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합
안토니우스는 동방 통치를 위해 이집트로 향했고, 그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재회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미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통해 로마 정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이제 안토니우스를 통해 이집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에는 정치적 동맹의 성격이 강했지만, 점차 개인적인 애정으로 발전했다.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고, 클레오파트라는 그에게 아이들을 낳아주었다. 이들 사이에는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라는 쌍둥이가 태어났다.
안토니우스의 이집트 체류는 로마 본토에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로마인들은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여왕의 꾀임에 빠져 로마의 이익을 배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가 헬레니즘 군주들의 관습을 따라 신격화를 추구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반감이 더욱 커졔다.
기원전 37년 타렌툼 조약으로 삼두정치가 5년 연장되었지만, 이는 형식적인 합의에 불과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이미 서로를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었고, 최종 대결은 시간 문제였다. 레피두스는 점차 소외되어 기원전 36년 시칠리아에서 권력을 잃고 은퇴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선전 전쟁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최종 대결을 준비하면서 치밀한 선전 활동을 벌였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배신자로, 클레오파트라를 로마 문명을 위협하는 동방의 마녀로 묘사했다. 특히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동방 영토들을 분배했다는 '알렉산드리아 기부' 사건을 대대적으로 비판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선전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자신을 로마 전통의 수호자로, 안토니우스를 외국 여왕의 노예로 대비시켰다. 또한 아폴론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종교적 권위를 확보했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디오니소스와 자신을 연결시켰는데, 이는 로마인들에게 방탕함과 동방적 타락을 연상시켰다.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정식 결혼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완벽한 명분을 제공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로마에 대한 모독이라고 규정하고 안토니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흥미롭게도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개인에게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는 내전이 아닌 외침에 맞선 정당한 전쟁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정치적 계산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동방 여왕과의 전쟁이라면 기꺼이 지지할 수 있었다.
악티움 해전과 결정적 승리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리스 서해안의 악티움 해협에서 로마사를 결정지을 대해전이 벌어졌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500척의 함선을, 옥타비아누스는 400척의 함선을 보유했다. 수적으로는 안토니우스가 약간 우세했지만, 옥타비아누스 함대는 마르쿠스 아그리파라는 뛰어난 제독이 지휘했다.
악티움 해전의 정확한 경과는 논란이 있지만, 결과는 명확했다. 전투 중 클레오파트라가 갑자기 이집트 함대를 이끌고 전장을 이탈했고, 안토니우스도 그녀를 따라 도주했다. 이는 안토니우스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남은 함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안토니우스의 도주는 그의 정치적 생명을 완전히 끝장냈다. 로마 최고의 장군이 여자를 따라 전장을 버렸다는 것은 로마인들에게 용납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안토니우스의 육군도 차례로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했고, 동방의 속국들도 승자의 편으로 돌아섰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그곳에 니코폴리스(승리의 도시)를 건설했다. 또한 전쟁에서 노획한 배들의 부리(rostrum)로 거대한 기념물을 세웠다. 이는 자신의 승리를 영원히 기념하려는 의도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악티움 패배 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피했지만, 그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이집트로 진군했고, 알렉산드리아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은 대부분 항복했고, 이집트군도 싸울 의지를 잃었다.
절망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즉시 죽지는 않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영묘로 운반되어 그녀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는 비극적이면서도 극적인 최후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녀를 로마로 끌고 가서 개선식에서 전시하려 했다. 이를 알게 된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 물려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정확한 자살 방법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300여 년간 이어진 헬레니즘 이집트가 막을 내렸다. 이집트는 옥타비아누스의 개인 영토가 되었고, 막대한 부를 로마에 제공하게 되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의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는 요소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칭호와 프린키파트 체제의 시작
기원전 30년 이집트 정복으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3일간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제 로마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지만, 카이사르의 운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노골적인 군주제 대신 공화정의 외형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는 교묘한 방법을 택했다.
기원전 27년 1월 13일,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앞에서 극적인 정치적 연출을 펼쳤다. 그는 모든 권력을 원로원과 로마 국민에게 돌려준다고 선언하며 공화정 복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는 정교한 정치 쇼였다. 원로원은 그의 사양을 거부하며 계속 권력을 행사해달라고 간청했다.
이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새로운 칭호를 받았다. 이는 '존엄한' 또는 '성스러운'을 의미하는 말로, 종교적 권위를 담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임페라토르)라는 군사적 칭호와 달리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권위를 상징했다.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프린켑스(Princeps, 제1시민)라는 직책을 만들어 취임했다. 이는 공화정 시대에 원로원에서 발언 순서가 가장 빠른 원로를 지칭하던 명예직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새로운 최고 권력자의 직책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정치 체제를 프린키파트(Principate)라고 부른다.
프린키파트 체제의 특징과 혁신
프린키파트 체제는 겉으로는 공화정을 복원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교묘하게 위장된 군주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여러 개의 기존 공직을 조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는 로마인들의 공화정 전통에 대한 향수를 만족시키면서도 효율적인 개인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권력 기반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임페리움 마이우스(상급 통치권)로, 이는 모든 총독들보다 우선하는 군사 지휘권이었다. 둘째는 호민관 특권(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으로, 이는 법안 거부권과 시민 보호권을 의미했다. 셋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신관)직으로, 이는 종교적 권위를 상징했다.
