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66. EU 가입(1973)과 경제 재조정 - 제조업 침체 속 유럽 통합의 길을 택한 영국

SSSCH 2025. 5. 24.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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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영국의 경제적 딜레마

1960년대 말, 영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한때 세계의 공장이라 불렸던 제조업은 독일과 일본의 급속한 성장 앞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특히 자동차, 철강, 조선업 같은 전통적인 핵심 산업들이 연이어 타격을 받으면서 실업률이 치솟았고, 파운드화의 가치도 불안정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제국의 영광은 이미 과거가 되었고,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냉전 체제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 성장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는데, 그 답이 바로 유럽 통합이었다.

두 번의 거부와 세 번째 도전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시도는 순탄하지 않았다. 1961년 해롤드 맥밀런 총리가 처음 가입을 신청했을 때,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이 강력히 반대했다. 드골은 영국이 미국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럽의 결속을 해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영국이 농업 정책에서 유럽 대륙 국가들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1967년 해롤드 윌슨 노동당 정부가 두 번째 가입 신청을 했지만, 여전히 드골의 반대에 부딪혔다. 드골은 영국의 경제 상황이 불안정하고, 파운드화 평가절하 등으로 유럽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이유만이 아니라, 프랑스가 유럽 통합 과정에서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계산이기도 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69년 드골이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면서부터다. 새로운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는 영국의 가입에 좀 더 유연한 입장을 보였다. 동시에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도 유럽 통합 확대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분위기 변화 속에서 에드워드 히스 보수당 정부가 1970년 집권한 후 세 번째 가입 신청을 하게 된다.

히스 정부의 유럽 정책

에드워드 히스는 확고한 친유럽주의자였다. 그는 영국의 미래가 유럽 통합에 있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정치적 비용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히스는 개인적으로도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능통했고, 유럽 대륙의 정치인들과 깊은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1971년부터 본격적인 가입 협상이 시작되었다. 가장 큰 쟁점은 역시 농업 정책이었다. 유럽의 공동농업정책(CAP)은 농산물 가격을 높게 유지하는 보호주의적 성격이 강했는데, 이는 식품 수입에 크게 의존하던 영국에게는 부담이었다. 또한 영국이 EEC 예산에 기여해야 하는 분담금 문제도 복잡했다.

히스 정부는 이런 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가입의 장기적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6천만 명의 영국 인구가 2억 명이 넘는 유럽 공동 시장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규모의 경제를 통해 제조업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내 정치적 갈등과 논쟁

EEC 가입 문제는 영국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보수당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는데, 전통적인 제국주의자들과 영연방 지지자들은 유럽 통합보다는 기존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특히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같은 영연방 국가들과의 경제적 유대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노동당의 입장은 더욱 복잡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노동당은 히스 정부의 가입 조건이 영국에게 불리하다고 비판했다. 특히 노동조합들은 유럽 통합이 영국 노동자들의 권익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노동당 내에서도 로이 젠킨스 같은 친유럽파들이 있어서 당론 결정이 쉽지 않았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1971년 10월 하원에서 열린 가입 승인 투표였다. 히스 정부는 330석 중 279석을 확보했는데, 이는 노동당 의원 69명이 당론을 어기고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보수당 의원 39명은 반대표를 던져서, 정당 경계를 넘나드는 복잡한 정치적 역학을 보여주었다.

1973년 1월 1일, 역사적 순간

1973년 1월 1일, 영국은 덴마크, 아일랜드와 함께 유럽경제공동체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이는 영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수백 년간 유럽 대륙과는 거리를 두면서 '광명한 고립'을 추구했던 영국이, 마침내 유럽 통합의 일원이 된 것이다.

가입 첫날 런던의 분위기는 복잡했다. 일부에서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영국의 정체성이 흔들릴 것에 대한 우려도 컸다. 특히 파운드화 대신 유럽 공동 화폐를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나, 영국의 법체계가 유럽법의 영향을 받게 될 점 등이 논란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유럽 대륙으로의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독일과 프랑스 기업들의 영국 투자도 증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인한 생활비 부담도 커졌다.

경제 재조정의 시작

EEC 가입 이후 영국 경제는 점진적이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무역 패턴의 전환이었다. 전통적으로 영연방 국가들과의 교역 비중이 높았던 영국이, 점차 유럽 대륙 국가들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제조업 부문에서는 구조조정이 가속화되었다. 경쟁력을 잃은 전통 산업들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반대로 기술 집약적인 산업들은 유럽 시장 접근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특히 화학, 전자, 항공 산업 등에서 유럽 기업들과의 협력이 늘어났다.

농업 분야는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공동농업정책 하에서 영국 농민들은 높은 가격 보장을 받게 되었지만, 동시에 유럽 전체의 농업 정책에 맞춰야 하는 제약도 생겼다. 이는 영국 농업의 현대화와 효율성 향상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 여파와 사회 변화

EEC 가입은 영국 정치 지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74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해롤드 윌슨이 다시 총리가 되었는데, 그는 선거 공약으로 EEC 가입 조건을 재협상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당내 반유럽파들의 압력 때문이었다.

