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0년대 로마는 표면적으로는 공화정의 전통적인 제도들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영향력이 국가 권력을 좌우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과 각종 대외 전쟁을 통해 명성을 얻은 강력한 개인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기존의 정치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다. 특히 폰페이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결성한 비밀 정치 동맹은 로마 공화정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폰페이우스의 승승장구와 동방 정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이미 기원전 70년대에 로마 최고의 군사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에도 참여하여 명성을 더욱 높였다. 하지만 폰페이우스의 진짜 영광은 기원전 67년 해적 토벌 임무를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킬리키아 해적들은 당시 지중해 전역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들은 수백 척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고, 로마의 곡물 수송로를 차단하여 로마 시민들을 기아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다. 심지어 오스티아 항구를 습격하여 집정관의 함대를 불태우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가비니우스 법에 따라 폰페이우스는 3년간 지중해 전 해역에서 무제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는 로마 역사상 전례가 없는 광범위한 권한이었다. 폰페이우스는 500척의 함선과 12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체계적인 해적 토벌 작전을 펼쳤다.
놀랍게도 폰페이우스는 단 3개월 만에 해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 그는 지중해를 13개 구역으로 나누어 동시 다발적으로 작전을 수행했고, 해적들의 본거지인 킬리키아까지 완전히 소탕했다. 이 과정에서 해적 함선 1300척을 나포하고 2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완전한 종료
해적 토벌의 성공으로 더욱 높아진 명성을 바탕으로, 폰페이우스는 기원전 66년 마닐리우스 법에 따라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총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이는 원래 루쿨루스가 담당하고 있던 임무였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폰페이우스는 동방에서도 뛰어난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압박하여 결국 자살로 몰아넣었고, 폰투스 왕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이어서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를 굴복시키고,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도 멸망시켰다.
특히 폰페이우스는 유대 지역에서도 개입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그는 하스모네아 왕조의 내분에 개입하여 히르카누스 2세를 왕위에 옹립하고, 유대를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폰페이우스는 예루살렘 신전의 지성소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동방 정벌을 완료한 폰페이우스는 이 지역에 대대적인 행정 개편을 실시했다. 그는 새로운 속주들을 설치하고 속국 체제를 정비하여 로마의 동방 지배를 확고히 했다. 특히 시리아 속주의 설치는 로마가 지중해 동쪽 전체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크라수스의 부와 정치적 야심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진짜 힘은 막대한 부에서 나왔다. 크라수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부유한 개인 중 하나로, 부동산 투자와 금융업을 통해 천문학적인 재산을 축적했다.
크라수스의 부는 여러 방면에서 축적되었다. 첫째, 술라의 금지령 시기에 몰수된 재산을 헐값에 구입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둘째, 로마 시내 화재가 발생하면 건물을 싸게 사들인 후 자신의 사설 소방대로 불을 끄고 재건축하여 임대업을 했다. 셋째, 노예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건축, 공예, 서기 등 다양한 분야에 투자했다.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크라수스는 로마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많은 정치인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정치적 의무를 만들었고,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을 후원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젊고 유능하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운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군사적 명성에서는 폰페이우스에게 뒤처진다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 진압의 공로도 폰페이우스에게 일부 가로채인 상황이었다. 이러한 라이벌 의식은 그가 후에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하는 동기가 되었다.
젊은 카이사르의 등장과 초기 경력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로마의 명문 패트리키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율리우스 가문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후손을 자처하는 고귀한 혈통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리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정치적 성향은 일찍부터 민중파 쪽으로 기울었다. 그의 숙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당시 원로원파는 폰페이우스와 크라수스 같은 기존 강자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진 정치인인 카이사르로서는 민중파를 통해 돌파구를 찾는 것이 유리했다.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웅변술과 정치적 감각을 보였다. 기원전 77년 마르쿠스 돌라벨라를 갈취 혐의로 고발하여 정계에 데뷔했고, 이후 키케로와 함께 로마 최고의 웅변가로 인정받았다. 또한 그는 과감한 정치적 제스처를 통해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특히 기원전 69년 카이사르가 자신의 고모 율리아(마리우스의 부인)와 첫 번째 부인 코르넬리아의 장례식에서 마리우스와 킨나의 초상을 전시한 사건은 큰 화제가 되었다. 이는 술라가 금지한 행위였지만, 카이사르는 대담하게 마리우스파의 전통을 복원했다.
비밀 정치 동맹의 결성
기원전 60년, 세 명의 강력한 정치인이 비밀리에 정치 동맹을 결성했다. 폰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로 이루어진 이 동맹은 후에 '제1삼두정치'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제도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비공식적 협약이었다.
각자의 동기는 달랐다. 폰페이우스는 동방 정벌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의 견제로 인해 퇴역군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다른 정치 세력의 도움이 필요했다.
크라수스는 폰페이우스의 독주를 견제하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특히 아시아 속주에서의 세금 징수권 문제에서 기사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그는 폰페이우스에 맞설 수 있는 군사적 명성을 얻고 싶어 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 집정관 선거를 앞두고 있었지만, 막대한 선거 비용과 정치적 후원이 필요했다. 그는 집정관직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이후 속주 총독으로 나가 군사적 명성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집정관직과 정치적 혼란
기원전 59년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당선되면서 삼두정치의 진짜 위력이 드러났다.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은 원로원파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였는데, 그는 카이사르의 강력한 개혁 정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이용하여 삼두정치의 합의 사항들을 법제화했다. 첫째, 폰페이우스의 퇴역군인들에게 캄파니아의 공유지를 분배하는 농지법을 통과시켰다. 둘째, 폰페이우스의 동방 정벌 조치들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셋째, 크라수스가 대변하는 기사 계급의 세금 징수 조건을 완화해주었다.
