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43. 7년전쟁과 제1제국의 팽창 - 세계 최초의 글로벌 전쟁과 대영제국의 탄생

SSSCH 2025. 5. 23.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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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6년부터 1763년까지 벌어진 7년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세계대전이었다. 유럽, 북미, 인도, 카리브해, 필리핀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졌고, 영국은 이 전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세계 최강의 해양 제국으로 부상한다. 특히 북미에서 프랑스를 축출하고 인도에서 패권을 확립함으로써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이 전쟁의 승리로 영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 강국이 되었고,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이어지는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 시대가 열렸다.

전쟁의 배경과 유럽의 외교 혁명

7년전쟁의 배경에는 유럽 대륙과 식민지에서의 복잡한 세력 갈등이 있었다.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 이후 프로이센이 실레지아를 차지하면서 기존 세력 균형이 깨졌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실레지아 탈환을 위해 숙적 프랑스와 손을 잡는 파격적 결단을 내린다. 이것이 바로 1756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200년간 지속된 합스부르크-부르봉 갈등이 일시 중단되는 '외교 혁명'이었다.

영국은 이런 대륙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은 영국의 전통적 대륙 정책인 '세력 균형' 전략을 무력화시킬 위험이 있었다. 더욱이 북미와 인도에서 프랑스와의 식민지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에서도 프랑스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면 영국의 전략적 입지는 크게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피트(대피트)가 주도하는 영국 정부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대륙에서는 프로이센을 지원하여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을 견제하고, 해상과 식민지에서는 영국이 직접 프랑스와 맞서는 이원적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1756년 1월 웨스트민스터 협약을 통해 프로이센과 동맹을 체결한 영국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식민지에서의 갈등도 전쟁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북미에서는 오하이오 강 유역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간의 경계 분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1754년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버지니아 민병대와 프랑스군 간의 충돌은 이미 전쟁의 전조였다. 인도에서도 영국 동인도회사와 프랑스 동인도회사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리전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윌리엄 피트의 전쟁 지도력

7년전쟁에서 영국의 승리를 이끈 핵심 인물은 윌리엄 피트(1708-1778)였다. '대피트(Pitt the Elder)'로 불리는 그는 탁월한 전략가이자 뛰어난 웅변가로, 영국을 세계 제국으로 이끈 위대한 정치가 중 한 명이다. 피트는 1757년 사실상 수상 역할을 맡으면서 전쟁 전략의 전면적 전환을 주도했다.

피트의 전략은 명확했다. 대륙에서는 프로이센에 보조금을 지원하여 프랑스 군대를 유럽에 묶어두고, 영국의 주력은 해상과 식민지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군력을 건설했다. 1755년 130척이었던 영국 해군 전함이 1760년에는 300척을 넘어섰다. 또한 식민지 전쟁에 적합한 경보병 부대를 창설하고, 현지 원주민과의 동맹을 적극 활용했다.

피트의 또 다른 혁신은 능력주의 인사였다. 신분이나 출신보다는 실력을 바탕으로 장군들을 선발했고, 젊고 유능한 지휘관들에게 과감히 중책을 맡겼다. 제임스 울프, 로버트 클라이브, 제프리 애머스트 같은 명장들이 이 시기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특히 32세의 나이에 퀘벡 공략전을 맡은 울프 장군의 발탁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재정 운용에서도 피트는 혁신적 접근을 보였다.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대규모 국채를 발행했지만, 동시에 미래의 식민지 수익으로 이를 상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이 빚을 갚을 것"이라는 그의 말은 영국 제국주의의 장기적 비전을 보여준다. 실제로 전쟁 비용은 전후 식민지 무역 증가로 충분히 회수될 수 있었다.

북미 전선과 뉴프랑스의 몰락

북미 전선은 7년전쟁의 가장 중요한 무대 중 하나였다. 프랑스령 캐나다(뉴프랑스)는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에서 오대호, 미시시피 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인구는 8만 명에 불과했다. 반면 영국 식민지는 동부 해안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인구가 150만 명에 달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가 우세했다. 몽칼름 후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휴런족, 알곤킨족 등 원주민 동맹군과 함께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755년 브래독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듀케인 요새(현재의 피츠버그) 공격에서 참패를 당한 것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전투에서 조지 워싱턴이 부관으로 참전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진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1758년부터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루이부르 요새 함락으로 세인트로렌스 강 입구가 열렸고, 1759년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울프 장군이 몽칼름 후작을 격파하며 퀘벡을 점령했다. 비록 울프와 몽칼름 모두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영국의 승리는 결정적이었다. 1760년 몬트리올이 함락되면서 뉴프랑스는 완전히 영국 손에 넘어갔다.

