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초 영국의 정치적 환경
2010년 총선 이후 데이비드 캐머런이 이끄는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 정부가 출범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기 침체와 재정 적자 문제가 심각했던 상황에서, 연립 정부는 긴축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공공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복지 혜택을 축소하면서 사회적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동시에 영국 내 유럽 회의주의가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2004년과 2007년 EU 동유럽 확대로 폴란드, 루마니아 등에서 온 이민자들이 급증하면서 일자리와 복지 혜택을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었다. 특히 저숙련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임금 하락과 고용 불안에 대한 우려가 컸다.
200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나이젤 패라지가 이끄는 영국독립당(UKIP)이 2위를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UKIP는 EU 탈퇴와 이민 통제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기존 정당들에 대한 불만을 흡수했다. 특히 잉글랜드 북부와 중부의 전통적인 노동당 지지 지역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언론의 역할도 중요했다. 데일리 메일, 더 선, 익스프레스 등 대중지들은 오랫동안 반EU 논조를 유지해왔다. 이들은 EU 규제의 과도함, 브뤼셀 관료주의의 문제점, 영국 주권 침해 등을 지속적으로 부각시켰다. 바나나 곡률 규제, 전구 규제 등 사소해 보이는 EU 규정들이 과장되어 보도되면서 대중들의 반감을 키웠다.
캐머런의 국민투표 공약
2013년 1월 23일,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블룸버그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그는 차기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 EU와의 관계를 재협상한 후, 2017년 말까지 EU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영국 정치사에 커다란 파장을 던진 결정이었다.
캐머런의 계산은 복합적이었다. 우선 UKIP의 급성장으로 보수당 우파 의원들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2014년 더글러스 카스웰과 마크 레크먼이 UKIP로 당적을 옮기면서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는 등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었다. 국민투표 공약은 이런 우파 이탈을 막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또한 캐머런은 국민투표에서 잔류파가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2014)에서 독립 반대가 55%로 승리한 경험이 있었고, 경제적 논리가 결국 유권자들을 설득할 것이라고 믿었다. 국민투표를 통해 EU 문제를 완전히 정리하고, 보수당 내부의 분열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EU와의 재협상도 중요한 카드였다. 캐머런은 이민 관련 혜택 제한, 국가 주권 강화, 유로존과 비유로존 간 차별 금지 등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조건에서의 EU 잔류"를 국민들에게 제시할 계획이었다.
2015년 5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며 단독 정부를 구성하게 되면서, 캐머런은 공약을 이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연립 정부였다면 자유민주당의 반대로 국민투표를 피할 수도 있었지만, 단독 정부가 되면서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어졌다.
EU와의 재협상 과정
2015년 11월부터 캐머런은 본격적인 EU 재협상에 착수했다. 주요 요구사항은 네 가지였다. 첫째, EU 이민자들의 영국 내 사회보장 혜택을 4년간 제한하는 것, 둘째, 유로존과 비유로존 국가 간 차별 금지, 셋째, 규제 부담 완화, 넷째, 'ever closer union(더욱 긴밀한 연합)'에서 영국 제외 등이었다.
협상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이민자 혜택 제한 문제에서 동유럽 국가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은 이것이 EU의 기본 원칙인 차별 금지와 이동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도 EU 통합의 기본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2016년 2월 18-19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이사회에서 마침내 합의가 이루어졌다. EU 이민자들의 사회보장 혜택을 최대 4년간 단계적으로 제한할 수 있도록 했고, 영국이 'ever closer union'에 참여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했다. 유로존과 비유로존 간 차별도 금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캐머런이 기대했던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혜택 제한도 '비상 상황'에서만 발동할 수 있도록 제한되었고, 다른 요구사항들도 상당히 약화되었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를 "미미한 성과"라고 평가했다. 특히 탈퇴 진영은 이것이 캐머런의 실패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공격했다.
