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영국의 위기
1979년 마가렛 대처가 총리로 취임할 당시 영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져 있었다. 1970년대 내내 지속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물가는 치솟았지만 경제 성장은 정체되었고, 실업률은 15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1978년부터 1979년 겨울에 벌어진 '불만의 겨울'은 영국 사회의 혼란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당시 제임스 캘러헌 노동당 정부는 임금 인상률을 5%로 제한하려 했지만,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강력히 반발했다. 쓰레기 수거원, 구급차 운전사, 심지어 묘지 관리원까지 파업에 참여하면서 런던 거리에는 쓰레기가 쌓였고, 응급환자들이 병원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언론은 이를 '영국병'이라고 부르며 국가적 위기감을 부추겼다.
제조업 경쟁력도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 한때 세계를 주도했던 영국의 자동차, 철강, 조선업은 일본과 독일 기업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영국 리랜드, 브리티시 스틸 같은 대기업들은 정부 보조금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는 재정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대처의 등장과 보수주의 혁명
마가렛 대처는 1975년 보수당 당수가 된 이후부터 기존의 합의 정치를 정면으로 거부해왔다. 그녀는 전후 영국을 지배했던 케인즈주의 경제 정책과 복지국가 모델이 영국을 쇠퇴로 이끌었다고 진단했다. 대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의 자유시장 경제학에 깊이 공감했고, 이를 영국에 적용하려 했다.
1979년 5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자, 대처는 즉시 경제 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시작했다. 그녀의 철학은 간단했다.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을 보장하면, 개인의 창의성과 기업가 정신이 발휘되어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대처는 자신의 정책을 설명할 때 자주 가정 경제에 비유했다. "국가도 가정과 마찬가지로 수입 범위 내에서 지출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기본 철학이었다. 이는 복잡한 거시경제 이론을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동시에 케인즈주의 경제학자들의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통화주의 정책과 인플레이션 퇴치
대처 정부의 첫 번째 과제는 인플레이션 억제였다. 1979년 당시 인플레이션율이 연 2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대처는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 이론을 채택했다. 통화 공급량을 엄격히 제한하고 금리를 대폭 인상하여 물가 상승을 억제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제프리 하우 재무장관은 1980년 기준금리를 17%까지 올렸다. 이는 전례 없는 고금리였지만, 대처는 단기적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동시에 정부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세금 구조를 개편했다. 소득세 최고세율을 83%에서 60%로 낮추는 대신 부가가치세를 8%에서 15%로 올려서 세수를 확보했다.
이런 정책은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인플레이션은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지만, 대신 실업률이 급증했다. 1981년에는 실업자가 300만 명을 넘어서면서 대처 정부에 대한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보수당 지지율은 20%대까지 떨어졌고, 당내에서도 정책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공기업 민영화의 시작
대처리즘의 핵심 정책 중 하나는 공기업 민영화였다. 전후 영국에서 국유화된 기업들이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면서 정부 재정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판단한 대처는, 이들을 민간에 매각하여 경쟁을 통한 효율성을 높이려 했다.
첫 번째 대상은 브리티시 텔레콤이었다. 1984년 정부는 BT 주식의 51%를 일반에 공개했는데, 이는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주식 공개였다. 정부는 "국민 모두가 주주가 되는 자본주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개인 투자자들에게는 할인된 가격에 주식을 배정했고, 분할 납부도 허용했다.
BT 민영화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230만 명이 주식을 신청했고, 주가도 급등했다. 이는 영국인들의 주식 투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주식 투자는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BT 민영화를 통해 중산층까지 주식 시장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브리티시 가스(1986), 브리티시 에어웨이즈(1987), 롤스로이스(1987) 등이 연이어 민영화되었다. 각 민영화마다 정부는 치밀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텔 시드(Tell Sid)" 캠페인으로 브리티시 가스 민영화를 홍보하거나, 브리티시 에어웨이즈 민영화 때는 "세계에서 가장 좋아하는 항공사"라는 슬로건을 사용했다.