영국의 승리 요인은 여러 가지였다. 우선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프랑스 본국과의 보급선을 차단했다. 또한 이로쿼이족과의 동맹을 통해 프랑스의 원주민 연합을 분열시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3개 식민지의 인적, 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동원한 것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주도한 알바니 회의(1754)에서 식민지 간 협력 체계가 구축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인도 전선과 영국 동인도회사의 부상

인도 전선에서의 승리는 북미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무굴 제국이 쇠퇴하면서 인도 아대륙은 여러 토후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현지 세력과 동맹을 맺어 대리전을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는 하이데라바드의 니잠, 마이소르의 하이데르 알리와 손을 잡았고, 영국은 벵골의 나와브, 카르나틱의 나와브와 연합했다.

로버트 클라이브(1725-1774)는 인도에서 영국의 패권을 확립한 영웅적 인물이다. 원래 동인도회사의 하급 사무원이었던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 급속히 승진했다. 1751년 아르코트 공략전에서 보인 그의 용맹과 지략은 전설이 되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프랑스의 동맹군을 물리치고 50일간 포위 공격을 버틴 것은 군사사의 기적으로 평가받는다.

1757년 플라시 전투는 인도사의 전환점이었다. 벵골의 나와브 시라즈 웃 다울라가 영국 동인도회사와 갈등을 빚자, 클라이브는 3천 명의 군대로 나와브의 5만 대군에 맞섰다. 전투 자체보다는 사전 외교가 승부를 갈랐다. 클라이브는 나와브의 장군 미르 자파르를 매수하여 배신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벵골군이 내부에서 붕괴했다. 이 승리로 영국은 인도 최부유 지역인 벵골의 실질적 지배권을 확보했다.

플라시 전투의 의미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섰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의 디와니(징세권)를 획득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연간 2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벵골의 세수는 영국 동인도회사를 단순한 무역회사에서 영토 지배 세력으로 변모시켰다. 이는 영국이 세계 제국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카리브해와 유럽 전선

카리브해는 18세기 세계 경제의 핵심 지역이었다. 설탕, 커피, 담배, 인디고 등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하는 서인도제도는 '황금의 섬들'로 불렸다. 작은 바베이도스 섬 하나가 북미 13개 식민지 전체보다 영국에 더 많은 수익을 안겨줄 정도였다. 따라서 카리브해에서의 패권 확보는 영국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영국 해군은 7년전쟁 기간 동안 카리브해에서 프랑스의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1759년 과들루프, 1762년 마르티니크를 비롯해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대부분이 영국 손에 넘어갔다. 또한 1762년에는 스페인이 프랑스 편에 가담하자 쿠바의 아바나와 필리핀의 마닐라까지 점령하는 파죽지세를 보였다.

영국의 카리브해 지배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경제적 의미가 컸다.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익은 영국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리버풀, 브리스틀 등 서부 항구 도시들이 급성장한 것도 서인도제도 무역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번영 뒤에는 아프리카 노예무역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분전했다. 1757년 로스바흐 전투와 로이텐 전투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연파한 프리드리히는 '북방의 알렉산더'라는 찬사를 받았다. 영국의 보조금 지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연간 67만 파운드에 달하는 영국의 군사 원조는 프로이센이 삼면 포위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해군력의 우위와 해상 패권 확립

7년전쟁에서 영국 승리의 핵심은 압도적인 해군력이었다. 영국은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함대를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완전히 격파했다. 1759년 키베론만 해전에서 에드워드 호크 제독이 프랑스 대서양 함대를 궤멸시킨 것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승리로 프랑스의 영국 본토 침공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영국 해군의 우위는 단순한 전함 수의 차이를 넘어섰다. 우선 조선 기술에서 앞서 있었다. 영국의 전함들은 프랑스 전함보다 내구성이 뛰어났고, 화력도 강했다. 또한 해군 교육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있어 우수한 장교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할 수 있었다. 그린위치 왕립해군대학의 역할이 특히 중요했다.

