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영국의 정치적 변화
1990년 마가렛 대처가 물러난 후 존 메이저가 총리가 되었지만, 보수당은 점차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1992년 9월 '검은 수요일' 사태로 파운드화가 유럽환율메커니즘(ERM)에서 탈퇴하면서 보수당의 경제 정책 신뢰도가 크게 추락했다. 또한 당내 유럽 통합 문제를 둘러싼 분열도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당은 1994년 젊은 지도자 토니 블레어를 당수로 선출했다. 43세의 블레어는 노동당 역사상 가장 젊은 당수였고, 기존의 좌파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한 새로운 정치인이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변호사로, 중산층적 배경과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다.
블레어의 등장은 노동당 내부에서도 큰 변화를 의미했다. 1983년과 1987년 총선에서 연이어 패배한 노동당은 이미 닐 키녹과 존 스미스 시대를 거치며 현대화 작업을 시작했지만, 블레어는 이를 훨씬 더 급진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노동당이 완전히 새로운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확신했다.
블레어 주변에는 고든 브라운, 피터 맨델슨, 앨러스테어 캠벨 등 젊고 재능 있는 정치인들과 언론 전문가들이 모였다. 이들은 현대적인 정치 마케팅 기법을 도입하고, 미디어 전략을 체계적으로 수립했다. 특히 언론과의 관계 관리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스핀 닥터'라는 새로운 용어까지 등장시켰다.
당헌 4조 폐지와 뉴레이버의 탄생
블레어가 당수가 된 후 첫 번째 과제는 노동당의 이념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1995년 4월, 그는 당헌 4조 개정을 제안했다. 당헌 4조는 "생산, 유통, 교환 수단의 공동 소유"를 추구한다는 내용으로, 1918년부터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핵심 조항이었다.
이 제안은 당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인 좌파들은 노동당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특히 아서 스카길 같은 노조 지도자들과 토니 벤 같은 좌파 정치인들은 블레어의 변화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블레어는 끈질기게 설득 작업을 벌였다.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당원들과 직접 만나 자신의 비전을 설명했다. 사회주의적 이상은 유지하되, 방법론에서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결국 1995년 4월 특별 당대회에서 새로운 당헌이 65%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새로운 당헌 4조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역동적인 경제, 강한 공동체 속에서 권리와 의무가 함께 가는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전통적인 계급투쟁론에서 벗어나 모든 계층을 포괄하는 중도적 메시지였다.
이때부터 노동당은 공식적으로 '뉴레이버(New Labour)'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의 선언이었다. 블레어는 뉴레이버를 "아스피레이션과 동정심이 결합된 정당"이라고 정의했다.
제3의 길 이론과 철학
블레어의 정치철학은 '제3의 길(Third Way)'로 요약된다. 이는 전통적인 좌파의 국가 주도 경제와 우파의 자유방임주의 사이의 중간 지점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블레어는 앤서니 기든스 런던정치경제대학 교수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이론적 틀을 다듬어 나갔다.
제3의 길의 핵심은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정의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었다.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인정하면서도, 정부가 교육, 보건, 사회보장 등 핵심 영역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시장이 할 수 있는 것은 시장에,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정부에"라는 실용주의적 접근법이었다.
특히 교육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졌다. 블레어는 "교육, 교육, 교육"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1세기 지식 기반 경제에서 교육이야말로 최고의 복지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개인의 능력 개발을 통해 사회 이동성을 높이고, 동시에 국가 경쟁력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비전이었다.
제3의 길은 또한 '책임 있는 개인주의'를 강조했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되, 동시에 사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권리와 함께 책임을"이라는 슬로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철학은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등과 함께 블레어는 1990년대 중도좌파 정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정책을 논의했고, '제3의 길 국제회의'도 개최했다.
1997년 총선 대승과 집권
1997년 5월 1일 총선에서 뉴레이버는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418석을 얻어 179석의 압도적인 다수당이 되었고, 보수당은 165석으로 참패했다. 이는 1945년 애틀리 정부 이후 노동당 최대의 승리였고, 보수당으로서는 1906년 이후 최악의 패배였다.