이러한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기존의 정치적 관례를 무시하는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동료 집정관 비불루스의 거부권을 무력으로 무효화하고,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회에서 직접 법안을 통과시켰다.
특히 비불루스가 카이사르의 농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려 하자, 카이사르는 폰페이우스의 퇴역군인들을 동원하여 물리적으로 저지했다. 이 과정에서 비불루스는 분뇨를 뒤집어쓰고 파스케스(권위의 상징)가 부러지는 굴욕을 당했다. 이후 비불루스는 집에 칩거하며 사실상 집정관직을 포기했다.
갈리아 총독직 획득과 원정 준비
카이사르의 궁극적인 목표는 군사적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속주 총독직이었다. 그는 삼두정치 동료들의 지원을 받아 갈리아 키살피나(북부 이탈리아)와 일리리쿠스 총독직을 5년간 맡게 되었다. 여기에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남부 프랑스)까지 추가되어 사실상 갈리아 전체의 책임자가 되었다.
갈리아는 당시 로마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경제적으로는 풍부한 자원과 노예를 공급할 수 있는 땅이었고, 군사적으로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는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젊은 총독이 군사적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이상적인 무대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떠나기 전에 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는 폰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정적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를 호민관으로 당선시켰다. 클로디우스는 과격한 민중파 정치인으로, 무료 곡물 배급법 등을 통해 도시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카이사르는 정략 결혼을 통해 정치적 연합을 강화했다. 그는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폰페이우스와 결혼시키고, 자신은 크라수스와 가까운 칼푸르니아와 결혼했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삼두정치의 결속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갈리아 원정의 시작과 헬베티족 전쟁
기원전 58년 봄, 카이사르는 4개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로 향했다. 마침 헬베티족이 현재의 스위스 지역에서 대이동을 시작하여 갈리아 서부로 이주하려 하고 있었다. 이는 카이사르에게 군사 개입의 명분을 제공했다.
헬베티족은 약 37만 명의 대부족으로, 이 중 전사가 9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게르만족의 압박을 피해 현재의 프랑스 서남부로 이주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의 이동 경로는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를 관통해야 했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의 이주 요청을 거부하고 군사력으로 저지했다. 그는 제네바 호수 근처에서 헬베티족의 도하를 막고, 이들이 다른 경로를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헬베티족이 세콰니족의 땅을 통과하여 이동하자, 카이사르는 갈리아 부족들의 요청을 받았다는 명분으로 추격에 나섰다.
기원전 58년 여름, 비브락테(현재의 몽 뵈브레) 근처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카이사르는 뛰어난 전술과 로마군의 우수한 훈련을 바탕으로 헬베티족을 대파했다. 헬베티족은 원래 거주지로 돌아가야 했고, 카이사르는 첫 번째 갈리아 승리를 거두었다.
아리오비스투스와의 대결
같은 해 가을, 카이사르는 또 다른 위협에 직면했다. 게르만족 족장 아리오비스투스가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 동부에 정착하여 세콰니족과 하이두이족을 압박하고 있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이미 10만 명 이상의 게르만족을 갈리아로 이주시켰고, 더 많은 부족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갈리아 부족들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달라고 카이사르에게 요청했다. 이는 카이사르에게 또 다른 군사 개입의 기회를 제공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로마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안정을 위해 그를 축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카이사르는 먼저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다. 그는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내 라인 강 동쪽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리오비스투스는 이를 거부하며 갈리아에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카이사르는 군사적 해결책을 선택했다.
보게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었다. 게르만족은 라인 강을 건너 도주했고, 아리오비스투스도 상처를 입고 간신히 탈출했다. 이 승리로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로마의 위신을 확고히 했고, 게르만족의 서진을 저지했다.
벨가이족과의 대규모 전쟁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갈리아 북부의 벨가이족 연합과 전쟁을 벌였다. 벨가이족은 갈리아에서 가장 용맹한 부족으로 여겨졌으며, 로마의 갈리아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대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의 연합군은 3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카이사르는 2개 군단을 추가로 모집하여 6개 군단으로 벨가이족에 맞섰다. 그는 체계적인 전략을 통해 벨가이족 연합을 하나씩 격파해나갔다. 특히 사비스 강(현재의 삼브르 강) 전투에서는 기습 공격을 받았지만 개인적 용맹과 뛰어난 지휘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벨가이족과의 전쟁에서 카이사르는 로마군의 공성술과 야전 전술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아두아투키족의 요새를 공격할 때 거대한 공성탑을 건설하여 적을 놀라게 했고,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아두아투키족이 밤중에 기습 공격을 시도하자 이들을 완전히 노예로 팔아버렸다.
갈리아 정복의 정치적 의미
기원전 57년까지의 갈리아 원정으로 카이사르는 이미 로마 최고의 군사 지휘관 반열에 올랐다. 그는 헬베티족, 게르만족, 벨가이족을 연이어 격파하며 갈리아 대부분을 로마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이러한 성과는 로마 본토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단순한 군사적 성과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막대한 전리품과 노예를 로마에 제공했다. 카이사르는 매년 갈리아에서 얻은 부를 로마의 정치인들과 민중에게 나누어주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했다.
정치적으로는 카이사르가 폰페이우스와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음을 의미했다. 폰페이우스의 동방 정벌에 견줄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는 삼두정치 내부의 역학 관계를 변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카이사르가 직업군인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얻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갈리아군은 카이사르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병집단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는 후에 내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제1삼두정치와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은 로마 공화정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세 강자의 비공식적 동맹은 전통적인 정치 제도를 우회하는 새로운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고, 카이사르의 군사적 성공은 개인의 카리스마가 국가 권력을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변화는 곧 공화정 체제의 근본적인 위기로 이어지게 되며, 로마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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