보급 체계의 우수성도 영국 해군의 강점이었다. 전 세계에 분산된 해군 기지들 간의 연결망이 잘 구축되어 있어 장거리 작전이 가능했다. 지브롤터, 마혼(미노르카), 포트로열(자메이카) 등의 전략 기지들은 영국 해군이 지중해, 대서양, 카리브해를 동시에 장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영국의 해상 패권은 경제적 우위로 이어졌다. 프랑스 상선들이 영국 사략선(privateers)에 의해 대거 나포되면서 프랑스의 해외 무역은 크게 위축되었다. 반면 영국 상선들은 해군의 보호 하에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었다. 이는 전쟁 중에도 영국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파리 조약과 제1제국의 완성

1763년 2월 10일 체결된 파리 조약은 7년전쟁을 종료시키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확립했다. 이 조약으로 영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을 보면 영국의 압도적 승리가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북미에서 영국은 캐나다 전체와 미시시피 강 동쪽의 모든 프랑스 영토를 획득했다. 루이지애나는 스페인에 양도되었지만, 이는 프랑스가 더 이상 북미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영국은 또한 플로리다를 스페인으로부터 획득하여 북미 동부 해안 전체를 장악했다. 이로써 13개 식민지의 서진 확장에 더 이상 프랑스의 장애가 없어졌다.

서인도제도에서는 영국이 대부분의 정복지를 프랑스에 반환했다. 하지만 이는 관대함이 아니라 계산된 선택이었다. 설탕 플랜테이션의 과잉 생산을 막아 기존 영국령 설탕 섬들의 수익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신 영국은 세네갈, 도미니카, 토바고, 그레나다 등 전략적 요충지들은 확보했다.

인도에서는 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영향력이 거의 완전히 제거되었다. 프랑스는 퐁디셰리, 샹데르나고르 등 몇 개의 상업 거점만 유지할 수 있었고, 군사 시설은 모두 철거해야 했다. 이로써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 아대륙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다.

조약 체결 과정에서 영국 내부에는 논란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프랑스에 너무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과들루프를 반환한 것에 대해서는 "캐나다보다 설탕 한 섬이 더 가치 있다"는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윌리엄 피트와 얼 오브 뷰트 등 정책 결정자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제국 운영 체제의 정비

7년전쟁의 승리로 영국은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였다. 특히 프랑스계 가톨릭 주민들이 다수인 캐나다와 복잡한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을 가진 인도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캐나다에서는 1763년 왕실 선언(Royal Proclamation)을 통해 기본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퀘벡에 영국식 법률과 제도를 도입하되, 프랑스계 주민들의 종교적 자유는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운영 과정에서는 많은 갈등이 발생했다. 가톨릭 주민들이 공직에서 배제되는 문제, 프랑스 민법과 영국 관습법의 충돌 등이 대표적이었다.

인도에서는 더욱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 비하르, 오리사의 디와니(징세권)를 확보했지만, 이는 무굴 황제로부터 공식적으로 위임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무굴 제국의 일부였고, 영국은 간접 통치 방식을 채택해야 했다. 클라이브는 '이중 통치(Dual Government)' 시스템을 도입하여 현지 나와브는 명목상 통치자로 남겨두고 실권은 영국이 장악하는 방식을 택했다.

본국에서는 새로운 제국을 관리하기 위한 행정 체계를 정비했다. 1768년 식민부(Colonial Office)가 설치되어 북미와 서인도제도 식민지를 전담하게 되었다. 인도 문제는 여전히 동인도회사가 관할했지만, 의회의 감독이 강화되었다. 1773년 규제법(Regulating Act)과 1784년 인도법(India Act)을 통해 점진적으로 정부 통제가 확대되었다.

전쟁의 경제적 영향과 산업 발전

7년전쟁은 영국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 비용으로 국가 부채가 1억 3천만 파운드까지 급증했지만, 전후 식민지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 수요가 영국 제조업 발전을 크게 촉진했다는 점이다.

군수 산업의 발달이 특히 두드러졌다. 철강 생산량이 급증했고, 조선업도 크게 성장했다.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철광산 개발이 본격화된 것도 이 시기였다. 또한 대포, 총기, 화약 등 무기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정밀 기계 공업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는 훗날 산업혁명의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면직물 산업도 큰 혜택을 입었다. 인도에서 얻은 면화 원료와 서인도제도 시장의 확대로 맨체스터, 리버풀 지역의 면직물 공업이 급성장했다. 특히 인도산 면직물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와 함께 영국산 면직물의 수출이 크게 늘어났다. 이는 18세기 후반 방직기계 발명과 공장제 수공업 발달의 배경이 되었다.

