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12. 제2차 포에니 전쟁과 한니발의 침공 - 칸나에 참패에서 자마 승리까지

SSSCH 2025. 5. 26.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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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서막과 사군툼 위기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지 23년 후인 기원전 218년, 로마와 카르타고는 다시 한 번 운명적 대결을 벌이게 된다. 이번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 사군툼에서 불씨가 타오른다. 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 전쟁 패배 후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잃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새로운 세력 기반을 구축해왔다.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스페인 정복을 시작했고, 그의 사위 하스드루발이 뒤를 이어 카르타고 노바(카르타헤나)를 건설하며 영향력을 확대한다. 기원전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한 후, 26세의 젊은 한니발이 카르타고 스페인군의 총사령관이 된다. 그는 부친과 매형으로부터 물려받은 로마에 대한 깊은 원한과 함께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사군툼은 에브로 강 남쪽에 위치한 도시로, 카르타고의 세력권 내에 있으면서도 로마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니발이 사군툼을 공격하자 로마는 즉각 항의하며 철군을 요구한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를 무시하고 8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사군툼을 함락시킨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한니발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카르타고 정부는 이를 거부한다.

한니발의 대담한 알프스 횡단 작전

한니발은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는 대담한 계획을 세운다. 해상에서 로마군과 정면 충돌하는 대신, 육로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직접 침공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기원전 218년 봄, 한니발은 9만 명의 보병, 1만 2천 명의 기병, 그리고 37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를 출발한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현지 부족들의 저항에 직면하지만, 한니발은 외교와 무력을 적절히 조합하여 돌파한다. 론 강을 건넌 후 마침내 알프스 산맥에 도달한다. 가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알프스 횡단은 극도로 위험한 도전이었다. 험준한 산길, 급작스런 기온 변화, 산악 부족들의 기습 공격이 연속적으로 카르타고군을 괴롭힌다.

15일 간의 고난 끝에 한니bal은 마침내 이탈리아 북부 평원에 도달한다. 하지만 대가는 컸다. 출발할 때 10만 명이 넘던 병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전투 코끼리도 대부분 추위와 피로로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무후무한 작전은 로마인들에게 엄청한 충격을 안겨준다. 그들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던 이탈리아 본토가 갑자기 전쟁터가 된 것이다.

초기 승리와 로마군의 연속 패배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한 한니발은 즉시 현지 갈리아 부족들과 동맹을 맺는다. 로마에 불만을 품고 있던 갈리아인들은 기꺼이 한니발에게 병력과 보급을 제공한다. 한니발의 군대는 다시 4만 명 규모로 회복된다.

기원전 218년 12월, 티키누스 강 근처에서 첫 번째 교전이 벌어진다.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대스키피오의 아버지)가 이끄는 로마군과 한니발군이 주로 기병전으로 맞붙는다. 한니발의 누미디아 경기병들이 로마 기병을 압도하며 승리를 거둔다. 스키피오는 부상을 입고 후퇴하게 된다.

얼마 후 트레비아 강에서 더 큰 규모의 전투가 펼쳐진다. 또 다른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한다. 한니발은 매복 전술을 사용하여 로마군을 강 건너편으로 유인한 후 양쪽에서 협공한다. 로마군은 4만 명 중 1만 명만 살아남는 대패를 당한다.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대매복전

기원전 217년, 한니발은 더욱 대담하게 중부 이탈리아로 진격한다. 새로 선출된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한니bal을 추격한다. 플라미니우스는 민중파 정치인으로 성급하고 자만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한니발은 이런 그의 성격을 간파하고 교묘한 함정을 준비한다.

트라시메누스 호수(키우시 호) 북쪽 연안의 좁은 길목에서 한니발은 완벽한 매복진을 구축한다. 이른 아침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로마군이 길쭉한 행군 대열로 진입하자, 언덕에 숨어있던 카르타고군이 일제히 공격한다. 플라미니우스를 포함해 1만 5천 명의 로마군이 전사하고, 1만 명이 포로가 되는 참혹한 패배였다.

이 승리로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까지 장악하게 된다. 로마 시내는 공포에 휩싸이고, 시민들은 한니발이 언제 로마를 공격할지 전전긍긍한다. 로마 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독재관을 임명한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독재관으로 선출되어 새로운 전략을 펼치기 시작한다.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과 그 한계

파비우스는 한니발과 정면 승부를 피하고 지연 전술을 펼친다. 한니발군을 계속 추적하면서도 결전은 회피하고, 소규모 기습과 보급선 차단을 통해 적을 소모시키는 전략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지연자(Cunctator)'라는 별명을 얻는다. 처음에는 비겁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전략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니발은 식량과 보급품 확보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는 이탈리아 도시들 대부분이 여전히 충성을 유지하고 있어 현지 조달이 쉽지 않았다. 또한 본국 카르타고로부터의 지원도 제한적이었다. 카르타고 정부는 여전히 스페인과 시칠리아에서 벌어지는 다른 전선에 신경쓰느라 한니발에게 충분한 증원군을 보내지 못한다.