선거 승리의 요인은 복합적이었다. 우선 18년간 지속된 보수당 정부에 대한 피로감이 컸다. '검은 수요일' 이후 경제 정책에 대한 불신, 유럽 문제를 둘러싼 당내 분열, 각종 부패 스캔들 등이 보수당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동시에 뉴레이버의 변화도 유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줬다. 블레어는 젊고 활기찬 이미지로 변화에 대한 열망을 상징했다. 또한 경제 정책에서 보수당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공공 서비스 개선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했다.
선거 캠페인도 매우 전문적이었다. 피터 맨델슨과 앨러스테어 캠벨이 주도한 미디어 전략은 매일매일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했다. "Things Can Only Get Better"라는 캠페인 송은 낙관적인 분위기를 조성했고, "Education, Education, Education" 같은 간결한 슬로건은 정책 우선순위를 명확히 했다.
5월 2일 새벽, 블레어는 다우닝가 10번지에 입주하면서 "새로운 새벽이 밝았다"고 선언했다. 43세의 그는 19세기 얼 오브 리버풀 이후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취임 연설에서 그는 "하나의 국민, 하나의 영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경제 정책: 신중함과 혁신의 조화
집권 초기 블레어 정부의 경제 정책은 매우 신중했다.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은 보수당 정부가 설정한 지출 한도를 2년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뉴레이버가 재정 책임감 있는 정당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동시에 브라운은 통화 정책에서 중요한 혁신을 도입했다. 1997년 5월, 집권 불과 며칠 만에 그는 영국은행에 금리 결정권을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정치적 고려로부터 독립된 통화 정책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려는 조치였다.
영국은행의 독립성 부여는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금융 시장의 신뢰도가 높아졌고, 장기 금리도 안정되었다. 이는 뉴레이버가 경제 정책에서 전문성과 독립성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치였다.
세제 정책에서는 '은밀한 재분배'가 특징이었다. 소득세나 법인세 같은 눈에 띄는 세금은 인상하지 않으면서도, 세액공제와 각종 수당을 통해 저소득층 지원을 늘렸다. 특히 아동세액공제와 근로세액공제는 일하는 가정의 소득을 실질적으로 향상시켰다.
최저임금제 도입도 중요한 정책이었다. 1999년 4월부터 시간당 3.60파운드의 최저임금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보수당이 그동안 강력히 반대해왔던 정책이었다. 경제계의 우려와 달리 최저임금 도입은 고용에 큰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도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활 개선에 기여했다.
공공 서비스 개혁과 투자 확대
1999년부터 뉴레이버는 본격적인 공공 서비스 투자에 나섰다. 보건, 교육, 교통 등 핵심 분야에 대한 지출을 대폭 늘렸다. 특히 국민보건서비스(NHS)에 대한 투자는 전례 없는 규모였다. 1997년 GDP의 6.8%였던 보건 지출이 2007년에는 9.4%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단순한 예산 증액에 그치지 않고 성과 관리를 강화했다. 병원 대기 시간, 학교 시험 성적, 범죄율 등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지 못하는 기관에는 강력한 개입을 했다. 이는 '목표 달성 정부(targets regime)'라고 불렸다.
교육 분야에서는 '교육 액션 존(Education Action Zones)' 같은 혁신적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성과가 부진한 학교들을 집중 지원하고, 민간 부문의 전문성도 활용했다. 또한 대학 진학률을 50%까지 높이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설정했다.
범죄 대책에서는 '터프 온 크라임, 터프 온 더 코즈 오브 크라임(범죄에 강하게, 범죄 원인에도 강하게)'라는 슬로건 하에 강력한 법 집행과 예방 정책을 병행했다. CCTV 확산, 경찰력 증강과 함께 청소년 대상 예방 프로그램도 강화했다.
헌법 개혁과 지방분권
블레어 정부의 또 다른 중요한 성과는 헌법 개혁이었다. 1997년 선거 공약이었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방분권이 신속하게 추진되었다. 같은 해 9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스코틀랜드는 74%가 자치의회 설립에 찬성했고, 웨일스도 50.3%의 근소한 차이로 찬성했다.