금융업의 발전도 주목할 만하다. 전쟁 국채 발행과 식민지 무역 자금 조달을 위해 런던의 금융 시장이 크게 확대되었다. 영란은행의 역할이 강화되었고, 상업은행들도 늘어났다. 또한 해상보험업이 발달하여 로이드 보험시장이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금융 인프라의 발달은 영국이 19세기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사회 변화와 제국 의식의 형성

7년전쟁의 승리는 영국 사회에 깊은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대영제국(British Empire)'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감이 크게 높아졌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 최강국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는 영국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종교적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가톨릭 프랑스에 대한 승리는 개신교 영국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화되었고, 이는 훗날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종교적 기반이 되었다. 감리교와 침례교 등 복음주의 교파의 성장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성공으로 인한 사회 계층 변화도 뚜렷했다. 해외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 계급이 기존 지주 귀족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서인도제도 플랜테이션 소유주들, 인도 무역으로 부를 쌓은 '나밥(Nabob)' 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의회 의석을 구매하고 귀족 작위를 얻으면서 기존 지배층에 편입되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제국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이 자유무역 이론을 체계화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에드먼드 버크는 제국 통치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했고, 제러미 벤담은 공리주의 관점에서 식민지 정책을 비판했다. 이런 지적 토론들은 훗날 영국 제국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제국의 영향이 나타났다. 동양적 취향인 '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인도풍 건축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게인즈버러와 조슈아 레이놀즈 같은 화가들은 제국의 영웅들을 주제로 한 대형 회화 작품을 제작했다. 문학에서도 동방 모험담과 이국적 소재가 인기를 끌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갈등 조짐

7년전쟁의 승리는 역설적으로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인들은 영국군과 함께 싸우면서 자신들도 동등한 영국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전후 영국 정부가 식민지에 대한 통제와 과세를 강화하려 하자 심각한 반발이 일어났다.

가장 큰 문제는 전쟁 비용 분담이었다. 영국 정부는 7년전쟁으로 누적된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더 많은 세수를 확보해야 한다고 보았다. 조지 그렌빌 수상은 "아메리카를 위한 전쟁이었으니 아메리카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64년 설탕법(Sugar Act)과 1765년 인지법(Stamp Act)은 이런 정책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식민지 서부 개척 문제도 갈등 요소였다. 1763년 왕실 선언은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지역에 대한 개척을 금지했다. 이는 원주민과의 갈등을 방지하고 모피 무역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서부 확장을 꿈꾸던 식민지인들에게는 큰 실망이었다. 버지니아의 대농장주들과 펜실베이니아의 투기업자들이 특히 강하게 반발했다.

군사적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상비군을 주둔시켜 안보를 담당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식민지인들은 이를 자신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데 왜 영국군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런 갈등들은 1775년 렉싱턴-콩코드 전투와 아메리카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7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축출하고 북미 패권을 확립한 영국이 20년도 안 되어 가장 중요한 식민지를 잃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인도 정책과 동인도회사의 변화

인도에서의 승리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전례 없는 기회와 동시에 새로운 책임을 가져다주었다. 벵골의 디와니 권한 획득으로 연간 200만 파운드가 넘는 세수입이 확보되었지만, 8천만 명에 달하는 인도인을 통치해야 하는 부담도 생겼다.

로버트 클라이브는 1765년 벵골 총독으로 부임하여 행정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무굴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디와니 권한을 위임받고, 이중 통치 시스템을 정비했다. 나와브는 치안과 사법을 담당하고, 영국 동인도회사는 징세와 군사를 맡는 분업 체계였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1770년 벵골 대기근이었다. 몬순 실패로 인한 자연재해였지만, 영국 동인도회사의 과도한 세금 징수가 피해를 악화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천만 명이 목숨을 잃은 이 참사는 영국 내에서도 큰 충격을 주었다.

