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남긴 사회적 각성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 사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전쟁 기간 동안 모든 계층이 함께 고통을 나누며 싸웠던 경험은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웠다. 런던 대공습 때 지하철역에서 밤을 보낸 사람들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같은 처지였고, 전쟁터에서는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모두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
특히 전쟁 중 국가가 경제와 사회 전반을 계획적으로 관리하며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경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완전고용이 달성되고, 배급제를 통해 모든 국민이 공평하게 물자를 나누어 사용했으며,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하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러한 경험은 평화 시에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1945년 7월 총선에서 노동당이 압승을 거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처칠의 전쟁 지도력에는 감사하지만, 전후 사회 건설은 새로운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클레먼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야심찬 사회 개혁에 착수한다.
비버리지 보고서와 복지국가의 청사진
전후 복지국가 건설의 이론적 토대는 1942년 발표된 비버리지 보고서에서 마련된다. 윌리엄 비버리지는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사회 개혁가로, 전쟁 중 사회보험 제도 개선 방안을 연구하라는 정부의 위임을 받아 이 보고서를 작성한다.
비버리지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다섯 가지 거대한 악을 지목한다. 첫째는 '궁핍(Want)'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의미하고, 둘째는 '질병(Disease)'으로 건강 문제를 뜻한다. 셋째는 '무지(Ignorance)'로 교육 기회의 부족을, 넷째는 '더러움(Squalor)'으로 열악한 주거 환경을, 다섯째는 '게으름(Idleness)'으로 실업 문제를 가리킨다.
보고서는 이 다섯 가지 악을 퇴치하기 위한 포괄적인 사회보장 제도를 제안한다. 모든 국민이 기여하고 모든 국민이 혜택을 받는 보편적 사회보험 제도가 핵심이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국가가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한다는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Cradle to Grave)'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도 이때다.
비버리지 보고서는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63만 부가 팔려나가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는다. 전쟁으로 지친 영국 국민들에게 희망적인 미래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칠을 비롯한 보수당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이런 개혁을 실시하기 어렵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애틀리 정부의 사회 개혁 정책
1945년 집권한 애틀리 노동당 정부는 비버리지 보고서를 기반으로 한 전면적인 사회 개혁에 착수한다. 애틀리는 온건하고 실용적인 성격의 정치인으로,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개혁을 추진한다. 그는 "우리는 혁명이 아니라 진화를 원한다"고 말하며 영국적인 방식의 사회주의를 추구한다.
첫 번째 주요 조치는 1946년 국민보험법 제정이다. 이 법은 모든 취업자가 보험료를 납부하고, 실업·질병·노령·산업재해 시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 기존의 선별적이고 자선적 성격의 구빈법 체계를 완전히 폐지하고, 권리로서의 사회보장 개념을 확립한 것이다.
같은 해 산업재해보상법과 국민부조법도 제정되어 사회안전망을 더욱 촘촘하게 만든다. 국민부조법은 국민보험으로 커버되지 않는 사각지대를 메우는 역할을 하며, 모든 국민이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교육 부문에서도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1944년 이미 제정된 버틀러 교육법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면서 무상 중등교육을 실현한다. 11세에 치르는 시험 결과에 따라 문법학교, 기술학교, 현대학교로 나누는 삼분제 시스템이 도입되어 능력에 따른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NHS 창설과 보편 의료제도의 탄생
애틀리 정부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1948년 7월 5일 출범한 국민건강서비스(NHS) 창설이다. 이는 세계 최초의 보편적 무료 의료제도로, 영국 복지국가의 상징이 된다. NHS는 "필요에 따라 무료로, 지불 능력과 상관없이"라는 원칙 하에 모든 국민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NHS 창설의 주역은 보건부 장관 아뉴린 베번이다. 웨일스 출신의 광부 아들로 자수성가한 베번은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비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현실을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그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는 계급이 없다"며 보편적 의료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하지만 NHS 창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영국의사협회(BMA)는 의사들의 자율성과 소득이 위협받을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한다. 일부 의사들은 파업까지 불사하며 제도 도입을 저지하려 한다. 베번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들의 입에 금을 채워 넣겠다"고 표현할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다.