1999년 스코틀랜드 의회와 웨일스 의회가 개원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육, 보건, 교통, 사법 등 광범위한 권한을 갖게 되었고, 제한적이지만 세율 조정권도 부여받았다. 웨일스 의회는 권한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지만, 웨일스 고유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평화 과정이 큰 진전을 보였다. 1998년 4월 성금요일 협정(벨파스트 협정)이 체결되면서 30년간 지속된 분쟁이 종료되었다. 이 협정에는 모든 주요 정당들이 참여했고, 남북 아일랜드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런던시장 직선제 도입도 중요한 변화였다. 2000년 첫 런던시장 선거에서 켄 리빙스턴이 당선되면서, 런던은 독자적인 정치적 리더십을 갖게 되었다. 이는 중앙집권적이었던 영국 정치 체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상원 개혁도 시작되었다. 1999년 세습 귀족의 상원 의석 대부분이 폐지되어, 상원의 민주적 정당성이 높아졌다. 비록 완전한 상원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는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사회 정책: 사회적 포용과 기회 균등
뉴레이버의 사회 정책은 '사회적 포용(social inclusion)'과 '기회 균등'을 핵심 가치로 했다. 특히 아동 빈곤 퇴치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블레어는 2020년까지 아동 빈곤을 완전히 근절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정책이 도입되었다. 아동세액공제가 대폭 확대되었고, 슈어스타트(Sure Start) 프로그램을 통해 저소득 가정의 영유아들에게 종합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또한 아동신탁기금을 설립하여 모든 신생아에게 250파운드(저소득 가정은 500파운드)를 지급했다.
근로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근로세액공제가 핵심 정책이었다. 일은 하지만 저임금으로 생활이 어려운 가정에 추가 소득을 지원하는 제도로, 근로 유인을 높이면서도 생활 수준을 개선하는 효과를 거뒀다.
여성 정책에서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출산휴가가 확대되었고, 육아휴직 제도도 도입되었다. 또한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여성 진출이 크게 늘어났다. 블레어 내각에는 역사상 최다인 5명의 여성 장관이 포함되었다.
장애인 권익 신장을 위해서는 1995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을 강화했고, 2005년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을 통해 공공기관의 장애인 배려 의무를 명시했다. 또한 장애인 생활수당도 인상되어 독립적인 생활을 지원했다.
노동 정책과 노사관계
뉴레이버의 노동 정책은 '파트너십'을 강조했다. 대처 시대의 대립적 노사관계를 넘어서 협력적 관계를 구축하려 했지만, 동시에 노조의 과도한 영향력 확대는 경계했다. 이는 미묘한 균형 잡기였다.
최저임금제 도입은 노조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정책이었지만, 그 수준은 상대적으로 온건했다. 또한 파업권에 대해서는 대처 정부가 도입한 제약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했다. 이는 일부 노조 지도자들의 불만을 샀지만, 경제계의 우려는 줄여주었다.
고용 유연성과 보안을 동시에 추구하는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 개념을 도입했다. 기업의 고용 유연성은 인정하되, 실업자에 대한 지원과 재훈련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뉴딜(New Deal) 프로그램을 통해 청년 실업자, 장기 실업자, 편부모 등에게 맞춤형 취업 지원을 제공했다.
근로시간 규제에서는 EU의 근로시간 지침을 수용하면서도 영국의 특수성을 반영했다. 주 48시간 근로시간 상한제를 도입했지만, 개인의 선택에 의한 예외(opt-out)를 허용했다. 이는 EU의 기준을 따르면서도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유지하려는 절충안이었다.
대외 정책: 특별한 관계와 유럽 통합
블레어의 대외 정책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 유지와 유럽 통합 참여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했다. 그는 영국이 대서양의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통해 국제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려 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는 개인적으로도 친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두 사람은 모두 젊은 중도좌파 정치인으로서 정치철학을 공유했고, 정책 조율도 긴밀했다. 특히 코소보 사태 등 국제 위기 상황에서 긴밀한 협력을 보였다.