이러한 권력들은 모두 기존 공화정 제도 내에서 존재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을 모두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고 종신화함으로써 사실상의 군주제를 만들어냈다. 동시에 원로원과 민회는 계속 존재했고, 집정관과 프레토르 등 기존 공직들도 유지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새로운 관료제를 구축했다. 그는 개인적 친구들과 해방노예들로 구성된 황제 직속 관료들을 통해 제국을 통치했다. 이들은 기존의 원로원 계급과는 별개의 새로운 행정 계층을 형성했고, 황제에게만 충성했다.
군제 개혁과 프레토리아 근위대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는 군제 재편이었다. 그는 내전을 통해 비대해진 군대를 28개 군단으로 축소했지만, 동시에 전문 직업군대로 재편했다. 병사들의 복무 기간을 25년으로 정하고, 퇴역 후에는 토지나 현금을 지급하는 체계적인 보상 제도를 마련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프레토리아 근위대(Praetorian Guard)의 창설이었다. 이는 황제의 개인 경호 부대로, 로마 시내에 주둔하면서 황제의 안전과 정치적 안정을 보장했다. 근위대는 일반 군단병보다 높은 급여를 받았고, 16년만 복무하면 퇴역할 수 있었다.
프레토리아 근위대는 황제제의 핵심 기구가 되었다. 이들은 단순한 경호 부대를 넘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때로는 황제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했다. 후에 일부 근위대 장관들은 황제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해군을 정비하여 지중해의 평화를 유지했다. 미세눔과 라벤나에 상설 함대를 배치하여 해적을 완전히 소탕했고, 안전한 해상 교역로를 확보했다. 이는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마레 노스트룸)'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경제 정책과 팍스 로마나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체계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안정된 화폐 제도를 구축하고, 공정한 세금 징수 체계를 마련했다. 특히 인구 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여 정확한 세수 기반을 확보했다.
이집트 정복으로 얻은 막대한 부는 이러한 정책의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 이집트는 지중해 세계 최대의 곡창지대였을 뿐만 아니라 동방 교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를 자신의 개인 영토로 만들어 원로원의 간섭을 배제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경제 정책은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내전이 종료되고 안정된 정치 체제가 확립되면서 지중해 전역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는 무역의 활성화와 경제 발전을 가져왔고, 도시들이 번영하기 시작했다.
건축과 문화 정책
아우구스투스는 "벽돌로 된 로마를 물려받아 대리석으로 된 로마를 남겨준다"고 자랑했을 정도로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다. 그는 아폴론 신전, 마르스 울토르 신전, 아우구스투스 포룸 등을 건설하여 로마의 도시 경관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특히 아라 파키스(평화의 제단)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이 제단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정복을 기념하여 건설되었는데, 정교한 부조로 아우구스투스 가문과 로마의 번영을 형상화했다. 제단 주변의 부조에는 아이네아스 신화와 로마 건국 전설이 새겨져 있어 아우구스투스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문화 정책에서도 혁신을 보였다. 그는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후원했다.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으로 쓰여진 로마 건국 서사시로, 아우구스투스 체제의 정당성을 문학적으로 뒷받침했다.
종교 개혁과 도덕 재건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전통 종교를 복원하고 도덕을 재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수많은 신전을 재건하고 전통적인 종교 의식을 부활시켰다. 동시에 자신을 '디부스 필리우스(신의 아들)'라고 칭하며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통해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확립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일련의 도덕법을 제정하여 로마인들의 생활을 규제했다. 율리우스법과 파피아 포파이아법을 통해 결혼을 장려하고 불륜을 처벌했다. 이는 내전으로 해이해진 사회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법들은 귀족 사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딸 율리아를 불륜 혐의로 유배를 보내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는 자신이 제정한 도덕법을 온 가족에게도 똑같이 적용한다는 메시지였지만, 동시에 아우구스투스 개인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후계 문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후계자 선정이었다. 공화정의 외형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세습제를 도입할 수는 없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적 과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처음에 조카이자 사위인 마르켈루스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지만, 그가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이후 아그리파와 딸 율리아의 아들들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키웠지만, 이들도 모두 요절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첫 번째 부인 리비아의 전남편과의 아들인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능력이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성격이 내성적이고 냉정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처음에는 선호하지 않았다.
기원후 4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고 호민관 특권을 부여하여 공식적인 후계자로 지명했다. 동시에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조카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삼도록 하여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을 보존하려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유산과 역사적 의미
기원후 14년 8월 19일, 아우구스투스는 74세의 나이로 캄파니아의 놀라에서 사망했다. 그는 45년간 로마를 통치하면서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전환을 완성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로마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은 실로 방대했다. 그는 100년간 계속된 내전을 종료시키고 지중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효율적인 행정 제도를 구축하여 제국 통치의 기반을 마련했고,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황금기를 열었다.
특히 프린키파트 체제는 로마적 정치 사상의 걸작이었다. 그는 공화정 전통에 대한 로마인들의 향수를 존중하면서도 제국 통치에 필요한 강력한 개인 권력을 확립했다. 이는 후에 서구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친 정교한 정치 시스템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로마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가 후원한 문학과 예술은 로마적 가치와 이상을 형상화했고, 이는 후대에 서구 문명의 고전이 되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호라티우스의 시, 리비우스의 역사서 등은 모두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산물이었다.
제2삼두정치에서 시작되어 악티움 해전을 거쳐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트 확립으로 이어진 이 시기는 로마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카이사르의 암살로 시작된 혼란이 결국 더욱 강력하고 지속적인 개인 권력의 등장으로 귀결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정치 체제는 이후 300년간 지속되며 서구 문명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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