국민투표 캠페인의 시작
2016년 2월 20일, 캐머런은 6월 23일 국민투표 실시를 정식 발표했다. 동시에 그는 재협상 결과를 바탕으로 EU 잔류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제 본격적인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잔류 진영은 '브리튼 스트롱거 인 유럽(Britain Stronger in Europe)'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캐머런을 비롯해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 테레사 메이 내무장관 등 보수당 주류와 노동당, 자유민주당, 스코틀랜드국민당이 참여했다. 또한 골드만삭스, JP모건 등 주요 금융기관과 대기업들도 잔류를 지지했다.
탈퇴 진영은 처음에 두 개의 조직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이젤 패라지가 이끄는 '리브닷EU(Leave.EU)'와 도미닉 커밍스가 운영하는 '보트 리브(Vote Leave)'였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보트 리브를 공식 탈퇴 캠페인으로 지정했는데, 이는 패라지의 극우 이미지보다는 좀 더 온건한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보트 리브에는 보리스 존슨 런던시장,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 이언 던컨 스미스 전 당수 등 보수당 유력 정치인들이 참여했다. 특히 보리스 존슨의 참여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오랫동안 EU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보여왔지만, 마지막까지 어느 편에 설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2월 21일 그가 탈퇴 지지를 선언하면서 캠페인의 판도가 크게 바뀌었다.
경제 중심의 잔류 진영 논리
잔류 진영의 핵심 전략은 경제적 논리였다. EU 탈퇴 시 발생할 경제적 비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유권자들의 우려를 자극하려 했다.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 "가구당 연간 4,300파운드의 손실"이라는 구체적 수치를 제시했다.
국제기구들의 지지도 적극 활용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 등이 모두 브렉시트의 경제적 위험을 경고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4월 영국을 방문해 EU 잔류를 공개 지지했다. 그는 영국이 EU를 떠나면 미영 무역협정 협상에서 "대기열 뒤쪽"에 서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은행 총재 마크 카니도 브렉시트의 금융 안정성 위험을 지속적으로 경고했다. 파운드화 가치 하락, 인플레이션 상승, 금리 인상 등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경제적 불확실성을 강조했다.
기업들의 목소리도 잔류 진영에 힘을 실어주었다. FTSE 100 기업 CEO들의 공개서한, 골드만삭스의 일자리 이전 경고, 포드와 에어버스의 투자 중단 위협 등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금융 서비스업계는 EU 단일 시장 접근권 상실을 우려하며 강력히 잔류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 피어(Project Fear)' 전략은 역효과도 낳았다. 일반 유권자들에게는 엘리트들의 위협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전문가들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같은 사람들이 또다시 경제적 재앙을 경고하는 것에 대한 피로감이 있었다.
주권과 이민에 집중한 탈퇴 진영
탈퇴 진영은 주권 회복과 이민 통제라는 두 가지 핵심 메시지에 집중했다. "Take Back Control(통제권을 되찾자)"이라는 슬로건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는 정치적 통제, 경제적 통제, 국경 통제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서 폭넓은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민 문제는 특히 강력한 이슈였다. 2015년 순이민자 수가 33만 명을 기록하면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캐머런이 연간 10만 명 이하로 줄이겠다고 공약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자, 유권자들의 불신이 컸다. 탈퇴 진영은 EU 회원국인 한 이민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2015년 유럽 난민 사태는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난민 100만 명 수용을 선언하면서, 영국 내에서는 EU의 이민 정책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비록 영국은 솅겐 조약에 가입하지 않아서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이었지만, 장기적으로 이들이 EU 시민권을 취득하면 영국으로 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경제적 논리에서도 탈퇴 진영은 나름의 논리를 개발했다. "주당 3억 5천만 파운드를 EU에 보내고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었다. 이는 버스 광고에도 등장해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비록 이 수치가 부정확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단순하고 강력한 메시지로서 효과를 발휘했다.
글로벌화에 대한 불만도 탈퇴 진영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제조업 쇠퇴, 일자리 해외 이전, 임금 정체 등의 문제가 모두 EU와 연결되어 인식되었다. 비록 이런 문제들이 EU보다는 기술 발전과 세계화의 결과였지만, 유권자들에게는 EU가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보였다.
