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15. 마리우스 개병제와 술라 독재의 충돌 - 군사 충성 체계의 변화와 내전의 시작

SSSCH 2025. 5. 26.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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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의 등장과 군제 개혁의 필요성

그락쿠스 형제의 비극적 죽음 이후 로마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갈등에 휩싸인다. 기원전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면서 로마 공화정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된다. 마리우스는 아르피눔 출신의 신인(novus homo)으로, 전통적인 귀족 가문이 아닌 평민 출신이었다. 그의 등장은 로마 정치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로마는 북아프리카에서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유구르타는 로마 장군들을 매수하여 전쟁을 장기화시키고 있었고, 이에 분노한 로마 민중은 기존 귀족 정치가들에게 실망한 상태였다. 마리우스는 이런 상황을 기회로 삼아 유구르타 전쟁의 지휘권을 얻고, 군제 개혁을 단행한다.

로마의 전통적인 군사 제도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일정한 재산을 가진 시민만이 군복무를 할 수 있는 시민병 제도는 소농층의 몰락으로 징병 대상자가 급감하면서 유지가 어려워진다. 또한 지중해 전역으로 확장된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장기간 복무하는 직업 군인이 필요했지만, 기존 제도로는 이를 충족할 수 없었다.

개병제의 핵심 내용과 혁명적 변화

기원전 107년 마리우스는 혁명적인 군제 개혁을 실시한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재산 자격을 폐지하고 자원병을 모집한 것이다. 이제 로마 시민이라면 재산이 없어도 군대에 입대할 수 있게 된다. 국가는 이들에게 무기와 장비를 지급하고 정기적인 급료를 지불한다. 이는 군대의 사회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변화였다.

복무 기간도 대폭 연장된다. 기존에는 한 번의 원정이 끝나면 해산되던 임시 군대였지만, 이제는 25년간 복무하는 직업 군인으로 바뀐다. 또한 군단의 조직과 전술도 개선된다. 조작군단(마니플) 제도를 폐지하고 코호르트(cohort) 중심의 새로운 편제를 도입한다. 한 군단은 10개 코호르트로 구성되고, 각 코호르트는 480명의 병력을 갖는다.

마리우스는 또한 군단의 상징물로 독수리(aquila)를 도입한다. 각 군단마다 고유한 독수리 깃발을 갖게 되어 군단의 정체성과 자긍심이 크게 강화된다. 병사들은 자신이 속한 군단에 강한 애착을 갖게 되고, 독수리를 잃는 것은 최대의 수치로 여겨진다.

새로운 충성 체계와 정치적 파급 효과

개병제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과는 군대의 충성 대상이 바뀐 것이다. 전통적으로 로마군은 국가와 공화정에 충성했지만, 이제는 자신들을 모집하고 급료를 주는 장군 개인에게 충성하게 된다. 특히 전역 후 토지를 분배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장군의 정치적 영향력에 달려 있어, 병사들은 자신의 장군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런 변화는 로마 정치에 군사력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 유력한 장군들은 자신의 군단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전통적인 문민 통제를 위협한다. 마리우스 자신도 이런 새로운 권력을 이용하여 전례 없이 7번의 집정관직에 오른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즉각적인 군사적 성과를 거둔다. 유구르타 전쟁에서 승리하고, 킴브리족과 튜톤족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특히 기원전 102년 아퀘 섹스티아에 전투와 기원전 101년 베르켈라이 전투에서 게르만족을 대파하여 이탈리아를 구해낸다. 이런 승리로 마리우스는 "조국의 구원자"라는 영예를 얻는다.

동맹시 전쟁과 시민권 문제

기원전 91년부터 88년까지 벌어진 동맹시 전쟁(Social War)은 로마 공화정에 또 다른 충격을 준다.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국들이 로마 시민권을 요구하며 무력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로마의 정복 전쟁에 병력과 자원을 제공했지만, 정치적 권리는 제한되어 있었다. 특히 그락쿠스 형제가 제기했던 시민권 확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동맹시들은 코르피니움을 수도로 하는 연합 정부를 구성하고 "이탈리아"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이들의 군사력은 만만치 않았다. 로마군 훈련을 받은 베테랑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고, 조직력도 뛰어났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대규모 내전을 치러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전쟁 초기 로마군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전사하는 등 큰 손실을 입는다. 하지만 로마는 군사적 압박과 동시에 정치적 양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기원전 90년 율리우스법을 통해 로마에 충성하는 동맹국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기원전 89년 플라우티우스법으로 반란에 참여했다가 항복한 도시들에게도 시민권을 준다.

술라의 등장과 마리우스와의 갈등

동맹시 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였다. 그는 전통적인 귀족 가문 출신으로 마리우스와는 정반대의 배경을 가졌다. 술라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냉혹한 성격으로 동맹시들을 압박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만의 충성스러운 군단을 형성하게 된다.

기원전 88년, 소아시아에서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는 원정군을 파견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집정관이 된 술라가 이 원정의 지휘권을 얻지만, 호민관 술피키우스가 민회를 통해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는 그락쿠스 형제 이후 계속된 민중파와 보수파의 갈등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술라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캄파니아에서 훈련 중이던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한다. 로마 시내에 무력으로 진입한 것은 공화정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술피키우스는 살해되고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도피한다. 술라는 자신에게 불리한 법들을 모두 폐지하고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한다.

킨나의 쿠데타와 마리우스의 복귀

기원전 87년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원정을 떠나자, 집정관 중 한 명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반술라 정책을 추진한다. 킨나는 새로 시민권을 얻은 이탈리아인들을 모든 부족에 고르게 분산시키는 법안을 제출한다. 이는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높이는 조치였다. 술라의 지지자들이 이에 반발하여 킨나를 축출하자, 킨나는 로마 밖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무력으로 반격한다.

