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63. 인도·팔레스타인 독립과 제국 해체 - 대영제국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 질서

SSSCH 2025. 5. 2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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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가속화한 탈식민지 열풍

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대영제국은 급속한 해체 과정에 들어간다. 전쟁 중 일본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영국 식민지를 점령하면서 영국의 군사적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고, 식민지 민족들은 독립에 대한 자신감을 얻는다. 싱가포르 함락과 버마 상실은 특히 충격적이었는데, 아시아인들에게 백인 지배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전쟁 중 영국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고 선전한 것도 식민지 해방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대서양 헌장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것은 영국 스스로가 제국주의 질서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전쟁 비용으로 인한 영국의 경제적 약화는 광대한 제국을 유지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초강대국의 등장도 탈식민지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된다. 미국은 자유무역 확대를 위해 영국의 제국 특혜 관세 제도에 반대했고, 소련은 사회주의 이념을 내세워 식민지 해방을 지원한다. 냉전 구도에서 영국은 더 이상 혼자 힘으로 제국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애틀리 노동당 정부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명예로운 철수' 정책을 추진한다. 무력으로 식민지를 붙잡고 있으려다 더 큰 손실을 입기보다는, 적절한 시점에 독립을 허용하면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도 독립과 분할의 비극

영국이 가장 먼저 직면한 과제는 '제국의 보석'이라 불리던 인도 문제였다. 인도는 영국 제국 경제의 핵심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독립 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는 오랫동안 영국 통치에 저항해왔고, 2차 대전 중에는 '영국이여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운동을 전개했다.

전쟁이 끝나자 인도에서는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연이어 일어난다. 특히 1946년 봄베이 해군 반란은 영국 당국에게 큰 충격을 준다. 인도인 수병들이 영국 장교들에게 반기를 들면서 반영 투쟁이 무력화 단계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영국군 내부에서도 인도인 병사들의 충성도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무력으로 인도를 계속 지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인도 독립 과정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는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종교적 갈등이었다.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이끄는 전인도무슬림연맹은 무슬림을 위한 별도 국가 파키스탄 건설을 주장한다. 인도국민회의는 통합된 세속국가를 원했지만, 양측 간의 대립은 타협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했다.

1947년 3월 마운트배튼 경이 인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상황이 급전개된다. 그는 독립 시기를 1948년 6월에서 1947년 8월로 앞당기고, 인도 분할을 받아들인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종교를 기준으로 영토를 나누어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무슬림 중심의 파키스탄을 각각 독립시키겠다는 것이었다.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이,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면서 200년간 지속된 영국의 인도 지배가 막을 내린다. 하지만 독립과 동시에 시작된 대규모 인구 이동은 참혹한 비극을 낳는다. 약 1200만 명이 종교에 따라 국경을 넘나들면서 100만 명 이상이 종교적 폭동으로 목숨을 잃는다.

특히 펀자브와 벵골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종족 청소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영국은 독립 과정에서 질서 유지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성급한 철수가 비극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종료와 중동 분쟁의 시작

인도 문제와 함께 영국을 골치 아프게 한 것은 팔레스타인 문제였다. 1차 대전 후 국제연맹으로부터 위임통치권을 받은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은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을 중재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1917년 밸푸어 선언으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밝혔지만, 동시에 아랍인들의 권리도 보장해야 했다.

2차 대전 중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수백만 유대인이 희생되면서 유대인 국가 건설에 대한 국제적 동정론이 높아진다. 미국에서는 강력한 유대인 로비가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했고, 소련도 중동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드는 유대인 이민자들과 기존 아랍인 주민들 사이의 갈등은 격화된다. 유대인 무장조직들은 영국 통치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하고, 아랍인들도 유대인 정착촌을 습격한다. 1946년 7월 이르군이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파해 영국 관리들과 민간인 9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통제 불가능 상태에 이른다.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기로 결정한다. 더 이상 양측을 만족시킬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지만, 아랍측은 이를 거부한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면서 위임통치가 종료되고, 같은 날 데이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다음날 아랍 연맹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된다. 영국의 철수는 중동 지역에 반세기 이상 지속될 분쟁의 씨앗을 남긴다.