조 콕스 의원 피살 사건
6월 16일, 노동당의 조 콕스 의원이 극우 테러리스트에게 피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콕스는 EU 잔류를 지지하는 젊은 의원으로, 난민과 이민자 인권 보호에 앞장서왔다. 범인은 "Britain First"라고 외치며 총격을 가했는데, 이는 극우 단체의 구호였다.
이 사건은 캠페인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꿨다. 양측 모두 일시적으로 선거 운동을 중단했고, 증오와 분열의 정치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특히 이민 문제를 둘러싼 과격한 수사들이 비판받았다. 나이젤 패라지가 공개한 "Breaking Point" 포스터는 난민들의 행렬을 보여주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
여론조사에서는 잔류 진영이 일시적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조 콕스 사건이 온건한 유권자들로 하여금 극단적 정치의 위험성을 인식하게 만들었고, 이는 잔류 진영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투표 전날까지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는 잔류가 근소하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사건의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이미 투표 의향을 정한 유권자들이 대부분이었고, 근본적인 이슈들에 대한 입장이 바뀌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반발도 있었다.
2016년 6월 23일, 운명의 날
투표일 아침 날씨는 전국적으로 흐리고 비가 내렸다. 일반적으로 궂은 날씨는 투표율을 떨어뜨리고, 이는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잔류 진영에 불리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투표율은 72.2%로 매우 높았다. 이는 1992년 총선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다.
지역별 투표 성향은 뚜렷하게 갈렸다. 런던에서는 잔류가 59.9%로 승리했고, 스코틀랜드는 62.0%, 북아일랜드는 55.8%가 잔류를 지지했다. 반면 잉글랜드 대부분 지역에서는 탈퇴가 우세했다. 특히 북동부 지역인 선덜랜드에서는 탈퇴가 61.3%를 기록했다.
연령대별로도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18-24세는 73%가 잔류를 지지한 반면, 65세 이상은 60%가 탈퇴를 선택했다. 교육 수준별로도 대학 졸업자는 68%가 잔류, 중등교육 이하는 70%가 탈퇴를 지지했다. 이는 영국 사회의 깊은 분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오후 10시 투표가 마감되고 개표가 시작되었다. 초기 예상과 달리 탈퇴 진영이 선전하고 있다는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덜랜드의 압도적 탈퇴 승리, 뉴캐슬의 예상보다 낮은 잔류 득표율 등이 이를 보여주었다.
새벽 4시 40분, 최종 결과가 발표되었다. 탈퇴 51.89%, 잔류 48.11%로 탈퇴가 승리했다. 총 투표수는 3,354만 표였고, 탈퇴가 127만 표 차이로 앞섰다. 이는 영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정 중 하나였다.
정치적 지진과 캐머런의 사임
결과 발표 직후 정치적 지진이 일어났다. 새벽 6시, 데이비드 캐머런은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사임 의사를 발표했다. 그는 "나는 이 나라를 이끌어왔지만, 이제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6년간의 총리직을 그렇게 마감했다.
금융 시장은 즉각 폭락했다. 파운드화는 1985년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고, FTSE 100 지수도 8% 하락했다. 유럽 증시도 동반 하락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2조 달러의 시가총액이 사라졌다. 영국은행은 긴급 성명을 통해 금융 안정성을 보장하겠다고 발표했다.
보수당 내부는 혼란에 빠졌다. 탈퇴 진영의 핵심 인물이었던 보리스 존슨이 후임 당수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지만, 마이클 고브가 돌연 출마를 선언하면서 존슨을 배신했다. 결국 존슨은 출마를 포기했고, 테레사 메이가 새로운 당수가 되었다.
