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에서의 연이은 승리로 카이사르는 로마 최고의 군사 지휘관으로 부상했지만, 동시에 그의 성장은 로마 정계에 새로운 긴장을 만들어냈다. 제1삼두정치의 균형이 깨지면서 카이사르와 폰페이우스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권력 확장을 견제하려 했다. 결국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로마는 또다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내전은 단순한 정치적 갈등을 넘어서 로마 공화정 체제 자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적 분기점이 되었다.
제1삼두정치의 균열과 크라수스의 죽음
기원전 56년 루카 회담에서 연장된 삼두정치는 겉보기에는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각자의 야심이 커지면서 상호 견제와 경쟁이 심화되었고, 특히 크라수스와 폰페이우스 사이의 라이벌 의식이 갈수록 노골화되었다.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에서의 성공과 폰페이우스의 기존 명성에 자극받아 자신만의 군사적 영광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5년 집정관에 오른 그는 시리아 총독직을 획득하고 파르티아 원정을 계획했다. 파르티아는 당시 로마의 유일한 강력한 라이벌로, 이들을 정복한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견줄 만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재앙으로 끝났다. 기원전 53년 카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군은 파르티아의 기마궁수들에게 참패를 당했다. 7개 군단 중 4개 군단이 전멸했고, 크라수스 자신도 협상 중에 살해되었다. 파르티아군은 크라수스의 머리를 잘라 파르티아 왕에게 바쳤고, 2만 명의 로마군이 포로가 되었다.
크라수스의 죽음은 삼두정치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했다. 이제 로마 정계는 카이사르와 폰페이우스라는 두 거대한 세력으로 양분되었고, 둘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해 보였다. 크라수스라는 완충 역할을 하던 인물이 사라지면서 두 영웅 사이의 긴장은 급속도로 고조되었다.
율리아의 죽음과 정치적 유대 관계의 단절
삼두정치의 붕괴를 가속화한 또 다른 사건은 기원전 54년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의 죽음이었다. 율리아는 폰페이우스의 아내였으며, 두 거대한 정치가 사이의 개인적 유대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녀의 죽음은 카이사르와 폰페이우스 사이의 마지막 감정적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율리아는 출산 중에 사망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큰 의미를 가졌다. 카이사르는 사랑하는 딸을 잃은 슬픔에 깊이 빠졌고, 폰페이우스도 젊은 아내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다. 두 사람은 새로운 정략결혼을 통해 관계를 회복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율리아의 죽음 이후 폰페이우스는 점차 원로원파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코르넬리아와 재혼했는데, 그녀는 원로원파의 유력 인사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이었다. 이러한 혼인 관계의 변화는 폰페이우스가 카이사르와 거리를 두고 전통적인 권력층과 연합하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갈리아 대반란과 베르킨게토릭스의 등장
갈리아에서 카이사르는 기원전 52년 전체 갈리아를 뒤흔든 대규모 반란에 직면했다. 이 반란을 이끈 인물은 아르베르니족의 젊은 족장 베르킨게토릭스였다. 그는 뛰어난 지도력과 카리스마로 갈리아 전 부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로마에 맞섰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단순한 부족장이 아니라 로마의 전술을 깊이 이해하는 전략가였다. 그는 로마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초토화 전술을 채택했고, 여러 부족을 연합하여 조직적인 저항을 펼쳤다. 특히 그는 기존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게릴라 전술과 요새 방어를 결합한 새로운 전략을 구사했다.