버마와 실론의 독립

인도와 팔레스타인 외에도 영국은 아시아 전역에서 식민지를 잃어간다. 버마(현재의 미얀마)는 2차 대전 중 일본군에 점령되었다가 1945년 영국이 재점령했지만, 독립 요구가 거세진다. 아웅산이 이끄는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FPFL)은 영국과 협상을 통해 독립을 추진한다.

1947년 1월 영국과 버마 지도자들이 런던에서 협정을 체결해 1948년 독립을 약속한다. 하지만 아웅산은 1947년 7월 정적들의 암살로 목숨을 잃고, 우 누가 초대 총리가 되어 1948년 1월 4일 버마연방이 독립한다. 흥미롭게도 버마는 영연방(Commonwealth) 가입을 거부하고 완전한 독립을 선택한다.

실론(현재의 스리랑카)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과정을 거쳐 독립한다. 돈 스티븐 세나나야케가 이끄는 통합국민당이 영국과 협상을 통해 점진적 자치권 확대를 이뤄낸다. 1948년 2월 4일 실론 자치령이 성립하면서 독립을 달성하지만, 영연방에는 남아있기로 한다.

동남아시아에서 영국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대해서는 당분간 통치를 지속한다. 말레이시아는 공산주의 게릴라와의 12년간 전쟁을 거쳐 1957년에야 독립하고, 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할 때까지 영국령으로 남는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의 점진적 철수

중동 지역에서 영국은 전략적 요충지들을 오래 붙잡고 있으려 한다. 수에즈 운하와 페르시아만의 석유는 영국 경제에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으로 영국의 입지는 점차 약해진다.

이집트에서는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친영 파루크 왕정을 무너뜨린다.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 영국군 기지 철수를 요구하며 강력한 반영 정책을 펼친다. 1954년 영국은 결국 수에즈 운하 지대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하지만, 운하 자체의 소유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요단(트랜스요단)은 194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요단 왕국이 되지만, 영국과의 군사 협정은 유지한다. 이라크도 1932년 명목상 독립했지만 영국의 영향 하에 있다가, 1958년 공화혁명으로 친영 왕정이 무너진다.

아프리카에서는 상황이 더 복잡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리비아가 1951년 독립하고, 수단이 1956년 독립한다. 하지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독립은 1960년대까지 미뤄진다. 가나(골드코스트)가 1957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최초로 독립하면서 아프리카 독립의 물꼬를 트지만, 본격적인 탈식민지화는 다음 세대의 몫이 된다.

영연방 체제의 구축

영국은 제국 해체 과정에서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영연방(Commonwealth) 체제를 발전시킨다. 이는 과거 식민지들과 느슨한 연합체를 형성해 경제적·문화적 유대를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시작된 영연방은 전후 급속히 확대된다.

1949년 런던 선언에서 영연방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공화국이 된 인도가 영연방에 남을 수 있도록 영국 국왕을 '영연방의 수장'으로만 인정하면 된다고 규정한 것이다. 이로써 영연방은 군주제 국가들만의 클럽에서 다양한 정치체제를 포용하는 국제기구로 변모한다.

영연방 체제는 영국에게 몇 가지 이점을 제공한다. 첫째, 특혜 무역 관계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둘째, 국제사회에서 영연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아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 셋째, 냉전 시대에 서방 진영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영연방의 한계도 명확했다. 회원국들이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하면서 영국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진다. 특히 1956년 수에즈 위기 때 캐나다와 인도 등이 영국을 비판하면서 영연방 내 균열이 드러난다.

경제적 영향과 구조 조정

제국 해체는 영국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식민지에서 얻던 원료와 시장을 잃으면서 영국의 국제수지는 악화된다. 특히 인도 시장 상실은 랭커셔 면직물 공업에 치명적 타격을 주고, 중동에서의 영향력 약화는 석유 확보에 어려움을 가져온다.