노동당도 위기에 빠졌다. 제레미 코빈 당수가 잔류 캠페인을 소극적으로 했다는 비판이 일면서, 172명의 의원이 불신임 투표를 했다. 하지만 코빈은 당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는 노동당 내부의 깊은 분열을 보여주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독립 논의가 다시 부상했다. 니콜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총리는 스코틀랜드가 EU에 남을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발표했다. 스코틀랜드는 모든 지역에서 잔류가 우세했기 때문에, 영국 전체의 결정에 따라 EU를 떠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테레사 메이의 등장과 브렉시트 전략
2016년 7월 13일, 테레사 메이가 새로운 총리로 취임했다. 그녀는 원래 잔류 진영이었지만 소극적이었고,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를 존중하겠다고 선언했다. "브렉시트 민스 브렉시트(Brexit means Brexit)"라는 그녀의 유명한 발언은 탈퇴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메이는 브렉시트 전담 부처인 '브렉시트부'를 신설하고 데이비드 데이비스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보리스 존슨을 외무장관으로 기용하면서 탈퇴 진영을 포용하려 했다. 리엄 폭스는 국제무역부 장관이 되어 새로운 무역 관계 구축을 담당했다.
초기에 메이는 '하드 브렉시트' 노선을 택했다. EU 단일 시장과 관세 동맹에서 완전히 탈퇴하고, 대신 새로운 무역 협정을 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민 통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이었다. 2017년 1월 랭커스터 하우스 연설에서 그녀는 12개 목표를 제시하며 브렉시트 방향을 구체화했다.
하지만 메이의 브렉시트 전략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직면했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반발, 의회의 견제, EU의 강경한 태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2017년 대법원 판결로 의회의 승인 없이는 리스본 조약 50조를 발동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나오면서 정치적 부담이 가중되었다.
리스본 조약 50조 발동
2017년 3월 29일, 메이 총리는 정식으로 리스본 조약 50조를 발동했다. 이는 EU 탈퇴 절차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2년간의 협상 기간이 시작되었다. 도널드 터스크 유럽이사회 상임의장에게 전달된 탈퇴 통고서는 6쪽 분량으로, 영국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EU 측의 반응은 냉담했다. 도널드 터스크는 "우리는 이별 파티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27개 회원국이 단결하여 협상에 임하겠다고 강조했다. 미셸 바르니에가 EU 수석 협상대표로 임명되어 영국과의 협상을 주도하게 되었다.
EU는 협상 우선순위를 명확히 했다. 첫째, 재정 청산(이혼 비용), 둘째, EU 시민권 보장, 셋째, 아일랜드 국경 문제 해결이었다.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미래 관계 논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영국이 원하는 무역 관계 우선 논의와는 정반대였다.
50조 발동과 함께 영국 내부의 논쟁도 격화되었다. 스코틀랜드는 독립 국민투표 재실시를 요구했고, 북아일랜드의 신페인당은 아일랜드 통일 국민투표를 주장했다. 이는 영국의 국가적 통합을 위협하는 요소들이었다.
2017년 조기 총선과 메이의 오판
2017년 4월 18일, 테레사 메이는 전격적으로 조기 총선을 발표했다. 고정임기법에 따라 하원의 3분의 2 동의가 필요했지만, 야당들도 선거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통과되었다. 메이는 브렉시트 협상을 위한 강력한 권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에 20% 포인트 앞서고 있었다. 메이는 압도적 승리를 통해 브렉시트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또한 당내 친EU 의원들과 야당의 견제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6월 8일 총선에서 보수당은 의석을 오히려 잃었다. 과반(326석)에 8석이 부족한 318석만 얻으면서 소수 정부가 되었다. 반면 제레미 코빈이 이끄는 노동당은 30석을 늘려 262석을 확보했다.
메이는 북아일랜드의 민주연합당(DUP) 10석과 연정을 구성해서 겨우 정권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는 브렉시트 협상에서 메이의 협상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강력한 권한을 얻기 위해 실시한 선거에서 오히려 권한이 줄어든 것이었다.