병원 국유화도 큰 논란을 일으킨다. 기존의 자선병원과 지방정부 병원을 모두 국가 소유로 전환하면서 통합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보수당과 기득권층은 이를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비판하지만, 베번은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다른 품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1948년 7월 5일 NHS가 출범하면서 영국 의료 체계는 완전히 바뀐다. 출범 첫날부터 많은 국민들이 병원과 의원을 찾았고, 그동안 치료를 미루어왔던 질병들이 대거 발견된다. 안경과 틀니에 대한 수요도 폭증하면서 예산 부족 문제가 대두되지만, NHS는 곧 영국 국민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제도로 자리잡는다.
주택 정책과 뉴타운 건설
전후 영국이 직면한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주택 부족이었다. 전쟁 중 독일군의 폭격으로 수십만 채의 주택이 파괴되었고, 수년간 신규 주택 건설이 중단되면서 주택난이 극심했다. 많은 가족들이 임시 막사나 친척집에서 지내야 했고, 신혼부부들은 결혼 후에도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애틀리 정부는 대규모 공공주택 건설 프로그램을 추진한다. 지방정부가 주도하는 시영주택(council housing) 건설을 대폭 확대하고, 민간 건설업체에도 정부 지원을 제공해 주택 공급량을 늘린다. 1948년부터 1951년까지 4년간 약 100만 채의 주택이 새로 건설되어 주택난 해소에 크게 기여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뉴타운(New Town) 건설 프로젝트다. 1946년 뉴타운법이 제정되면서 런던 주변과 기타 대도시 근교에 계획도시를 건설하는 사업이 시작된다. 하를로우, 스티브니지, 크롤리 등 14개의 뉴타운이 지정되어 현대적인 도시 계획에 따라 개발된다.
뉴타운은 단순히 주택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려는 시도였다. 주거지역과 상업지역, 공업지역을 합리적으로 배치하고, 충분한 녹지 공간과 공공시설을 확보한다. 또한 다양한 계층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도록 소득 수준에 따른 다양한 주택 유형을 제공한다.
국유화 정책과 경제 민주화
애틀리 정부는 주요 산업의 국유화도 추진한다. 1946년 영국은행이 국유화되면서 통화 정책의 공공성이 강화되고, 같은 해 석탄산업도 국유화되어 국가석탄공단(NCB)이 설립된다. 1947년에는 철도, 도로운송, 내륙수로가, 1948년에는 전력과 가스 산업이 차례로 국유화된다.
국유화의 목적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었다. 전쟁 중 낡은 설비와 비효율적 경영으로 드러난 기간산업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국가 주도의 계획적 발전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려는 실용적 목적이 더 강했다. 또한 독점 산업의 이익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국유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기존 소유주들에 대한 보상 문제, 경영진 선임 방식, 노동자 참여 범위 등을 놓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특히 철강산업 국유화는 보수당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1949년에야 겨우 법안이 통과되고, 실제 국유화는 1951년에 이루어진다.
석탄산업의 경우 국유화 이후 탄광 노동자들의 처우가 크게 개선되고 안전 기준이 강화된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은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않았고, 석탄에서 석유로의 에너지 전환이라는 구조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완전고용 정책과 케인즈주의 경제학
애틀리 정부의 경제 정책은 케인즈주의에 기반한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제시한 이론에 따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해 완전고용을 달성하고 경기 변동을 안정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는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을 신뢰했던 기존의 자유방임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었다.
완전고용 정책의 핵심은 총수요 관리다. 정부 지출을 늘리고 통화 정책을 완화해 경제 활동을 촉진하며,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한다. NHS와 공공주택 건설, 국유화 등의 정책들도 모두 고용 창출 효과를 고려해 설계된다.
실제로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영국의 실업률은 3% 이하로 유지되어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를 달성한다. 이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의 20%가 넘는 실업률과 비교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노동자들의 협상력이 강화되면서 임금 상승과 근로 조건 개선도 이루어진다.