킨나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마리우스와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연합군을 이끌고 로마를 포위한다. 도시 내 식량이 떨어지자 로마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킨나와 마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하면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된다. 술라의 지지자들과 보수파 인사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한다.

마리우스는 7번째 집정관에 취임하지만, 취임 17일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이후 킨나가 4년간 로마를 지배하면서 마리우스파의 정책을 계속 추진한다. 하지만 기원전 84년 킨나가 군사적 반란으로 사망하면서 마리우스파의 권력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술라의 귀환과 무자비한 복수

기원전 83년,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끝내고 5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그는 브린디시에 상륙하여 즉시 로마를 향해 진군한다. 젊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폼페이우스 대제)가 자체적으로 3개 군단을 모집하여 술라에게 합류한다. 또한 마르쿠스 크라수스도 술라편에 서면서 마리우스파는 불리한 상황에 처한다.

기원전 82년 콜리네 문 전투에서 술라가 결정적 승리를 거둔다. 마리우스의 아들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소마리우스)가 자살하고, 마리우스파의 저항이 사실상 끝난다. 술라는 즉시 독재관(dictator)에 취임하여 무제한적 권력을 장악한다. 전통적으로 독재관은 6개월의 임기 제한이 있었지만, 술라는 "국가 재건을 위해" 무기한 독재관직을 자처한다.

술라의 복수는 무자비했다. 그는 처형 명단(proscriptio)을 공표하여 정적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한다. 명단에 오른 사람은 누구든지 죽일 수 있었고, 살해자에게는 상금이 주어졌다. 약 4,700명의 로마 시민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다. 재산 몰수도 대규모로 이루어져 술라와 그의 지지자들이 막대한 부를 차지한다.

술라의 개혁과 보수적 복고 정책

술라는 단순히 정적을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화정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한다. 그의 목표는 원로원 중심의 전통적 정치 체제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우선 원로원 의원 수를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려 권위를 강화한다. 또한 호민관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여 민중 선동 정치를 억제하려 한다.

사법 제도도 개편한다. 상설 법정(quaestio perpetua)을 확대하여 다양한 범죄를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한다. 배심원은 다시 원로원 의원으로 제한하여 기사계급의 영향력을 줄인다. 관직 진출에도 엄격한 규정을 둔다. 집정관 경험자는 10년 후에야 재선에 도전할 수 있고, 속주 총독 임기도 1년으로 제한한다.

술라는 또한 이탈리아 전역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자신의 퇴역 군인들을 정착시킨다. 약 12만 명의 병사들이 몰수한 토지에 정착하여 술라 체제의 사회적 기반을 형성한다. 이들은 술라의 정책에 대한 든든한 지지 세력이 되지만, 동시에 기존 토지 소유자들과의 갈등 요소이기도 했다.

술라의 권력 포기와 그 의미

기원전 79년, 놀랍게도 술라는 스스로 독재관직을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그는 "국가 재건 임무가 끝났다"며 쿠마의 별장으로 물러난다. 다음 해인 기원전 78년 술라가 사망하면서 그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린다. 술라의 자발적 권력 포기는 후대 독재자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하지만 술라 체제는 그의 죽음과 함께 급속히 무너진다. 그가 억압했던 세력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갈등이 시작된다. 특히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같은 술라의 후계자들조차 스승의 제도를 지키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확대에 더 관심을 보인다.

술라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군사력을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선례를 만든 것이다. 마리우스가 시작하고 술라가 완성한 이런 패턴은 이후 공화정 말기 정치가들의 표준적 행동 양식이 된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 안토니우스 등 모든 유력 정치가들이 이 길을 따른다.

새로운 정치 문화의 형성

마리우스와 술라의 갈등은 로마 정치 문화를 돌이킬 수 없게 바꾼다. 정치적 경쟁이 더 이상 원로원 내부의 토론과 설득으로 해결되지 않고, 무력 충돌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화된다. 개인의 정치적 야망이 국가의 안정보다 우선시되고, 헌정 규범의 파괴가 정당화된다.

또한 군대의 정치적 역할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이제 군단은 단순히 국가 방위 수단이 아니라 정치적 협상의 도구가 된다. 유력한 장군들은 자신의 군사적 성취를 정치적 자본으로 활용하고, 필요하면 무력을 사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는다.

민중 역시 정치 과정에서 수동적 역할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하지만 이는 건전한 민주적 참여가 아니라 선동과 폭력을 동반하는 군중 정치의 성격을 갖는다. 정치가들은 민중의 즉각적 이해관계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지지를 얻으려 하고, 이는 장기적인 국가 발전을 저해한다.

결론

마리우스의 개병제와 술라의 독재는 로마 공화정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마리우스가 도입한 새로운 군제는 로마의 군사력을 크게 강화했지만, 동시에 군대의 충성 체계를 바꿔 정치적 불안정의 씨앗을 뿌린다. 술라는 이런 새로운 군사력을 정치적 목적으로 최초로 활용하여 성공한 인물이지만, 그의 선례는 공화정의 전통적 기반을 훼손한다.

두 사람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 야망의 충돌을 넘어서 로마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반영한다. 제국의 확장으로 인한 사회 계층의 분화, 전통적 제도와 새로운 현실 간의 괴리,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등이 모두 이 갈등 속에 나타난다. 이런 문제들은 마리우스와 술라 개인의 죽음으로 해결되지 않고, 이후 공화정 말기의 연속적인 내전으로 이어진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는 로마가 도시국가적 공화정에서 제국적 군주정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성격을 갖는다. 아직 완전한 군주정은 아니지만, 이미 전통적 공화정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정치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로 이어지는 변화의 출발점이며, 로마사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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