하지만 로마 내부에서는 파비우스의 소극적 전략에 대한 불만이 커진다. 특히 젊은 귀족들과 민중은 조속한 결전을 통해 명예로운 승리를 거두기를 원한다. 기원전 216년 집정관 선거에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당선된다. 바로는 특히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칸나에의 치명적 참패

기원전 216년 8월 2일, 아풀리아 지역의 칸나에에서 로마사상 최악의 패배가 일어난다. 로마는 사상 최대 규모인 8만 6천 명의 병력을 동원한다. 8개 군단에 동맹군까지 합친 거대한 군대였다. 한니발의 병력은 약 5만 명으로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질적으로는 훨씬 우수했다.

한니발은 전투사에 길이 남을 포위섬멸전술을 구사한다. 중앙에는 상대적으로 약한 갈리아 보병을 배치하고, 양쪽 날개에는 정예 아프리카 보병을 숨겨둔다. 로마군이 중앙을 밀어붙이며 전진하면 갈리아 부대는 계획적으로 후퇴하여 초승달 모양의 오목한 진형을 만든다. 로마군이 더 깊숙이 들어오면 양쪽 날개의 아프리카 보병이 측면을 공격하고, 한니발의 기병대가 후방을 차단한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로마군은 완전히 고립된다. 병력이 많을수록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집정관 파울루스를 비롯해 원로원 의원 80명, 기타 고위 관리들이 대거 전사한다. 총 5만 명이 넘는 로마군이 죽거나 포로가 되는 사상 초유의 대참사였다. 로마는 하루 만에 성인 남성 인구의 10분의 1을 잃는다.

로마의 절망적 위기와 불굴의 의지

칸나에 패배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도시 전체가 절망에 빠진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종말이 왔다고 생각한다. 일부 귀족들은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해외로 도피하려 한다. 하지만 22세의 젊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훗날 아프리카누스)가 이들을 제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한다.

원로원은 비상 조치를 발동한다. 16세 이상의 모든 남성을 징집하고, 노예들까지 해방시켜 군대에 편입시킨다. 채무자들을 풀어주고 죄수들을 사면하여 병력을 충원한다. 또한 동맹국들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하며, 갈리아에서는 용병까지 모집한다. 로마는 국가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한니발은 칸나에 승리 후 로마를 직접 공격할 기회를 놓친다. 부관 마하르발이 "5일 안에 로마에서 승리 연회를 열 수 있다"며 진격을 촉구했지만, 한니발은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로마의 견고한 성벽과 방어 시설을 고려할 때 공성전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신 남부 이탈리아에서 더 많은 동맹 세력을 확보하는 데 집중한다.

이탈리아 동맹 체제의 동요와 균열

칸나에 승리 후 한니발의 최대 성과는 로마의 동맹 체제에 균열을 만든 것이었다.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이 로마를 배신하고 카르타고 편으로 넘어간다. 가장 큰 타격은 카푸아의 배신이었다. 캄파니아 지역의 최대 도시이자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인 카푸아가 한니발과 동맹을 맺는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도 로마와 결별한다. 히에론 2세가 죽은 후 그의 손자 히에로니무스가 카르타고와 손을 잡는다.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 아르피, 로크리 등도 차례로 한니발 편에 선다. 심지어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까지 한니발과 동맹 조약을 체결하여 로마를 동서에서 협공하려 한다.

하지만 로마의 진짜 힘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라틴 동맹의 핵심 도시들과 중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도시들은 끝까지 로마에 충성을 유지한다. 특히 라틴족과 삼니움족 같은 주요 동맹 세력들이 흔들리지 않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로마는 이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반격의 기회를 모색한다.

마르켈루스의 공세와 방어 전략

로마는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과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적극적 공세를 조합한 새로운 전략을 개발한다. 마르켈루스는 '로마의 검'이라 불리며 한니발과 정면 대결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장군이었다. 그는 한니발의 분견대나 약화된 부대를 노려 기습 공격을 가하는 전술을 구사한다.

기원전 215년부터 시칠리아에서 대규모 군사 작전이 시작된다. 마르켈루스가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하면서 2년간의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진다. 시라쿠사에는 위대한 수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르키메데스가 있어 다양한 방어 장치를 고안한다. 거대한 거울로 태양빛을 모아 로마 함선을 태우고, 크레인과 도르래를 이용해 적선을 들어올리는 등 기상천외한 무기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결국 기원전 212년 로마군이 시라쿠사를 함락시킨다. 안타깝게도 아르키메데스는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다. 시칠리아 전체가 다시 로마의 손에 넘어가면서 한니발의 해상 보급로가 차단된다. 동시에 스페인에서도 스키피오 형제가 카르타고군과 맞서 싸우며 한니발의 지원군 파견을 저지한다.

카푸아 탈환과 한니발의 로마 진격

기원전 212년, 로마는 배신한 카푸아를 되찾기 위한 대규모 공성전을 시작한다. 카푸아의 함락은 상징적 의미가 컸다. 한니발 편으로 넘어간 도시들에게 로마의 보복이 얼마나 혹독한지 보여주는 본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카푸아 주변에 이중 성벽을 구축하여 완전히 포위한다.

