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64. 스에즈 위기와 세계 패권 전환 - 1956년 군사 개입 실패와 제국의 종말

SSSCH 2025. 5. 24.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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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르의 도전과 수에즈 운하 국유화

1956년 7월 26일,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면서 전후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위기가 시작된다. 나세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혁명 4주년 기념 연설에서 수에즈 운하회사를 즉시 국유화한다고 발표하며, 운하 통행료를 아스완 하이댐 건설 자금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힌다.

이 선언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청천벽력과 같았다. 수에즈 운하는 단순한 교통로가 아니라 서구 열강의 경제적 생명선이었다. 영국은 운하를 통해 중동 석유를 수송하고 극동 지역과 교역했으며, 운하 수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875년 디즈레일리가 이집트 총독으로부터 구입한 운하 지분은 영국 제국의 상징이기도 했다.

나세르의 운하 국유화 선언은 우연이 아니었다. 며칠 전인 7월 19일 미국이 아스완 하이댐 건설 지원을 철회한다고 발표했고, 영국과 세계은행도 이에 동조했다. 서구 국가들이 이집트의 소련 접근과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의 무기 구입을 문제 삼아 압박을 가한 것이다. 나세르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서구의 경제적 이익을 직격하는 수에즈 운하를 표적으로 삼았다.

나세르는 연설에서 "이집트 땅에 있는 이집트의 운하"라고 강조하며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내세웠다. 또한 운하 운영 수익을 이집트 발전에 사용하겠다고 약속해 아랍 세계와 제3세계의 폭발적 지지를 받는다. 이는 탈식민지 시대 약소국이 강대국에 맞서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든의 딜레마와 영국의 대응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은 나세르의 도전을 개인적 모독으로 받아들인다. 이든은 외무장관 시절부터 중동 문제에 깊이 관여해왔고, 아랍 지도자들과의 협상 경험이 풍부했다. 하지만 나세르를 "나일강의 무솔리니"라고 부르며 강경 대응을 주장한다.

이든에게 수에즈 운하는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선 문제였다. 만약 나세르의 국유화를 그대로 두면 영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다른 중동 국가들도 비슷한 도전을 시도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 시설, 페르시아만의 영국 기지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영국 내각은 처음에는 경제 제재와 외교적 압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런던에서 22개국이 참가한 수에즈 운하 회의가 열렸지만, 이집트가 불참한 가운데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운하 이용국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방안도 제시되었지만 나세르는 단호히 거부한다.

한편 이든은 군사적 옵션도 준비한다. 8월부터 키프로스와 몰타의 영국 기지에서 군사력 증강이 시작되고, 프랑스와 군사 협력 논의도 진행된다. 하지만 미국이 군사 행동에 반대 입장을 보이면서 이든은 딜레마에 빠진다. 미국의 지지 없이는 성공적인 군사 작전이 어렵지만, 미국은 냉전 맥락에서 아랍 세계의 반감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든의 건강 문제도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1953년 담관 수술 후유증으로 진통제에 의존하고 있던 이든은 스트레스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었다. 측근들은 그의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행동을 우려했지만, 이든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이 수에즈 문제 해결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세브르 협정과 비밀 공모

프랑스는 영국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세르 제거를 원했다. 알제리 독립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프랑스는 나세르가 알제리 독립군에게 무기와 지원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기 몰레 총리는 나세르를 제거하면 알제리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스라엘은 또 다른 이유로 이집트와의 충돌을 원했다. 1948년 독립 이후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고, 페다인 게릴라들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데이비드 벤구리온 총리와 모셰 다얀 국방장관은 선제공격을 통해 이집트 군사력을 무력화시키고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파리 근교 세브르에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비밀 회담이 열린다. 이 회담에서 충격적인 공모 계획이 수립된다. 이스라엘이 먼저 시나이 반도를 공격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평화 유지'를 명분으로 개입해 운하 지대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세브르 협정의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이스라엘이 10월 29일 시나이 공격을 시작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양측에 정전을 요구한다. 이집트가 거부하면 48시간 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운하 보호'를 위해 개입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침공을 핑계로 수에즈 운하를 탈환하려는 치밀한 각본이었다.

협정 체결 과정에서 이든의 역할은 애매했다. 공식적으로는 협정 서명을 거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작전 계획에 동의했다. 이는 후에 이든이 의회와 국민을 속였다는 비판을 받는 근거가 된다.