반란 초기 베르킨게토릭스는 제나붐과 아바리쿰을 점령하여 로마인들을 학살했다. 이는 갈리아 전역에 반로마 감정을 확산시켰고, 더 많은 부족들이 반란에 가담하게 만들었다. 카이사르는 급히 갈리아로 돌아와 반란 진압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과거와 다른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게르고비아 공성전에서 카이사르는 처음으로 갈리아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지형을 잘 활용한 방어전술로 로마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카이사르는 큰 손실을 입고 철수해야 했다. 이 승리는 베르킨게토릭스의 명성을 갈리아 전역에 알렸고, 반란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알레시아 공성전과 갈리아 정복의 완성
베르킨게토릭스는 게르고비아 승리 후 더 많은 갈리아 부족들을 규합하여 8만 명의 대군을 모았다. 하지만 카이사르와의 결정적인 대결에서 그는 알레시아라는 요새 도시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전략적으로는 타당한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알레시아를 포위하면서 역사상 가장 정교한 공성전을 펼쳤다. 그는 알레시아를 둘러싸는 내부 포위선(키르쿰발라치오)을 구축한 후, 갈리아 구원군에 대비하여 외부 포위선(콘트라발라치오)까지 건설했다. 이는 포위하는 군대가 또 다른 적에게 포위당하는 것을 막는 이중 포위망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전역에 구원 요청을 보냈고, 25만 명의 대규모 구원군이 알레시아로 향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이중 포위망 전술은 완벽하게 작동했다. 로마군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해오는 적을 모두 막아냈고, 결국 구원군은 궤주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그는 전투 장비를 갖춘 채 카이사르 앞에 나타나 무기를 던지며 항복 의사를 표했다.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를 포로로 잡아 로마로 보냈고, 6년 후 개선식에서 그를 처형했다.
로마에서의 정치적 혼란과 폰페이우스의 권력 확대
갈리아에서 카이사르가 반란 진압에 고전하는 동안, 로마에서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특히 기원전 53년과 52년에는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어 집정관을 선출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폭력적인 정치 갈등이 일상화되면서 공화정 제도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의 중심에는 클로디우스와 밀로의 대립이 있었다. 클로디우스는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과격한 민중파 정치인이었고, 밀로는 폰페이우스와 가까운 원로원파 인사였다. 두 사람은 각자 무장한 깡패들을 조직하여 로마 거리에서 무력 충돌을 벌였다.
기원전 52년 1월, 아피아 가도에서 클로디우스와 밀로의 추종자들 사이에 우발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클로디우스가 살해되었고, 그의 시신이 로마로 운반되자 민중들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분노한 군중들은 쿠리아에서 클로디우스의 장례식을 치르며 원로원 의사당을 불태웠다.
이러한 무정부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원로원은 폰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콘술 시네 콜레가)'으로 임명했다. 이는 공화정 역사상 전례가 없는 조치였다. 폰페이우스는 이 특별한 권한을 이용하여 로마에 질서를 회복했지만, 동시에 그의 권력은 카이사르에게 위협적인 수준까지 커졌다.
카이사르 귀환 문제와 정치적 갈등의 심화
갈리아 정복을 완료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50년경부터 로마 귀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귀환 조건을 둘러싸고 격렬한 정치적 갈등이 벌어졌다. 핵심 쟁점은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연속해서 집정관에 출마하기를 원했다. 갈리아 총독직이 끝나는 기원전 49년 3월부터 기원전 48년 집정관 선거까지는 시간적 공백이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카이사르는 일반 시민 신분이 되어 정적들의 고발에 무방비로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총독직을 유지한 채 차기 집정관에 출마하려 했다.
하지만 원로원과 폰페이우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카이사르가 군대를 해산하고 일반 시민으로 돌아온 후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집정관에 출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인 요구였지만, 실제로는 카이사르를 정치적으로 무력화하려는 의도였다.
협상은 계속 결렬되었고, 양측의 입장은 점차 강경해졌다. 카이사르는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2개 군단만 유지한 채 귀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원로원은 이마저 거부했다. 기원전 49년 1월, 마르쿠스 카토와 루키우스 렌툴루스 등 카이사르의 정적들은 원로원에서 최종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루비콘 강 도하와 내전의 시작
기원전 49년 1월 10일 밤, 카이사르는 마침내 결정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라벤나 근처에서 제13군단 일부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넜다. 루비콘 강은 갈리아 키살피나와 이탈리아 본토의 경계였으며, 총독이 군대를 이끌고 이 강을 건너는 것은 반역 행위였다.