유럽 통합에 대해서는 보수당보다 훨씬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EU 사회 헌장에 서명하고, 유럽 통화 통합에도 원칙적으로 찬성했다. 하지만 유로화 참여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을 유지했다. 고든 브라운이 제시한 '5가지 경제 테스트'를 통과해야 유로화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1999년 코소보 전쟁에서는 NATO 공습을 적극 지지했고, 지상군 투입도 주장했다. 이는 인도주의적 개입에 대한 블레어의 강한 신념을 보여주었다. 그는 시카고에서 행한 연설에서 국제사회가 인권 유린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2000)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영국군이 직접 개입하여 내전을 종료시키고 민주주의를 복원한 사례로, 블레어의 '윤리적 외교 정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 9월 11일 테러는 블레어의 대외 정책에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블레어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긴밀히 협력하여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참여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견했다.
블레어는 9·11 테러를 "문명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하고, 국제사회가 단결하여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설은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당시 지지율도 크게 상승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은 영국 내부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반테러법이 강화되면서 시민 자유가 제약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또한 무고한 시민들이 테러 혐의로 구금되는 사례들이 발생하면서 인권 단체들의 비판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국내 여론의 지지가 있었다. 탈레반 정권이 알카에다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했고, 여성 인권 탄압 등 인도주의적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회의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2001년과 2005년 총선: 연속 집권
2001년 6월 총선에서 뉴레이버는 다시 압승을 거뒀다. 413석을 얻어 165석의 안정적인 다수당이 되었다. 이는 노동당 최초의 연속 집권이었고, 완전한 임기를 마친 후 재선에 성공한 것도 처음이었다.
2001년 선거의 주요 쟁점은 공공 서비스였다. 보수당의 윌리엄 헤이그 당수는 유럽 통합과 이민 문제를 부각시키려 했지만, 유권자들의 관심은 NHS와 교육에 집중되어 있었다. 뉴레이버는 지난 4년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추가 투자를 약속했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블레어는 시민들과의 직접 대화를 강조했다. 병원과 학교를 방문하고, 일반 시민들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의 소통 능력과 친근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2005년 5월 총선에서는 다소 어려운 상황에서 3선에 성공했다. 356석으로 다수당은 유지했지만, 의석 수는 크게 줄었다. 이때는 이라크 전쟁 논란이 큰 변수였다. 반전 여론이 상당했고, 특히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블레어에 대한 실망이 컸다.
하지만 경제 상황이 양호했고, 보수당의 마이클 하워드 당수도 강력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자유민주당이 반전 입장을 명확히 하면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지만, 소선거구제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이라크 전쟁과 정치적 타격
2003년 이라크 전쟁은 블레어 정치 생애의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대량살상무기 보유 주장을 근거로 시작된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런 무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블레어 정부의 신뢰성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전쟁 개시 전부터 영국 내 반대 여론이 강했다. 2003년 2월 15일 런던에서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 이는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또한 당내에서도 로빈 쿡 외무장관이 사임하는 등 강한 반발이 있었다.
블레어는 사담 후세인 제거가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후세인을 히틀러에 비유하며 유화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또한 중동 민주화를 위해서도 이라크 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후 이라크 상황이 악화되면서 블레어의 판단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자 정보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고, 데이비드 켈리 박사의 자살 사건은 정부에 대한 불신을 더욱 키웠다. 허튼 조사와 버틀러 조사가 실시되었지만, 완전한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제 성과와 한계
블레어 집권 10년(1997-2007) 동안 영국 경제는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보였다. 연평균 2.7%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인플레이션은 2% 내외로 안정되었다. 실업률도 1997년 7%에서 2007년 5% 이하로 떨어졌다.
특히 고든 브라운의 재정 정책은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황금 원칙(Golden Rule)'에 따라 경기 순환 주기 동안 경상 수지만 차입하고, 투자는 세입으로 충당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또한 '지속가능한 투자 원칙'을 통해 국가 부채를 GDP의 40% 이하로 유지했다.
공공 투자의 대폭 확대도 특징이었다. GDP 대비 공공 지출이 1997년 39.9%에서 2007년 44.1%로 늘어났다. 특히 보건과 교육 분야의 투자 증가가 두드러졌다. NHS 예산은 실질적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났고, 교육 예산도 50%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은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공공 부문의 생산성 특히 크게 개선되지 않아서, 투자 대비 성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또한 주택 가격 급등으로 인한 자산 격차 확대도 문제가 되었다.