선거 패배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메이의 소통 부족과 딱딱한 이미지, 사회보장 개혁 공약의 실패, 젊은 층의 노동당 지지 확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치매세'라고 불린 사회보장 개혁안은 고령층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브렉시트 협상의 난항
2017년 6월부터 본격적인 브렉시트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양측의 입장 차이가 컸다. EU는 탈퇴 조건을 먼저 정리한 후 미래 관계를 논의하자는 입장이었고, 영국은 두 가지를 병행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이혼 비용'이었다. EU는 영국이 기존 약속한 예산 기여분과 연금 부담분 등을 포함해 약 600억 유로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국은 법적 의무가 없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데이비드 데이비스 브렉시트 장관은 "1페니도 지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EU 시민권 문제도 복잡했다. 영국에 거주하는 300만 명의 EU 시민과 EU에 거주하는 100만 명의 영국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메이 정부는 '정착 지위(settled status)'라는 새로운 제도를 제안했지만, EU는 기존 권리의 완전한 보장을 요구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아일랜드 국경이었다. 1998년 성금요일 협정 이후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 사이에는 국경 검문소가 없었다. 하지만 브렉시트로 영국이 관세동맹을 떠나면 물리적 국경이 필요할 수 있었다. 이는 평화 과정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문제였다.
체커스 계획과 당내 반발
2018년 7월, 메이는 체커스에서 내각 회의를 열고 새로운 브렉시트 계획을 발표했다. 핵심은 상품에 대해서는 EU 규정을 따르고 관세동맹과 유사한 체제를 유지하되, 서비스업에서는 독립성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면서도 주권을 회복하려는 절충안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즉시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데이비드 데이비스 브렉시트 장관과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이 이틀 사이에 연이어 사임했다. 이들은 체커스 계획이 브렉시트 정신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특히 존슨은 "자살 조끼를 입고 폭탄을 터뜨리는 격"이라고 혹평했다.
EU 측의 반응도 냉담했다. 미셸 바르니에는 "상품과 서비스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계획의 핵심을 거부했다. EU는 단일시장의 네 가지 자유(상품, 서비스, 자본, 인력)를 모두 받아들이거나 모두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당내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2018년 11월, 48명의 보수당 의원이 메이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요구했다. 12월 12일 실시된 당내 불신임 투표에서 메이는 200 대 117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117명이 반대표를 던진 것은 치명적 타격이었다.
탈퇴 협정 도출과 의회의 거부
2018년 11월 25일, EU 정상회의에서 마침내 탈퇴 협정이 승인되었다. 585쪽 분량의 협정은 이혼 비용 390억 파운드 지불, EU 시민권 보장, 아일랜드 백스톱(backstop) 조항 등을 담고 있었다. 특히 백스톱은 다른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북아일랜드가 EU 관세동맹에 사실상 잔류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영국 의회는 이 협정을 세 번이나 거부했다. 2019년 1월 15일 첫 번째 표결에서는 432 대 202로 역사적인 참패를 당했다. 230표 차이는 영국 의회 역사상 정부가 당한 최대 패배였다. 3월 12일 두 번째 표결에서도 391 대 242로, 3월 29일 세 번째 표결에서도 344 대 286으로 연이어 부결되었다.
반대 이유는 다양했다. 브렉시트 강경파들은 백스톱 조항이 영국을 EU에 영원히 묶어둘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잔류파들은 경제적 타격이 너무 크고, 차라리 국민투표를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당은 정부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반대표를 던졌다.
의회의 연이은 거부로 정치적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원래 탈퇴일이었던 2019년 3월 29일이 지나면서 EU는 두 차례 연장을 승인했다. 마지막 연장 기한은 10월 31일로 정해졌다.
메이의 사임과 존슨의 등장
2019년 5월 24일, 테레사 메이는 마침내 사임을 발표했다.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 나라에 봉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브렉시트를 성사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후임 당수 선거에서는 보리스 존슨이 압승했다. 그는 "10월 31일까지 합의든 무협정이든 반드시 브렉시트를 완료하겠다"고 약속했다. "Do or Die"라는 그의 슬로건은 브렉시트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존슨은 7월 24일 총리로 취임하면서 즉시 강경 노선을 취했다. 그는 백스톱 조항의 완전한 삭제를 요구했고, 무협정 브렉시트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의회를 5주간 정회시켜서 브렉시트 반대파들의 저항을 무력화하려 했다.