동인도회사 직원들의 부패도 심각한 문제였다. 개인적 무역을 통해 거액을 벌어들이는 '나밥들'이 늘어나면서 공적 업무가 소홀해졌다. 클라이브 자신도 플라시 전투 후 미르 자파르로부터 받은 23만 파운드의 선물 때문에 의회에서 조사를 받았다. 1772년 그는 "이런 기회에서 나는 내 자신의 절제에 놀란다"고 변론했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본국에서는 동인도회사에 대한 통제 강화 논의가 시작되었다. 1773년 규제법은 벵골 총독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법원을 설치하여 사법 체계를 정비했다. 또한 동인도회사의 정치적 활동을 제한하고 이사회 구성에 정부가 개입할 수 있게 했다. 이는 동인도회사가 순수한 상업 회사에서 정부 통제 하의 식민지 행정 기구로 변화하는 시작점이었다.

국제 관계의 재편과 고립 외교

7년전쟁의 결과로 유럽의 국제 관계도 크게 변했다. 영국의 압도적 승리로 기존의 세력 균형이 깨졌고, 다른 유럽 강국들은 영국의 패권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동맹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국으로 하여금 '고립 외교(Splendid Isolation)' 정책을 택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프랑스는 7년전쟁의 패배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778년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스페인 역시 지브롤터와 플로리다 탈환을 위해 반영 연합에 가담했다. 이들은 '가족 협약(Family Compact)'을 통해 부르봉 왕가 간의 연대를 강화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도 7년전쟁 이후 관계가 복잡해졌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실레지아를 확고히 차지했지만,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전히 탈환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러시아의 부상을 견제해야 하는 공통 과제를 안고 있었다. 캐서린 2세가 이끄는 러시아는 흑해와 발칸반도로 진출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런 복잡한 유럽 정세에서 적극적 개입을 피하고 해상 패권을 바탕으로 한 '균형자' 역할을 선택했다. 1760년 즉위한 조지 3세는 "영국인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하노버보다는 영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다. 이는 조지 1세, 2세 시대의 대륙 개입 정책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과학 기술 발전과 항해술 혁신

7년전쟁 승리의 배경에는 영국의 뛰어난 과학 기술이 있었다. 특히 항해술과 조선 기술의 발전은 영국이 세계 해양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과학 혁명이 군사적 우위로 이어진 것이다.

경도 측정 문제의 해결이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1761년 존 해리슨이 제작한 H4 크로노미터는 해상에서도 정확한 시간을 유지할 수 있어 경도 측정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항해의 정확성을 혁명적으로 향상시켰고, 영국 함대가 전 세계 바다를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경도 위원회가 해리슨에게 2만 파운드의 상금을 지급한 것은 이 발명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조선 기술에서도 혁신이 있었다. 구리 피복(copper sheathing) 기술의 도입으로 전함의 내구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선체를 구리판으로 감싸면 좀벌레와 따개비 같은 해양 생물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고, 선박의 수명과 항해 속도가 모두 개선되었다. 또한 캐로네이드(carronade)라는 새로운 단거리 대포가 개발되어 근접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

지도 제작 기술의 발전도 주목할 만하다. 제임스 쿡 선장의 태평양 탐험(1768-1779)으로 정확한 세계 지도가 완성되기 시작했다. 쿡의 항해는 7년전쟁 직후에 시작된 것으로, 영국의 해양 패권을 과학적 탐험으로 확장하는 의미가 있었다. 또한 천문학과 항해술의 결합으로 정확한 위치 측정이 가능해졌다.

의학 분야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제임스 린드가 괴혈병 예방법을 발견한 것은 장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발견이었다. 신선한 감귤류를 섭취하면 괴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그의 연구 결과는 영국 해군의 전투력 향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결론

7년전쟁은 영국을 지역 강국에서 세계 제국으로 변모시킨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북미에서 프랑스를 축출하고 인도에서 패권을 확립함으로써 영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윌리엄 피트의 탁월한 전략과 로버트 클라이브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 그리고 영국 해군의 압도적 우위가 결합되어 이룬 성과였다.

이 전쟁의 승리로 영국은 '제1제국'을 완성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북미-서인도제도 연결망과 인도양을 장악하는 인도 식민지가 영국 경제 발전의 양대 축이 되었다. 이는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산업혁명의 물적 토대를 제공했고, 19세기 '팍스 브리타니카' 시대를 여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승리의 이면에는 새로운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갈등, 인도 통치의 복잡성, 그리고 유럽에서의 고립 등은 영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특히 제국 운영에 따른 막대한 비용과 도덕적 책임은 영국 사회에 지속적인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전쟁은 영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중대한 사건으로, 근대 세계 체제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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