강을 건너기 직전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알레아 야크타 에스트)"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였다. 카이사르는 이 순간 공화정의 법과 전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선택을 했고, 이로써 로마 내전이 시작되었다.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도시는 공포에 휩싸였다. 많은 원로원 의원들과 폰페이우스 지지자들은 급히 로마를 떠났다. 폰페이우스 자신도 "술라도 할 수 있었던 일을 나라고 못할 이유가 있나"라고 말하며 강경 대응을 다짐했지만, 실제로는 준비가 부족했다.
카이사르군의 진격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그들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이탈리아를 남하했다. 아리미눔, 아우시눔, 이그불륨 등 주요 도시들이 차례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특히 많은 도시들이 카이사르를 해방자로 환영했는데, 이는 원로원 정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폰페이우스의 남하와 브룬디시움 포위전
폰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급속한 진격에 밀려 로마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그의 계획은 동방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재정비한 후 다시 이탈리아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략적으로는 타당한 선택이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카이사르에게 큰 승리를 안겨주었다.
카이사르는 폰페이우스를 브룬디시움 항구에서 포위하려 했다. 그는 항구 입구에 방파제를 건설하여 폰페이우스군의 탈출을 막으려 했지만, 폰페이우스는 야음을 틈타 전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탈출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완전히 카이사르의 손에 떨어졌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입성한 후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정적들의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고, 포로가 된 원로원 의원들을 석방했다. 또한 추방된 정치인들에게 귀환을 허용하고, 빚에 시달리는 시민들을 위한 구제 조치를 마련했다. 이러한 클레멘티아(관용) 정책은 많은 로마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히스파니아 원정과 서방 전선의 정리
이탈리아를 장악한 카이사르는 먼저 서방의 폰페이우스파를 정리하기로 했다. 히스파니아에는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7개 군단의 폰페이우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적이 없는 적을 치러 간다"라고 말하며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일레르다(현재의 레리다)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뛰어난 전략으로 폰페이우스군을 포위했다. 그는 시그리스 강(현재의 세그레 강)의 수위 변화를 이용하여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했고, 결국 적군 전체를 항복시켰다.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다시 한 번 관용을 보여주어 항복한 적군을 모두 석방했다.
마실리아(마르세유)도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이 도시는 오랜 로마의 동맹도시였지만 폰페이우스를 지지했다가 포위 공격을 받았다. 카이사르는 직접 지휘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맡겼지만, 결국 도시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관대한 처리를 보여주어 도시를 파괴하지 않았다.
디르라키움 패배와 위기의 순간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마침내 그리스로 건너가 폰페이우스와 직접 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첫 번째 대규모 교전인 디르라키움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폰페이우스는 해상 우위를 바탕으로 충분한 보급을 받고 있었던 반면, 카이사르군은 보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디르라키움에서 카이사르는 폰페이우스군을 포위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폰페이우스는 야간 기습을 통해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돌파했고, 카이사르군은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해야 했다. 이는 카이사르의 군사 경력에서 가장 큰 패배 중 하나였다.
하지만 폰페이우스는 승리를 완전히 활용하지 못했다. 그는 추격을 포기하고 아시아로 향하여 더 많은 군대를 모집하려 했다. 이러한 소극적 태도는 카이사르에게 재기할 기회를 제공했다. 카이사르는 테살리아로 후퇴하여 군을 재정비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파르살루스 대전과 결정적 승리
기원전 48년 8월 9일, 테살리아 평원의 파르살루스에서 로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가 벌어졌다. 폰페이우스는 4만 7천 명의 대군을, 카이사르는 2만 2천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격돌했다. 수적으로는 폰페이우스가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경험과 사기면에서는 카이사르군이 앞섰다.