노동조합과의 대결
대처 정부의 또 다른 핵심 과제는 노동조합의 힘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내내 강력한 노조가 정부 정책을 좌우하는 상황을 목격한 대처는, 노조 개혁 없이는 영국 경제의 근본적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80년 고용법을 시작으로 일련의 노조 규제 법안이 통과되었다. 2차 피케팅을 금지하고, 파업 전 비밀투표를 의무화했으며, 노조의 면책 특권을 축소했다. 또한 클로즈드 숍(조합원만 고용하는 제도)을 불법화하고, 노조 지도부에 대한 조합원들의 통제를 강화했다.
가장 극적인 대결은 1984-85년 광산업 파업이었다. 아서 스카길이 이끄는 전국광산노조(NUM)는 정부의 탄광 폐쇄 계획에 맞서 전국적인 파업을 감행했다. 이는 단순한 임금 협상이 아니라 대처리즘의 성패를 가를 정치적 투쟁이었다.
대처는 파업에 대비해 치밀한 준비를 해왔다. 석탄 비축량을 늘리고, 대체 에너지원을 확보했으며, 경찰력도 대폭 증강했다. 파업이 시작되자 매일 수천 명의 경찰이 탄광 지역에 투입되어 폭력 사태가 빈발했다. 특히 오그리브 코킹 플랜트에서 벌어진 충돌은 "오그리브 전투"라고 불릴 정도로 격렬했다.
1년간 지속된 파업은 결국 노조의 패배로 끝났다. 경제적 어려움과 내부 분열로 광부들이 하나둘 복귀하기 시작했고, 1985년 3월 NUM은 조건 없는 복업을 선언했다. 이는 영국 노동운동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전후 영국 정치를 좌우했던 강력한 노조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금융 시장 혁신과 빅뱅
1980년대 중반부터 대처 정부는 런던 시티의 금융 시장 개혁에 착수했다. 전통적으로 런던의 금융업은 관습과 신사협정에 의존하는 보수적인 구조였다. 증권 거래소는 고정 수수료제를 유지했고,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1986년 10월 27일, 일명 '빅뱅'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금융 시장 개혁이 단행되었다. 고정 수수료제가 폐지되고,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간 겸업이 허용되었으며, 외국 금융기관의 진입 장벽도 크게 낮춰졌다. 동시에 전자 거래 시스템이 도입되어 거래의 효율성이 대폭 향상되었다.
빅뱅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런던 시티로 세계 각국의 투자은행들이 몰려들었고, 거래량도 급증했다. 미국의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일본의 노무라 증권, 독일의 도이체방크 등이 런던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이는 런던을 뉴욕과 함께 세계 금융의 쌍두마차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금융업의 발달은 런던의 도시 경관도 바꿨다. 시티와 카나리 워프에 초고층 빌딩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금융 전문가들의 고소득으로 부동산 가격도 급등했다. '야피(Yuppie, Young Urban Professional)'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젊은 금융 전문가들이 새로운 사회 계층으로 부상했다.
주택 보유 확산과 부동산 붐
대처리즘의 또 다른 특징은 주택 소유의 확산이었다. 1980년 주택법을 통해 정부는 공공주택(카운슬 하우스) 거주자들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할인된 가격에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이는 '매입할 권리(Right to Buy)' 정책으로 불렸다.
이 정책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1979년 영국의 주택 자가 소유율은 55%였지만, 1990년에는 70%에 가까워졌다. 특히 노동계층 가정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소유하게 되면서, 사회적 신분 상승의 상징이 되었다. 대처는 이를 "소유하는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정책은 장기적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공공주택 재고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공급이 부족해졌다. 또한 매각 수익을 새로운 공공주택 건설에 재투자하지 않아서, 주택 부족 문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부동산 시장도 과열되기 시작했다. 금융 규제 완화로 주택담보대출이 쉬워지면서 투기 수요가 늘어났고, 특히 런던과 남동부 지역의 집값이 급등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연간 20% 이상 집값이 오르는 지역도 있었다.
경제 구조의 근본적 변화
대처리즘 10년을 거치면서 영국 경제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제조업의 비중은 계속 줄어든 반면, 서비스업, 특히 금융업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1979년 제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8%였다면, 1990년에는 20% 이하로 떨어졌다.
지역별 격차도 더욱 벌어졌다. 런던과 남동부는 금융업 호황으로 번영했지만, 북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전통적인 제조업 지역은 쇠퇴했다. 탄광과 철강 공장이 폐쇄되면서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졌고, 지역 공동체가 해체되는 경우도 많았다.
