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17. 스파르타쿠스 난과 대서방 팽창의 병행

SSSCH 2025. 5. 2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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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의 독재가 끝난 후 로마는 표면적으로는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더욱 깊은 사회적 모순과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원전 70년대는 로마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복잡한 시기 중 하나로, 거대한 노예 반란과 동시에 지중해 서쪽으로의 영토 확장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노예 전쟁은 로마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같은 시기 벌어진 세르토리우스 전쟁과 키케로-카틸리나 사건은 공화정 체제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술라 체제의 균열과 사회적 긴장

술라가 기원전 78년 사망한 후, 그가 구축한 정치 체제는 빠르게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술라의 개혁은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치를 복원하려는 시도였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형태의 불안정을 만들어냈다. 특히 대규모 토지 몰수와 재분배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술라파 퇴역군인들에게 분배된 토지는 주로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의 비옥한 농지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농업 경험이 부족한 도시 출신이었기 때문에 농장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원래 토지 소유자들과 그 가족들은 재산을 잃고 유민이 되어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 전반에 불만과 원망을 누적시켰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노예제 경제의 확산이었다. 술라의 동방 원정과 각종 정복 전쟁을 통해 대량의 노예들이 이탈리아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주로 라티푼디움이라 불리는 대농장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특히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목축업과 농업에서 노예 노동은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등장과 노예 반란의 시작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훈련소에서 한 트라키아 출신 검투사가 동료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 그의 이름은 스파르타쿠스였다. 스파르타쿠스는 원래 트라키아의 전사였지만 로마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렸고, 검투사로 훈련받고 있었다.

검투사들의 탈출은 처음에는 단순한 도주 사건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뛰어난 지도력과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탈출한 검투사들을 조직화했다. 그들은 베수비우스 산으로 피신한 후, 인근 농장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며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다른 노예 반란과 구별되는 점은 그의 탁월한 전략적 사고와 조직 능력이었다. 그는 단순히 복수나 파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체계적인 군사 조직을 만들어 로마군에 맞섰다. 또한 해방된 노예들에게 무기 사용법을 가르치고 규율을 확립하여 정규군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갖추었다.

노예군의 급속한 성장과 초기 승리

스파르타쿠스군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처음에는 70여 명의 검투사로 시작된 반란이 수개월 만에 수만 명의 대군으로 발전했다. 이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노예제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깊이 누적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로마 정부는 처음에 이 반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레토르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가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지만, 베수비우스 산에서 스파르타쿠스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노예들은 로마군의 무기와 장비를 노획하여 더욱 강력해졌다.

이어서 파견된 프레토르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도 연이어 패배했다. 스파르타쿠스는 기동력을 활용한 게릴라 전술과 정면 돌파를 적절히 조합하여 로마군을 농락했다. 특히 그는 로마군의 예측을 뛰어넘는 행군 경로를 선택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러한 연속된 승리는 스파르타쿠스의 명성을 이탈리아 전역에 알렸고, 더 많은 노예들이 반란에 합류하게 만들었다. 농장 노예뿐만 아니라 광산 노예, 가정 노예, 심지어 일부 자유민들도 스파르타쿠스군에 가담했다.

노예군의 내부 분열과 전략적 딜레마

하지만 스파르타쿠스군이 거대해지면서 내부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쟁점은 반란의 최종 목표에 대한 의견 차이였다.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많은 추종자들은 이탈리아에 남아서 로마에 복수하기를 원했다.

특히 갈리아 출신 검투사 크릭수스와 독일 출신의 오에노마우스는 스파르타쿠스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각자 별도의 부대를 이끌며 독자적인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열은 노예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기원전 72년, 크릭수스가 이끄는 부대가 아풀리아에서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전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크릭수스를 포함한 수천 명의 노예들이 전사했고, 이는 스파르타쿠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건은 분열된 지휘부를 다시 통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크라수스의 등장과 로마의 본격적인 대응

연이은 패배에 당황한 로마 원로원은 마침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기원전 72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프레토르로 선출되어 노예 반란 진압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크라수스는 로마 최고의 부호 중 한 명으로, 술라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크라수스는 8개 군단, 약 4만 명의 대군을 동원했다. 이는 노예 반란 진압을 위해 동원된 군대로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그는 먼저 군기 확립을 위해 엄격한 규율을 적용했다. 특히 패배한 부대에 대해 '데키마티오(십일살)'라는 극형을 적용하여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크라수스의 전략은 스파르타쿠스군을 남부 이탈리아로 몰아넣은 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는 체계적인 추격과 봉쇄 작전을 통해 노예군의 활동 반경을 점차 좁혀나갔다. 특히 브룬디시움(브린디시)과 레기움(레조) 사이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노예군이 시칠리아로 도주하는 것을 막았다.

스파르타쿠스의 마지막 저항과 최후

스파르타쿠스는 시칠리아로 도주하여 과거 노예 반란의 근거지였던 이 섬에서 재기를 꾀하려 했다. 하지만 킬리키아 해적들과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시칠리아 도주 계획은 좌절되었다. 해적들은 금품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스파르타쿠스군은 칼라브리아 반도에 고립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마지막 도박을 걸었다. 그는 크라수스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북쪽으로 향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폰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고 있었고, 루쿨루스도 트라키아에서 원군을 파견하고 있었다.

기원전 71년 봄, 아풀리아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스파르타쿠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싸웠다. 로마 사료에 따르면 그는 크라수스와 일대일 대결을 벌이려 했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격전 중에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6만 명의 노예들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크라수스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잡힌 포로 6000명을 아피아 가도를 따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다. 이는 노예 반란에 대한 경고이자 로마의 위엄을 보여주는 잔혹한 시위였다.