카이사르는 뛰어난 전술로 수적 열세를 극복했다. 그는 폰페이우스군의 기병대를 견제하기 위해 예비 보병대를 측면에 배치했고, 결정적 순간에 이들을 투입하여 전세를 뒤집었다. 특히 갈리아 전쟁에서 단련된 베테랑 군단들의 전투력은 폰페이우스의 신병들을 압도했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폰페이우스군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1만 5천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폰페이우스 자신도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이집트로 도주했다. 카이사르는 다시 한 번 관용을 보여 항복한 적들을 용서했고,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그에게 투항했다.
이집트에서의 모험과 클레오파트라
폰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이집트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이집트의 어린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신하들이 폰페이우스를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려 했지만, 오히려 카이사르는 분노했다. 그는 폰페이우스를 존경하는 라이벌로 여겼으며, 이런 식의 암살을 혐오했다.
이집트에서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누나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뛰어난 지적 능력과 매력으로 카이사르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9개 언어를 구사했고, 수학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지지하여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일부 소실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하지만 결국 카이사르는 승리하여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여왕으로 복위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제니 비디 비키와 동방 정벌의 완성
이집트에서의 일을 마친 카이사르는 소아시아로 향했다. 폰투스의 파르나케스 2세가 아버지 미트리다테스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7년 젤라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파르나케스를 완전히 격파했다.
이 승리 후 카이사르는 로마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베니 비디 비키)"라는 유명한 전문을 보냈다. 이는 승리의 신속함과 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이 되었다. 젤라 전투는 단 4시간 만에 끝났으며, 카이사르의 군사적 천재성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동방 정벌을 완료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4차례의 개선식을 동시에 거행하여 갈리아, 이집트, 폰투스, 아프리카에서의 승리를 축하했다. 이는 로마 역사상 전례가 없는 성대한 행사였다. 베르킨게토릭스도 이때 처형되어 카이사르의 최대 승리를 장식했다.
독재관 취임과 개혁 정치의 시작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10년 임기의 독재관에 임명되었다. 이는 술라의 독재와는 다른 성격이었다. 술라가 기존 질서의 복원을 목표로 했다면, 카이사르는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추구했다. 그는 독재관이라는 직책을 통해 로마 사회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개혁은 매우 포괄적이었다. 첫째, 달력을 개혁하여 태양력 기반의 율리우스력을 도입했다. 이는 이전의 음력보다 훨씬 정확했고,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달력의 기초가 되었다. 둘째, 시민권을 대폭 확대하여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주민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셋째,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퇴역군인들과 무산 시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넷째, 공공사업을 확대하여 일자리를 창출했다. 특히 포룸 율리움 건설과 바실리카 율리아 재건 등 대규모 건축 사업을 통해 로마의 도시 경관을 일신했다.
율리우스력과 달력 개혁의 의미
카이사르의 달력 개혁은 단순한 기술적 개선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로마 달력은 달의 주기를 따르는 음력이었는데, 1년이 355일에 불과해 계절과 맞지 않는 문제가 심각했다.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신관)가 임의로 윤달을 삽입하여 조정했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소시게네스와 협력하여 태양의 주기를 따르는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다. 1년을 365.2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일을 두는 체계였다. 이를 위해 기원전 46년은 445일이라는 특별히 긴 해가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혼란의 해'라고 불렀다.
새로운 달력은 농업과 종교 활동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었고, 제국 전체에 통일된 시간 체계를 제공했다. 또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생일이 있는 7월을 '율리우스(Julius)'로 명명하여 영원히 기억되도록 했다. 이는 개인 숭배의 시작이기도 했다.
시민권 확대와 제국 통합 정책
카이사르의 시민권 확대 정책은 로마사에서 혁명적인 조치였다. 그는 갈리아 키살피나 주민 전체에게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고, 갈리아 트란살피나와 히스파니아의 도시들에도 라틴 시민권을 확대했다. 이는 로마 시민의 수를 급격히 증가시켰다.