스에즈 전쟁의 전개

1956년 10월 29일 오후 5시, 이스라엘군 공수부대가 시나이 반도의 미틀라 고개에 강하하면서 스에즈 전쟁이 시작된다. 계획대로 영국과 프랑스는 10월 30일 양국에 12시간 내 정전과 운하 지역에서 16킬로미터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이스라엘은 당연히 최후통첩을 수용했지만, 나세르는 이를 거부한다. 이집트군이 운하 지역에서 철수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시나이 점령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나세르는 대신 운하를 봉쇄하고 군함을 침몰시켜 통항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한다.

10월 31일 영국과 프랑스의 공습이 시작된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의 비행장들이 폭격당하고, 이집트 공군은 하루 만에 무력화된다. 하지만 지상군 투입은 계속 지연된다. 영국군은 키프로스와 몰타에서 출발해야 했고, 프랑스군도 본국에서 함대를 파견해야 했다.

이 지연이 치명적이 된다. 군사 작전이 길어지면서 국제사회의 반발이 커지고, 영국 내에서도 반대 여론이 확산된다. 특히 미국의 격렬한 반대는 영국 정부에게 큰 충격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대선을 일주일 앞둔 상황에서 동맹국의 일방적 군사행동에 분노했다.

11월 5일 마침내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포트사이드와 포트푸아드에 상륙한다. 이집트군은 예상보다 약한 저항을 보였고, 연합군은 순조롭게 수에즈 운하 북단을 점령한다. 하지만 이것이 승리의 시작이 아니라 재앙의 막을 올리는 신호였다.

국제사회의 반발과 미국의 압박

스에즈 침공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은 영국이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가장 큰 충격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였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동맹국의 사전 협의 없는 군사행동에 분노했을 뿐만 아니라, 냉전 상황에서 아랍 세계를 소련 쪽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은 즉시 경제적 압박을 가한다. 영국이 IMF에서 달러를 인출하는 것을 막고, 영국 국채 매각을 통해 파운드 가치를 급락시킨다. 석유 금수조치로 에너지 위기까지 겹치면서 영국 경제는 극도로 불안해진다. 헤럴드 맥밀런 재무장관은 "우리는 파산 직전"이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유엔에서도 영국은 완전히 고립된다. 10월 30일 안보리에서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즉시 정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한다. 영국과 프랑스가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총회로 안건이 넘어가면서 더 큰 압박을 받는다. 11월 2일 총회는 압도적 표차로 즉시 정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소련의 개입 위협도 상황을 악화시킨다. 흐루시초프는 핵무기 사용까지 암시하며 영국과 프랑스를 위협한다. 비록 빈 협박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헝가리 혁명 진압으로 국제적 비난을 받던 소련이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영연방 국가들의 반발도 예상외였다. 캐나다의 레스터 피어슨 외무장관은 유엔에서 영국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인도의 네루 총리는 "제국주의의 부활"이라고 강하게 규탄한다. 호주와 뉴질랜드도 지지를 철회하면서 영국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다.

정전과 굴욕적 철수

국제적 압박과 경제 위기가 극에 달하면서 이든 정부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6일 자정을 기해 정전이 발효되고,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수에즈 운하를 완전히 점령하지도 못한 채 공격을 중단한다. 이든은 의회에서 "유엔의 요구에 따라" 정전을 수용한다고 발표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압박에 굴복한 것이었다.

12월부터 영국과 프랑스군의 철수가 시작된다. 유엔 평화유지군(UNEF)이 수에즈 운하 지역에 배치되면서 연합군을 대체한다. 이는 유엔 평화유지 활동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지만, 영국에게는 굴욕적인 패배였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철수를 거부하며 버텼지만, 결국 1957년 3월 미국의 압박에 굴복한다. 대신 가자 지구에 유엔군이 주둔하고 아카바만 항행의 자유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철수에 동의한다. 이스라엘은 영국과 프랑스보다는 덜 굴욕적인 조건으로 위기를 마무리한다.

나세르는 완전한 승리자가 된다.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 소유로 확정되었고, 나세르는 아랍 세계와 제3세계의 영웅으로 부상한다. 이는 아랍 민족주의와 반서구 정서를 크게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이든의 몰락과 정치적 후폭풍

스에즈 위기는 이든의 정치적 종말을 가져온다. 건강 악화를 이유로 1957년 1월 사임하지만, 실제로는 스에즈 실패의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이든은 나중에 자서전에서 "미국의 배신"을 원망했지만, 국제정세를 잘못 판단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의회에서는 스에즈 침공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노동당은 이든 정부가 의회와 국민을 속이고 불법적인 전쟁을 벌였다고 비판한다. 보수당 내에서도 균열이 드러나면서 이든의 리더십은 완전히 실추된다.