고용 구조도 변화했다. 종신고용과 단체교섭이 일반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임시직과 시간제 근무가 늘어났다. 이는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높였지만, 동시에 고용 불안정도 증가시켰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이전 세대와 전혀 다른 노동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소득 불평등도 심화되었다. 고소득층의 세금 부담이 줄어들고 금융업 종사자들의 소득이 급증한 반면, 제조업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79년 상위 10%와 하위 10%의 소득 격차가 3배였다면, 1990년에는 4배 이상으로 벌어졌다.
정치적 영향과 사회 변화
대처리즘은 영국 정치 지형도 바꿨다. 노동당은 1983년과 1987년 총선에서 연이어 참패하면서 정체성 위기에 빠졌다. 좌파적 정책으로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노동당 내부에서 현대화 논의가 시작되었다.
사회 문화적으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기업가 정신'과 '개인의 성공'이 새로운 가치로 부상했다. 1980년대 영국에서는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 사회적 성공의 상징이 되었고, 이를 다룬 드라마와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결속력은 약화되었다. 대처의 유명한 말 "사회 같은 것은 없다. 개인과 가족이 있을 뿐이다"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성공이 중시되는 문화가 확산되었다.
지역별로는 서로 다른 경험을 했다. 런던과 남동부의 중산층은 주택 가격 상승과 주식 투자 수익으로 부를 축적했지만, 북부의 전통적인 노동자 지역은 탈공업화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이는 영국 사회의 지역별 정치 성향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국제적 위상의 변화
대처리즘은 영국의 국제적 위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모델의 성공 사례로 평가받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민영화와 규제 완화 정책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장경제로 전환할 때 영국 모델이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
EU와의 관계에서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대처는 EU 통합에 회의적이었고, 특히 단일통화 도입에는 강력히 반대했다. 1988년 브뤼헤 연설에서 그녀는 "유럽의 국가 정체성을 억압하는 유럽 초국가"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훗날 브렉시트로 이어지는 유럽 회의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로널드 레이건과의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대처는 냉전 말기 서방 진영의 결속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는 미국의 초기 중립 입장으로 인해 갈등을 겪기도 했다.
1990년 대처의 몰락
1980년대 말부터 대처 정부는 여러 위기에 직면했다. 1988년부터 시작된 인플레이션 재상승, 높은 금리로 인한 경기 침체, 그리고 무엇보다 '인두세(Poll Tax)' 도입으로 인한 대규모 시위가 대처의 정치적 기반을 흔들었다.
인두세는 지방세 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지만, 소득에 관계없이 모든 성인이 동일한 세금을 내야 한다는 점에서 강한 반발을 샀다. 1990년 3월 트라팔가 광장에서 벌어진 반대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고, 이는 대처 정부의 권위에 치명타를 가했다.
보수당 내부에서도 대처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유럽 통합에 대한 강경한 반대 입장과 독단적인 리더십에 피로감을 느낀 의원들이 늘어났다. 1990년 11월 마이클 헤설타인이 당수 선거에 출마하면서 대처의 리더십에 공식적으로 도전했다.
1차 투표에서 대처는 과반을 넘지 못했고, 결국 사퇴를 선언했다. 11년간 지속된 대처 시대의 막이 내린 것이다. 후임으로 존 메이저가 당수가 되어 총리직을 이어받았지만, 대처리즘의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결론
마가렛 대처의 11년 통치는 영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시기 중 하나였다. 그녀는 1970년대 말 영국이 직면한 심각한 경제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해법으로 해결하려 했고, 많은 부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인플레이션을 잡고, 경제 성장을 회복했으며, 런던을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만들었다.
공기업 민영화와 노조 규제는 영국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고, 주택 소유 확산은 중산층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문화적 변화는 영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대처리즘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지역 간 격차가 벌어졌으며, 사회적 결속력이 약화되었다. 특히 탈공업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제조업 지역이 겪은 고통은 오늘날까지도 영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대처리즘은 단순히 경제 정책의 변화를 넘어서 영국 사회의 가치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꾼 사회 혁명이었다. 그 영향은 대처 사후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영국 정치에서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간의 대립은 여전히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철의 여인이 남긴 유산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으면서, 영국이 21세기를 맞이하는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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