윌슨 정부는 실제로 1974년부터 재협상을 진행했고, 1975년 6월에는 영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적인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 67.2%가 EEC 잔류에 찬성했는데, 이는 예상보다 큰 차이였다. 국민투표 과정에서 영국 사회는 유럽 통합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기회를 가졌다.

사회 문화적으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유럽 대륙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영국인들의 여행 패턴도 바뀌었다. 프랑스나 독일로의 여행이 더 쉬워졌고, 유럽 대륙의 문화와 생활 방식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특히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유럽인'이라는 정체성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경제 정책의 전환점

1970년대 중반 이후 영국은 석유 파동과 인플레이션으로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EEC 회원국 지위는 중요한 완충 역할을 했다. 유럽 공동체의 지원을 받아 경제 안정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고, 특히 지역 개발 기금을 통해 낙후 지역의 산업 재편을 도모할 수 있었다.

영국 정부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산업 정책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을 모색했고, 특히 금융 서비스업의 육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런던의 시티가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EEC 가입이 제공한 기회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기술 개발 분야에서도 유럽 협력이 활발해졌다. 항공 산업에서 에어버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이나, 핵에너지 개발에서 유라톰과의 협력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협력을 통해 영국은 개별 국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규모 기술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지역별 영향과 격차

EEC 가입의 영향은 영국 내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났다. 런던과 남동부 지역은 유럽 대륙과의 교역 증가와 금융업 발달로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반면 스코틀랜드의 전통 제조업 지역이나 웨일스의 탄광 지역은 구조조정의 어려움을 겪었다.

북아일랜드의 경우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EEC 가입을 통해 아일랜드 공화국과 같은 공동체 회원이 되면서, 경제적 통합이 정치적 갈등 완화에 일부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실제로 1970년대 후반부터 EU의 평화 기금을 통한 지원이 북아일랜드 평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북해 유전 개발과 맞물려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석유 수입으로 얻은 경제적 여유가 EEC 가입 비용을 상쇄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동시에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은 독립 후에도 EEC 회원국으로 남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농업과 어업 정책의 변화

공동농업정책(CAP)은 영국 농업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높은 보장 가격 덕분에 농가 소득은 안정되었지만, 동시에 과잉 생산 문제도 발생했다. 영국 농민들은 유럽 대륙의 대규모 농장들과 경쟁해야 했고, 이는 농업의 현대화와 효율성 증대를 촉진했다.

어업 부문에서는 공동어업정책이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풍부한 어장을 보유했던 영국이 다른 EEC 회원국들과 어업 자원을 공유해야 하게 되면서, 특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의 어민들이 강한 반발을 보였다. 이는 훗날 브렉시트 논쟁에서도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농업 생산성은 크게 향상되었다. 유럽 공동체의 기술 지원과 투자로 영국 농업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농기계 현대화와 품종 개량 등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노동 시장과 사회 정책

EEC 가입은 영국의 노동 시장에도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 내 노동력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영국으로 오는 유럽 대륙 출신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영국인들도 다른 유럽 국가에서 일할 기회가 많아졌다.

사회 정책 분야에서는 유럽 사회 기금을 통한 지원이 시작되었다. 특히 직업 훈련과 재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이 늘어나면서, 산업 구조 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또한 남녀 평등 정책에서도 유럽 공동체의 기준을 따라가면서 영국 사회의 변화가 촉진되었다.

노동조합들의 입장은 복잡했다. 초기에는 유럽 통합이 노동자들의 권익을 해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점차 유럽 차원의 노동자 연대 가능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다국적 기업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나드는 노동조합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졌다.

문화와 교육의 교류 확대

EEC 가입은 문화와 교육 분야에서도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 유럽 대학 간 교환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영국 학생들이 유럽 대륙에서 공부할 기회가 많아졌다. 또한 연구 협력도 활발해져서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언어 교육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교육이 더 중요해졌고, 영국 학교에서 유럽 언어 교육이 강화되었다. 이는 영국인들의 국제적 감각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술과 문화 분야에서는 유럽 문화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졌다. 연극, 음악, 미술 등에서 유럽 각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영국 문화의 다양성이 더욱 풍부해졌다.

결론

1973년 영국의 EEC 가입은 단순한 경제적 선택을 넘어서 영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제조업 침체라는 위기 상황에서 영국은 과감하게 유럽 통합의 길을 선택했고, 이는 장기적으로 영국 경제와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가입 초기의 경제적 부담과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유럽 공동 시장 접근을 통한 경제 재조정은 영국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 구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유럽 통합이 제공한 기회들을 잘 활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영국의 정체성과 주권에 대한 고민들이 계속 제기되었고, 이는 훗날 브렉시트로 이어지는 복잡한 정치적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73년의 선택은 당시 영국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필요한 결정이었다.

영국의 EEC 가입은 유럽 통합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국의 참여로 유럽 공동체는 더욱 강력하고 포괄적인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이는 오늘날 유럽연합의 토대가 되었다. 비록 영국이 2020년 EU를 떠났지만, 1973년부터 시작된 47년간의 유럽 통합 경험은 영국과 유럽 모두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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