여론도 분열된다. 초기에는 강경 대응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면서 반대 여론이 확산된다. 특히 지식인과 언론은 "제국주의의 부활"이라며 강하게 비판한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의 반전 시위도 일어난다.

스에즈 위기는 영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전후 세대는 영국이 더 이상 세계 강국이 아니라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동시에 미국에 대한 의존성이 명확해지면서 "특별한 관계"의 실상이 드러난다.

경제적 파급효과와 구조적 변화

스에즈 위기는 영국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준다. 파운드화 위기로 외환보유고가 급감하고, 석유 공급 중단으로 에너지 위기가 발생한다. 정부는 휘발유 배급제를 도입하고 긴급 절약 정책을 시행해야 했다.

더 심각한 것은 구조적 변화였다. 중동에서의 영향력 상실로 영국의 석유 확보 능력이 크게 제약된다.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친영 정권들도 불안해지면서 영국의 중동 정책 전반이 재검토된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중동에서 점진적으로 철수하고 미국에 패권을 넘겨주게 된다.

수에즈 운하 봉쇄로 극동 무역로도 타격을 받는다. 영국 해운업과 무역업체들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는 우회로를 이용해야 했고, 이로 인한 비용 증가는 영국 경제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금융 분야에서는 런던의 국제금융센터 지위가 흔들린다. 파운드화에 대한 신뢰 하락으로 달러 중심의 국제통화체제가 더욱 공고해진다. 이는 장기적으로 영국의 금융 패권 상실로 이어진다.

외교 정책의 전환점

스에즈 위기는 영국 외교 정책의 근본적 전환점이 된다. 독자적인 세계 정책의 한계가 명확해지면서 '동쪽의 수에즈' 정책이 사실상 폐기된다. 대신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유럽 통합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방향이 설정된다.

이든의 후임인 해럴드 맥밀런은 미국과의 관계 복원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1957년 3월 버뮤다에서 아이젠하워와 정상회담을 갖고 핵 협력 재개에 합의한다. 이는 영국이 미국의 주니어 파트너 역할을 받아들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유럽 정책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1957년 로마조약으로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출범하자, 영국은 처음에는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으로 대응한다. 하지만 점차 EEC 가입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1961년 첫 가입 신청을 하게 된다.

중동 정책은 완전히 수세적으로 변한다. 1958년 이라크 혁명으로 친영 정권이 무너지고, 1961년 쿠웨이트 위기에서도 제한적 개입에 그친다. 영국은 중동에서 '동쪽의 수에즈' 역할을 포기하고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제3세계와 탈식민지화에 미친 영향

스에즈 위기는 전 세계 탈식민지화 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나세르의 승리는 약소국도 강대국에 맞설 수 있다는 희망을 제3세계에 심어준다. 이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독립 운동을 크게 고무시킨다.

아랍 세계에서는 나세르주의가 확산된다. 시리아가 이집트와 연합해 아랍연합공화국을 형성하고, 이라크에서는 친서구 정권이 무너진다. 요단과 레바논에서도 친나세르 세력이 부상하면서 중동 정치 지형이 완전히 바뀐다.

아프리카에서는 독립 요구가 더욱 거세진다. 가나의 엔크루마와 같은 지도자들은 나세르를 모범으로 삼아 더욱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벌인다. 영국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바람의 변화' 정책을 통해 아프리카 식민지의 평화적 독립을 추진하게 된다.

프랑스도 스에즈 실패 후 식민지 정책을 재검토한다. 알제리 전쟁은 계속되지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점진적 독립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꾼다. 이는 1960년 아프리카의 해로 이어진다.

결론

1956년 스에즈 위기는 대영제국의 종말을 상징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영국이 독자적인 세계 정책을 포기하고 미국의 주니어 파트너로 전락하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동시에 냉전 구도 속에서 제3세계가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든이 의도했던 영국 위신의 회복은 완전히 실패했고, 오히려 영국의 한계를 전 세계에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에즈 위기의 실패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잘못된 판단, 미국과의 사전 협의 부족, 국내 여론과 의회 무시,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의 실력을 과대평가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19세기식 포함외교가 20세기 중반의 국제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스에즈 위기는 영국에게 값진 교훈도 남겼다.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국제적 역할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과의 관계 재정립과 유럽 통합 참여라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제국 시대의 향수에서 벗어나 중간 강국으로서의 현실적 외교를 추진하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스에즈에서의 굴욕적 패배는 영국으로 하여금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기를 수 있게 해준 전화위복의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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