한니발은 카푸아를 구원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로마군의 포위망이 너무 견고했고, 직접 돌파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다. 마침내 한니발은 극단적 결정을 내린다. 카푸아를 포기하는 대신 로마를 직접 공격하여 로마군을 철수시키겠다는 것이다.

기원전 211년, 한니발은 3만 명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로마성 코룰라 게이트 앞까지 진격한다. 로마 시민들은 공포에 떨며 성벽 위에서 적군을 바라본다. 하지만 로마군은 동요하지 않는다. 카푸아 포위군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로마 시내의 방어군만으로 한니발을 저지한다. 며칠 후 한니발은 로마 공격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철수한다. 결국 카푸아는 함락되고, 배신의 댓가로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하스드루발의 지원군과 메타우루스 강 전투

한니발의 가장 큰 약점은 증원군 부족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원전 208년, 그의 동생 하스드루발이 스페인에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향한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과 같은 경로로 이동하여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에 도달한다. 만약 두 형제가 합류한다면 로마는 다시 치명적 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로마는 이 위험을 간파하고 모든 것을 걸고 하스드루발을 저지하기로 한다.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남부에서 한니발을 견제하고, 마르쿠스 리비우스가 북부에서 하스드루발을 막는다. 네로는 대담한 결정을 내린다. 한니발 몰래 정예 부대 7천 명을 이끌고 밤을 새워 북부로 급행군한다.

기원전 207년, 메타우루스 강에서 결정적 전투가 벌어진다. 하스드루발은 두 명의 집정관이 합류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전투에서 로마군이 승리하고 하스드루발이 전사한다. 네로는 하스드루발의 목을 베어 남부로 돌아가 한니발의 진영 앞에 던진다. 한니발은 동생의 죽음을 확인하고 절망한다. 이제 그는 정말로 이탈리아에서 고립된 것이다.

스키피오의 등장과 아프리카 전략

칸나에 전투에서 살아남은 젊은 스키피오는 점차 두각을 나타낸다. 기원전 210년 25세의 나이에 스페인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점령하는 등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그는 한니발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지 이베리아 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포로들을 잘 대우하고, 부족장들의 딸들을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등 관대한 정책을 펼친다.

기원전 206년, 스키피오는 일리파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완전히 물리치고 스페인을 장악한다. 이제 그는 더 대담한 계획을 제시한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레굴루스가 실패한 아프리카 침공을 다시 시도하자는 것이다. 보수적인 원로원은 처음에 반대했지만, 스키피오의 설득력과 그간의 성과에 힘입어 결국 허가한다.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프리카에 상륙한다. 그는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과 동맹을 맺어 기병력을 확보하고, 카르타고의 동맹국 우티카를 공격한다. 카르타고는 대혼란에 빠진다. 본토가 위험해지자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철수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한니발의 귀국과 자마 결전

기원전 203년, 카르타고 정부는 마침내 한니발에게 귀국 명령을 내린다. 한니발은 15년간 머물렀던 이탈리아를 떠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브루티움(칼라브리아) 남단에서 병력을 수송선에 태우고 아프리카로 향한다.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날까지도 한니발은 패배한 적이 없었다.

아프리카에 도착한 한니발은 즉시 병력을 재편성한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베테랑들과 새로 모집한 아프리카 신병들, 그리고 켈트족 용병들을 합쳐 약 4만 명의 군대를 구성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누미디아 기병대는 대부분 마시니사가 스키피오 편에 서면서 확보하지 못한다.

기원전 202년 10월, 자마 평원에서 마침내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직접 맞붙는다. 전투 전 두 명장은 단독으로 만나 담판을 시도하지만 결렬된다. 한니발은 전투 코끼리 80마리를 선봉에 내세우지만, 스키피오는 이미 대비책을 마련해두었다. 로마군 대열에 통로를 만들어 코끼리들을 측면으로 유도하고, 나팔 소리로 코끼리들을 혼란시킨다.

결정적 순간에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이 한니발군의 측면을 공격한다. 한니발은 2만 명의 병력을 잃고 패배한다. 이는 그의 생애 첫 번째이자 마지막 패배였다. 자마 전투의 승리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결론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위험했던 시기였다. 한니발이라는 천재 군사전략가의 등장으로 로마는 멸망 직전까지 몰렸지만, 결국 제국의 저력과 동맹 체제의 결속력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칸나에에서의 참혹한 패배는 오히려 로마인들의 투지를 더욱 불러일으켰고,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과 스키피오의 공세적 전략이 조합되어 최종 승리를 이끌어낸다.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지중해 패권을 확고히 하게 된다. 카르타고는 더 이상 로마에 위협이 되지 못하는 2류 국가로 전락하고, 로마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헬레니즘 세계 정복에 나서게 된다. 한니발의 침공으로 시작된 17년간의 대전쟁은 결국 로마를 진정한 지중해 제국으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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