지역별 불균형도 여전했다. 런던과 남동부는 금융업 호황으로 번영했지만, 북부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산업 지역은 상대적으로 침체되었다. 뉴레이버는 지역 재생 프로그램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지만, 근본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회 변화와 문화적 영향
블레어 시대는 영국 사회의 문화적 변화도 가져왔다.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라는 용어로 상징되는 창조적이고 현대적인 영국의 이미지가 부각되었다. 브릿팝, 패션, 미술 등에서 영국 문화가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블레어 자신도 이런 문화적 변화의 상징이었다. 록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했던 경험을 가진 그는 전통적인 정치인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다우닝가 10번지에 오아시스나 스파이스 걸스 같은 팝스타들을 초대하는 것도 화제가 되었다.
다문화주의도 적극 추진되었다. 인종차별법이 강화되었고, 소수민족의 정치 참여도 늘어났다. 2007년에는 최초의 무슬림 여성 장관이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과 2005년 런던 테러 이후 다문화주의에 대한 회의론도 커졌다.
성소수자 권익도 크게 신장되었다. 2005년 시민결합법이 통과되어 동성 커플도 법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또한 군대에서의 성소수자 차별도 금지되었다. 이는 유럽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정책 중 하나였다.
여성의 사회 진출도 늘어났다. 여성 고용률이 크게 상승했고, 관리직과 전문직에서 여성 비율도 높아졌다.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정책들이 확충되면서 출산율도 소폭 상승했다.
블레어의 사임과 유산
2007년 5월 10일, 블레어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0년 2개월간의 재임은 20세기 이후 가장 오랜 집권이었다. 그는 세 번의 총선에서 모두 승리한 유일한 노동당 당수이기도 했다.
사임 연설에서 블레어는 "이 나라를 사랑했고, 이 직책을 사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최대 성과로 평화, 번영, 진보를 꼽았다. 북아일랜드 평화, 경제 안정, 사회 개혁 등이 그의 주요 업적이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은 끝까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사임 직전까지도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주장했지만, 여론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유산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블레어의 후임으로는 고든 브라운이 당수가 되어 총리가 되었다. 브라운은 10년간 재무장관으로서 뉴레이버의 경제 정책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블레어와는 개인적으로 갈등이 있었고, 정치 스타일도 달랐다.
뉴레이버의 평가와 영향
뉴레이버의 10년은 영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노동당이 중도로 이동하면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전 세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경제 정책에서는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절충을 시도했다. 거시경제 안정을 위해서는 시장 친화적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사회 투자를 통해 불평등을 줄이려 했다. 이는 '사회 투자 국가' 모델이라고 불렸다.
공공 서비스 개혁에서는 '제3의 길'의 특징이 잘 드러났다. 민영화보다는 공공-민간 파트너십을 활용했고, 성과 관리를 통해 효율성을 높이려 했다. 하지만 관료주의적 통제가 강화되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사회 정책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아동 빈곤이 크게 줄어들었고, 최저임금제 도입으로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활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불평등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헌법 개혁은 영국을 더욱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지방분권, 인권법 제정, 상원 개혁 등은 영국 민주주의의 질을 높였다. 하지만 완전한 성문헌법 제정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결론
토니 블레어와 뉴레이버의 10년은 영국 현대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좌우 대립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을 제시했고, 이를 통해 선거에서 연속 승리를 거뒀다.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정의를 동시에 추구하려는 시도는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공공 서비스에 대한 대폭적인 투자와 사회 정책의 혁신은 영국 사회를 더욱 공정하고 포용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특히 아동 빈곤 감소, 최저임금제 도입, 다양성 확산 등은 중요한 성과였다. 또한 헌법 개혁을 통해 영국을 더욱 민주적이고 현대적인 국가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은 블레어의 정치적 유산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또한 불평등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는 한계를 보였고, 금융 중심의 경제 구조는 훗날 2008년 금융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뉴레이버의 경험은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시장경제를 수용하면서도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제3의 길'은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중요한 정치적 선택지로 남아 있다. 블레어가 보여준 정치적 커뮤니케이션과 현대적 감각도 21세기 정치인들에게는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영국이 EU를 떠나고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된 오늘날, 블레어식 중도 정치의 복원 가능성에 대한 관심도 다시 커지고 있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여전히 영국 정치와 세계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