하지만 존슨도 의회의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9월, 야당과 보수당 반란 의원들이 연합해서 무협정 브렉시트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10월 31일까지 협정이 체결되지 않으면 총리가 EU에 연장을 요청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협정과 조기 총선
2019년 10월, 존슨은 놀랍게도 EU와 새로운 합의에 도달했다. 핵심은 아일랜드 백스톱을 '북아일랜드 프로토콜'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북아일랜드는 영국 관세 영역에 남되, 일부 EU 규정을 따르고 아일랜드 공화국과의 국경은 열어두는 복잡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의회는 또다시 협정을 거부했다. 존슨은 조기 총선을 요구했고, 결국 12월 12일 총선이 실시되었다. 존슨은 "Get Brexit Done(브렉시트를 끝내자)"라는 간단한 슬로건으로 선거를 치렀다.
총선 결과는 보수당의 압승이었다. 365석을 얻어 80석의 안정적인 다수당이 되었다. 노동당은 203석으로 참패했고, 코빈은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특히 북부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노동당 텃밭들이 보수당으로 넘어가면서 '레드 월(Red Wall)'의 붕괴라고 불렸다.
브렉시트 완료와 새로운 시작
2020년 1월 23일, 하원은 마침내 탈퇴 협정을 330 대 231로 승인했다. 1월 29일 유럽의회도 621 대 49로 승인하면서 모든 절차가 완료되었다. 2020년 1월 31일 오후 11시(GMT), 영국은 공식적으로 EU를 떠났다.
47년간의 유럽 통합 여정이 끝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다우닝가 10번지에는 유니언잭이 게양되었고, 의회 광장에서는 브렉시트 지지자들이 축제를 벌였다. 존슨은 "새로운 영국의 새벽"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탈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2020년 12월 31일까지 전환 기간이 설정되어, 이 기간 동안 미래 관계를 협상해야 했다. 무역, 어업, 안보 협력 등 수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경제적 영향과 사회적 분열
브렉시트 과정에서 영국 경제는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2016년 국민투표 직후부터 파운드화가 약세를 보였고, 투자도 위축되었다. 특히 자동차와 금융 서비스업에서 일자리 이전이 가시화되었다. 영국은행은 브렉시트로 인한 경제 성장률 하락을 지속적으로 경고했다.
부동산 시장도 불안정했다. 런던의 고급 주택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외국인 투자도 줄어들었다. 반면 북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영향이 적었는데, 이는 지역별 경제 구조의 차이 때문이었다.
사회적 분열도 심화되었다. 브렉시트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넘어서 세대, 계층, 지역 간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레머너(Remainer)'와 '브렉시티어(Brexiteer)'라는 용어가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이 되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좌절감이 컸다. 자신들의 미래가 고령 세대의 결정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인식이 강했다. 일부에서는 '제론토크라시(gerontocracy, 노인 지배)'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영연방과 글로벌 브리튼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글로벌 브리튼(Global Britain)' 전략을 추진했다. EU에 의존하던 무역 관계를 다변화하고, 영연방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의 '틸트(pivot)'가 강조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호주, 뉴질랜드 등과의 무역협정은 체결했지만, 경제적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무엇보다 지리적 거리와 기존 무역 관계를 단시간에 바꾸기는 어려웠다. EU는 여전히 영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였다.
미국과의 관계도 복잡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브렉시트를 지지했지만, 구체적인 무역협정 체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이든 행정부는 브렉시트에 회의적이었고, 특히 북아일랜드 문제에서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영향으로 영국에 압력을 가했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문제
브렉시트는 영국의 국가적 통합에도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독립 여론이 다시 고조되었다. 니콜라 스터전 총리는 브렉시트가 스코틀랜드 민의에 반한다며 독립 국민투표 재실시를 요구했다.