이러한 정책의 배경에는 실용적인 계산이 있었다. 넓어진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지방 엘리트들을 로마 체제에 통합해야 했다. 시민권을 얻은 갈리아인들은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제국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전통적인 로마 시민들, 특히 원로원 의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로마 시민권의 희소성과 특권이 훼손된다고 생각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갈리아 출신 의원들을 대거 임명하자, "갈리아인들이 토가를 벗고 브라카(갈리아 바지)를 입는다"는 조롱이 나돌기도 했다.
원로원 개혁과 정치 구조의 변화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규모를 600명에서 900명으로 확대했다. 새로 임명된 원로원 의원들은 주로 카이사르의 지지자들과 이탈리아 및 속주 출신 인사들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로마 귀족들의 과두정치를 약화시키고 카이사르 개인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엘리트층을 형성하려는 시도였다.
동시에 카이사르는 공직 체계도 개편했다. 프레토르의 수를 8명에서 16명으로, 퀘스토르의 수를 20명에서 40명으로 늘렸다. 이는 확대된 제국을 관리하기 위한 실용적 조치였지만,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기회를 제공하여 지지 기반을 넓히려는 의도도 있었다.
카이사르는 또한 자신이 종신 독재관이 되기를 원했다. 기원전 44년 그는 '영구 독재관(디크타토르 페르페투오)'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취임했다. 이는 공화정의 임시직이었던 독재관을 영구적인 군주제적 지위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종교 개혁과 개인 숭배의 도입
카이사르는 종교 정책에서도 혁신을 보였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조치들을 단계적으로 도입했다. 먼저 자신의 동상을 신전에 세우도록 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달을 만들었다. 또한 자신을 '디부스 율리우스(신적인 율리우스)'라고 칭하도록 했다.
특히 카이사르는 자신이 비너스의 후손이라는 가문의 전설을 적극 활용했다. 그는 포룸 율리움에 비너스 게네트릭스(어머니 비너스) 신전을 건설하고, 자신이 여신의 직계 후손임을 강조했다. 이는 헬레니즘 군주들의 신격화 전통을 로마에 도입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인 숭배는 전통적인 로마 종교관과 충돌했다. 로마인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금기시했는데, 카이사르는 이러한 관습을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는 그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3월 15일 암살과 공화정의 종말
카이사르의 권력 집중과 군주제적 행보는 결국 공화정 수호를 내세우는 세력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를 중심으로 한 약 60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카이사르 암살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자신들을 '해방자(리베라토레스)'라고 불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이두스 마르티아에), 원로원 회의가 열리는 폼페이우스 극장 근처의 쿠리아에서 음모가 실행되었다. 점쟁이 스푸리나가 "3월 15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했고, 아내 칼푸르니아도 불길한 꿈을 꾸었다며 만류했지만, 카이사르는 회의에 참석했다.
원로원 회의에서 브루투스, 카시우스 등 음모자들이 차례로 카이사르에게 다가가 단검으로 찔렀다. 카이사르는 총 23번의 상처를 입었지만, 치명상은 가슴에 입은 두 번째 상처였다. 그는 브루투스를 보고 "너마저, 브루투스야?(에트 투, 브루테?)"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의 암살은 음모자들이 의도했던 공화정 복원을 가져오지 못했다. 오히려 더 큰 혼란과 내전을 촉발했고, 결국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제정 수립으로 이어졌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공화정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루비콘 도하에서 시작된 카이사르의 권력 장악 과정은 로마사의 가장 극적인 전환점 중 하나였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과 정치적 혁신은 로마를 지중해 제국에서 세계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기반을 마련했지만, 동시에 천년을 이어온 공화정 체제를 종식시켰다. 카이사르의 유산은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를 통해 계승되어 로마 제정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는 서구 문명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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