하지만 완전고용 정책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키는 부작용도 가져온다. 전쟁 중 억눌렸던 소비 욕구가 분출되면서 수요가 급증하는데, 공급 능력은 전쟁으로 인해 크게 손상된 상태였다. 정부는 배급제를 연장하고 수입 통제를 강화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복지국가 건설의 사회적 영향
복지국가 건설은 영국 사회의 모든 면에 깊은 변화를 가져온다.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계급 간 격차의 축소다. 무료 의료 서비스와 교육, 공공주택 등을 통해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기본적인 삶의 질이 보장되면서 실질적인 평등이 증진된다.
여성의 지위 변화도 두드러진다. 전쟁 중 경험한 경제활동 참여가 평화 시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고,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면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이 조금씩 높아진다. 또한 NHS를 통한 산전산후 관리와 가족계획 서비스는 여성들의 건강과 삶의 질을 크게 개선시킨다.
교육 기회의 확대는 사회 이동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무상 중등교육과 장학금 제도 확대로 가난한 집안 출신도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늘어난다. 이는 장기적으로 영국 사회의 인적 자본을 향상시키고 계급 구조를 유연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복지국가 건설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들도 등장한다. 관료제의 확대로 인한 비효율성, 높은 세금 부담에 대한 불만, 개인의 자유와 책임 의식 약화 등이 지적된다. 또한 복지 혜택이 주로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전제로 설계되어 여성의 독립적 지위를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한계도 드러난다.
재정 위기와 긴축 정책
1947년 영국은 심각한 외환 위기에 직면한다.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부채와 해외 자산 매각, 그리고 복지 지출 확대로 인해 국가 재정이 크게 악화된다. 특히 미국의 전시 지원이 중단되면서 달러 부족 현상이 심각해진다.
정부는 마셜 플랜을 통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한편, 긴축 정책을 실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휴 달튼 재무장관은 예산 삭감과 증세를 통해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려 하지만, 이는 복지 확대 정책과 모순을 빚는다.
1947년 연료 위기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혹독한 추위로 인해 석탄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전력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많은 공장이 조업을 중단해야 한다. 이는 국유화된 석탄산업의 비효율성을 부각시키며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을 확산시킨다.
스태퍼드 크립스가 재무장관으로 취임한 후 더욱 강력한 긴축 정책이 시행된다. 1949년 파운드 평가절하를 단행하고, 수출 증대와 수입 억제를 통해 무역수지 개선을 도모한다. 또한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소비를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보수당의 반격과 정권 교체
복지국가 건설 초기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1950년 총선에서 노동당의 의석 수는 크게 줄어든다. 경제적 어려움과 배급제 연장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감이 누적된 결과였다. 애틀리 정부는 간신히 집권을 유지하지만 의회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다.
보수당은 처칠의 복귀와 함께 노동당 정책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전개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보수당은 복지국가 제도 자체를 폐지하겠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더 효율적인 운영과 개인의 선택권 확대를 내세우며 대안을 제시한다.
1951년 다시 실시된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애틀리 시대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때까지 구축된 복지국가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는 전후 영국 정치의 중요한 특징인 '전후 합의(Post-war Consensus)'의 시작을 의미한다.
전후 합의란 주요 정당들이 복지국가, 완전고용, 혼합경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 합의는 197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영국 정치의 안정성을 뒷받침한다.
결론
애틀리 정부의 복지국가 건설은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회 변혁 중 하나였다. 비버리지 보고서에서 제시된 비전을 바탕으로 NHS 창설, 사회보장 제도 확립, 공공주택 건설, 교육 기회 확대 등을 통해 모든 국민의 기본적 삶을 보장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제도적 개혁에 그치지 않고 영국 사회의 가치관과 정체성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국민을 책임진다는 개념은 영국인들의 사회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또한 계급 간 격차를 줄이고 사회 통합을 강화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물론 복지국가 건설 과정에서 재정 부담 증가, 관료제 확대, 경제 성장률 둔화 등의 문제점도 드러났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후 복지국가 체제는 영국 사회의 안정성과 결속력을 크게 높였다. 특히 NHS는 영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제도 중 하나가 되어 지금까지도 영국 사회의 핵심 가치로 자리잡고 있다.
애틀리 정부의 개혁은 전 세계 복지국가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이 보여준 모델은 다른 서구 국가들이 복지 제도를 확대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복지국가 논의의 출발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영국이 산업혁명에 이어 사회혁명에서도 세계의 선구자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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