2021년 5월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이 압승하면서 독립 압력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존슨 정부는 국민투표 승인을 거부했고, 이는 헌법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북아일랜드에서는 북아일랜드 프로토콜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었다. 연합주의자들은 북아일랜드가 영국 본토와 다른 대우를 받는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2022년에는 민주연합당이 자치 정부 참여를 거부하면서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다.
아일랜드 통일 논의도 다시 부상했다. 신페인당은 아일랜드 통일 국민투표를 요구했고,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통일 지지가 50%에 근접하는 결과도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복잡한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코로나19와 브렉시트의 중첩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브렉시트 전환 기간과 겹치면서 복잡한 상황을 만들었다. 봉쇄 조치로 경제가 위축된 상황에서 브렉시트의 추가적 충격이 우려되었다. 하지만 팬데믹이 모든 관심을 빨아들이면서 브렉시트 이슈는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멀어졌다.
백신 조달에서는 오히려 브렉시트가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영국이 EU의 공동 조달 방식보다 빠르게 독자적으로 백신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 현상이었고, 장기적으로는 EU와의 과학 협력 단절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공급망 문제도 심각했다. 브렉시트로 인한 통관 절차 복잡화와 팬데믹으로 인한 물류 대란이 겹치면서 상품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2021년 여름 주유소에서 연료 부족 사태가 발생하면서 브렉시트의 부작용이 가시화되었다.
결론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단순한 정치적 선택을 넘어서 영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51.9%라는 근소한 차이로 내려진 결정이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거대한 변화를 촉발했다.
정치적으로는 기존 정당 체계가 재편되었다. 보수당은 브렉시트 정당으로 변모했고, 노동당은 정체성 위기를 겪었다. 캐머런, 메이로 이어지는 총리들의 연이은 실패는 브렉시트 문제의 복잡성을 보여주었다. 결국 존슨이 등장해서야 브렉시트가 완료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단기적 충격과 장기적 구조 변화가 동시에 나타났다. 파운드화 약세, 투자 위축, 무역 패턴 변화 등이 가시화되었다. 하지만 '글로벌 브리튼' 전략의 성과는 아직 불분명하다. EU와의 관계 재정립과 새로운 무역 파트너 발굴이 지속적인 과제로 남아 있다.
사회적으로는 깊은 분열이 드러났다. 세대, 계층, 지역, 교육 수준에 따른 견해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고, 이는 영국 사회의 통합에 장기적 도전이 되고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문제는 영국의 국가적 통합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브렉시트는 또한 민주주의의 복잡성을 보여주었다. 국민투표라는 직접 민주주의와 의회 민주주의 간의 긴장, 복잡한 국제 관계를 단순한 선택지로 압축하는 것의 한계, 정치적 리더십의 중요성 등이 부각되었다.
47년간의 유럽 통합 여정을 마감한 영국은 이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브렉시트가 진정한 성공이 될지, 아니면 역사적 실수로 기록될지는 앞으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2016년 6월 23일의 결정이 영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History > Europ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탈리아 역사 1. 선사시대 이탈리아 - 리구리아 해안의 구석기 동굴벽화부터 알타 밀라노 농경정착까지 (0) | 2025.05.26 |
---|---|
영국 역사 70. 코로나19·윈저 협약 이후의 영국 - 전염병 대응·북아일랜드 무역 조정·왕위 승계가 새로운 과제가 된 변화의 시대 (3) | 2025.05.24 |
영국 역사 68. 뉴레이버·블레어와 '제3의 길' - 복지 지출을 유지하면서도 시장 친화 정책을 병행한 신중도 정치 (3) | 2025.05.24 |
영국 역사 67. 대처리즘과 신자유주의 전환 - 공기업 민영화와 노조 규제로 금융 산업을 부양한 철의 여인 (3) | 2025.05.24 |
영국 역사 66. EU 가입(1973)과 경제 재조정 - 제조업 침체 속 유럽 통합의 길을 택한 영국 (0) | 2025.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