영국 정부는 달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출 증대와 수입 대체에 노력한다. 스털링 지역(Sterling Area) 체제를 강화해 파운드를 사용하는 국가들과의 무역을 촉진하고, 유럽 시장 개척에도 힘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제조업 구조조정과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이 필요했다.

제국 해체는 영국의 지정학적 위상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더 이상 세계 각지에 군사 기지와 해군력을 전개할 필요가 줄어들면서 국방비 부담이 감소한다. 하지만 동시에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도 약해진다. 영국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강화하고 유럽 통합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노동력 부족 문제도 대두된다. 식민지에서 귀국한 공무원과 군인들이 있었지만, 전후 재건과 복지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력은 부족했다. 이는 후에 서인도제도와 남아시아에서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다.

정치적 재편과 외교 정책 변화

제국 해체는 영국 정치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보수당 내에서는 '제국파'와 '유럽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노동당은 탈식민지화를 진보적 가치 실현으로 해석하며 정치적 정당성을 얻는다. 자유당은 이미 쇠퇴했지만, 민족자결주의를 오랫동안 주장해온 만큼 제국 해체를 지지한다.

외교 정책에서는 '동쪽의 수에즈' 정책이 폐기되고 서구 중심의 새로운 전략이 등장한다. 1949년 NATO 창설에 참여하고, 미국과의 핵 협력을 강화하며, 유럽 대륙과의 관계 개선에도 노력한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소련에 이은 '제3의 힘' 역할을 하려는 야심을 버리지 못한다.

처칠이 1951년 재집권하면서 제국 유지에 대한 향수가 일시적으로 되살아난다. 하지만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오히려 처칠은 영국이 '세 개의 원(Three Circles)' - 영연방, 대서양 동맹, 유럽 - 의 교차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언론과 여론도 변화한다. 제국에 대한 자부심이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영국의 역할을 모색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특히 지식인층에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시작된다.

사회문화적 변화와 정체성의 재정립

제국 해체는 영국인들의 정체성에도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다. 수 세기 동안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영국인들은 갑자기 중간 정도 규모의 유럽 국가로 전락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는 심리적으로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해방감도 있었다. 식민지 반란 진압이나 원주민 탄압에 대한 도덕적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제국 유지 비용이 사라지면서 국내 복지와 발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다.

교육과 문화 분야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제국사 중심의 역사 교육이 축소되고, 유럽사와 세계사의 비중이 늘어난다. 문학과 예술에서도 제국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시작된다. 조지 오웰의 『1984』나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들은 이런 변화를 반영한다.

종교계에서도 선교 중심의 활동이 줄어들고, 국내 사회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또한 식민지에서 돌아온 선교사들이 다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 교회의 개혁을 추진한다.

결론

1940년대 후반 인도와 팔레스타인을 시작으로 한 대영제국의 해체는 영국 역사의 한 시대를 마감하는 사건이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절정에 달했던 영국의 세계 패권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완전히 끝나게 된다. 특히 인도 독립은 상징적 의미가 컸는데, 영국 제국 경제의 핵심이었던 인도를 잃으면서 영국은 더 이상 세계 최강국이 아니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제국 해체 과정에서 영국이 보여준 현실 인식과 적응력은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치른 참혹한 식민지 전쟁과 달리, 영국은 대체로 협상을 통한 평화적 이양을 추진했다. 물론 인도 분할 과정의 혼란이나 팔레스타인 문제 등 부작용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명예로운 철수'를 달성했다고 평가받는다.

영연방 체제 구축을 통해 구식민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시도도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영국이 원하는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지만, 완전한 단절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특히 경제적 협력과 문화적 유대 유지 측면에서 영연방은 일정한 역할을 했다.

제국 해체는 영국에게 새로운 국제적 역할을 모색할 기회이기도 했다.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 강화, NATO를 통한 대서양 동맹 참여, 그리고 점진적인 유럽 통합 과정 참여 등을 통해 영국은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 적응해 나간다. 비록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었지만, 중간 강국으로서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해 나가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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