세르토리우스 전쟁과 서방 팽창

스파르타쿠스 반란과 동시에 로마는 서쪽에서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반로마 독립 정부를 수립하고 8년간 저항을 계속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술라의 숙청을 피해 히스파니아로 도주한 마리우스파 장군이었다.

세르토리우스는 히스파니아 토착민들과 연합하여 로마에 맞섰다. 그는 현지 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로마식 교육과 행정을 도입하면서도 토착 문화를 존중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접근법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히스파니아 전역에서 반로마 세력이 결집했다.

로마는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기 위해 메텔루스 피우스와 폰페이우스를 파견했다. 특히 폰페이우스는 33세의 나이에 비정규 지휘권을 받아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하지만 세르토리우스는 게릴라 전술과 외교술을 결합하여 8년간 로마군을 괴롭혔다.

세르토리우스 전쟁은 로마의 서방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히스파니아 통치 방식을 재검토하게 되었고, 토착민과의 관계 개선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또한 폰페이우스는 이 전쟁에서 명성을 쌓아 후에 로마 정계의 강자로 부상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키케로의 등장과 정치적 격변

같은 시기 로마 정계에서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라는 새로운 인물이 부상하고 있었다. 키케로는 아르피눔 출신의 신진 정치인으로, 뛰어난 웅변술과 법률 지식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특히 부패한 총독들을 고발하는 사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기원전 70년, 키케로는 시칠리아 총독 베레스의 부패를 고발하는 재판에서 변론을 맡았다. 베레스는 시칠리아에서 3년간 총독을 지내며 엄청난 재물을 착취했고, 미술품과 곡물을 불법으로 수탈했다. 키케로는 치밀한 증거 수집과 논리적인 변론으로 베레스를 유죄로 만들었다.

이 재판의 승리는 키케로에게 로마 최고의 변호사라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총독의 부패와 속주 수탈 문제를 로마 시민들에게 각인시켰다. 키케로는 이후 정치 경력을 쌓아나가며 공화정 수호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카틸리나 음모사건과 공화정의 위기

기원전 63년, 키케로가 집정관으로 재임 중일 때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가 주도한 음모 사건이 발생했다. 카틸리나는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연이어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한 후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했다.

카틸리나의 음모는 단순한 개인적 야심을 넘어서는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빚에 시달리는 젊은 귀족들과 술라 체제에서 소외된 계층들을 규합했다. 이들은 기존 질서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급진적인 변화를 원했다.

키케로는 첩보망을 통해 카틸리나의 음모를 사전에 파악했다. 그는 원로원에서 유명한 '카틸리나 탄핵 연설'을 통해 음모를 폭로하고 카틸리나를 로마에서 추방했다. 이 연설은 로마 문학사에 남은 명작으로, "언제까지 카틸리나여, 당신은 우리의 인내심을 남용할 것인가?"라는 도입부는 특히 유명하다.

하지만 음모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카틸리나는 에트루리아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무력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 시내에 남은 공모자들은 갈리아 사절들과 연계하여 추가 음모를 꾸몄다. 키케로는 이들을 체포하여 원로원 최종 의결에 따라 재판 없이 처형했다.

음모사건이 드러낸 공화정의 구조적 문제

카틸리나 음모사건은 표면적으로는 키케로의 승리로 끝났지만, 실제로는 로마 공화정의 깊은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이 사건을 통해 로마 사회의 여러 균열이 명확히 드러났다.

첫째,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술라의 개혁 이후에도 부의 집중은 계속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특히 젊은 귀족들마저 과도한 선거 비용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빚에 허덕이는 상황이었다.

둘째, 정치 제도의 경직성이 문제가 되었다. 술라의 개혁은 원로원의 권위를 강화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유연성을 제한했다. 새로운 사회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했다.

셋째, 개인적 야심과 당파성이 공익보다 우선시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카틸리나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인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국가의 안정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노예제 경제의 모순과 사회적 갈등

스파르타쿠스 반란은 로마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인 노예제 문제를 부각시켰다. 로마의 팽창과 함께 노예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고, 이들은 경제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항상 잠재적인 불안 요소였다.

노예제 경제는 단기적으로는 로마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대농장은 높은 수익을 올렸고, 정복 전쟁에서 얻은 노예들은 즉시 경제력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유민 농민층의 몰락과 사회적 불안정을 야기했다.

특히 이탈리아 반도에서 자유민 농민들은 노예 노동과의 경쟁에서 밀려났다. 이들은 군 복무로 인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고, 귀환 후에는 값싼 노예 생산품과 경쟁해야 했다. 결국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도시의 무산자가 되었다.

지중해 패권과 새로운 도전

이 시기 로마는 지중해 동쪽에서는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서쪽에서는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로마의 군사력과 조직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광범위한 팽창은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속주 통치 비용이 증가했고, 각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정책이 필요해졌다. 또한 장거리 원정을 수행할 수 있는 직업군인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특히 해적 문제가 심각해졌다. 지중해 각지에서 활동하는 킬리키아 해적들은 로마의 해상 교역을 위협했고, 심지어 이탈리아 연안까지 침입하여 로마 시민들을 납치했다. 이는 로마가 지중해 전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기원전 70년대는 로마사에서 극적인 변화의 시기였다.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은 로마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냈고, 키케로와 카틸리나의 대립은 정치 제도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세르토리우스 전쟁과 각종 대외 원정은 로마의 군사적 우위를 확인시켜주었지만, 새로운 형태의 도전도 제기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위기와 성장이 교차하는 가운데, 로마는 곧 폰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로 대표되는 새로운 강자들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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