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27. 조앤 오브 아크와 백년전쟁의 전세 역전

SSSCH 2025. 5. 22.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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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위기와 조앤의 등장

아지노쿠르 전투 이후, 프랑스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1420년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사위가 되었고, 왕위 계승권을 얻었다. 그러나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됐다. 영국에선 9개월 된 헨리 6세가 왕위에 올랐고, 그의 삼촌 베드포드 공작이 프랑스 영토를 통치했다. 프랑스 왕가의 정통 후계자 샤를 7세(당시 왕세자)는 남부 지방으로 쫓겨나 '부르주의 왕'이라 조롱받았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1429년, 한 시골 소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롬레미 마을 출신의 17세 소녀 조앤은 하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며 샤를에게 접견을 요청했다. 그녀는 오를레앙을 영국군 포위로부터 구하고 샤를을 랭스에서 정식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처음엔 의심받았지만, 조앤은 마침내 샤를의 접견을 얻어냈고,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오를레앙 해방과 기적의 시작

1429년 4월, 조앤은 기사의 갑옷을 입고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이 도시는 7개월째 영국군에 포위된 상태였고, 함락될 경우 프랑스 중부와 남부 지역이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조앤의 등장은 지친 프랑스군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하늘의 보낸 처녀"라는 소문과 함께 병사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존재가 됐다.

5월 4일 조앤은 대담한 공격 작전을 주도했다. 그녀는 영국군 요새를 향해 직접 돌격했고, 전투 중 화살에 어깨를 맞았지만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이틀 후 프랑스군은 결정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5월 8일 영국군은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오를레앙의 처녀" 조앤은 하룻밤 사이에 프랑스의 영웅이 됐다.

오를레앙 해방 후, 조앤은 신속히 루아르 계곡의 다른 영국 거점들을 공격했다. 6월 18일 파테 전투에서 영국군을 대파한 후, 그녀는 샤를을 랭스로 안내했다. 7월 17일, 샤를 7세는 랭스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프랑스 왕으로 대관됐다. 조앤이 예언한 두 가지 목표가 모두 실현된 것이다.

민족의식의 각성과 프랑스의 결집

조앤의 성공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프랑스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백년전쟁은 그동안 왕가 간의 분쟁이자 귀족들의 싸움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조앤을 통해 이 전쟁은 프랑스인들의 영토와 정체성을 지키는 민족적 투쟁으로 변모했다. 그녀는 "랑글레" (영국인)을 프랑스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는 오늘날 민족주의에 가까운 의식을 담고 있었다.

평민 출신 소녀가 귀족 남성 장군들 앞에서 지휘권을 행사한 것도 전례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 귀족들은 그녀를 시기했지만, 일반 병사들과 민중은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특히 농민과 도시 상인층은 조앤에게서 자신들의 대표자를 보았다. 무엇보다 조앤은 프랑스인들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아주었다.

샤를 7세 역시 조앤의 인기에 힘입어 정통성을 확보했다. 그는 점차 프랑스 전역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버건디 공국과의 화해도 모색했다. 과거 내전에서 영국 편에 섰던 버건디가 다시 프랑스 편으로 돌아선 것은 전쟁의 판도를 뒤바꾸는 중요한 변화였다.

조앤의 몰락과 순교

대관식 이후, 조앤은 파리 공격을 주장했지만 샤를은 망설였다. 9월 파리 근교 공격에서 조앤은 다시 부상을 입었고,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그녀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됐다. 1430년 5월, 콩피에뉴 방어 작전 중 조앤은 버건디군에 포로로 잡혔다. 버건디 공작은 그녀를 영국군에 넘겼고, 영국은 그녀를 루앙으로 이송해 재판에 회부했다.

루앙에서 열린 종교재판에서 조앤은 이단, 마녀, 남장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영국은 그녀를 처형함으로써 그녀의 전과와 샤를 7세의 정통성을 무효화하려 했다. 재판은 정치적 목적이 뚜렷했고, 불공정했다. 1431년 5월 30일, 21세의 조앤은 루앙 광장에서 화형당했다. 그녀의 마지막 외침은 "예수, 예수"였다고 전해진다.

조앤의 죽음은 프랑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녀의 유산은 더욱 강화됐다. 그녀는 영국에 대항하는 프랑스 저항의 상징이 됐고, 순교자로 숭배됐다. 1456년 샤를 7세의 요청으로 열린 복권 재판에서 그녀는 모든 혐의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1920년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녀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전쟁의 종말과 영국의 패배

조앤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가 시작한 프랑스의 반격은 계속됐다.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버건디가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선언했다. 1436년 파리가 탈환됐고, 샤를 7세는 군대와 행정을 개혁했다. 특히 그는 유럽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해 군사력을 강화했다.

1440년대 말, 프랑스는 노르망디 탈환에 나섰다. 1449년부터 1450년까지의 작전으로 노르망디 전체가 해방됐고, 1451년엔 가스코뉴도 대부분 수복됐다. 잠시 반격한 영국군은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이 전투는 백년전쟁의 실질적 종전으로 간주된다.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은 프랑스 본토에서 칼레만을 보유했고, 그마저도 1558년에 상실했다. 영국의 패배는 여러 요인에 기인했다. 조앤의 등장으로 프랑스인들의 사기가 높아졌고, 샤를 7세의 개혁으로 군사력이 강화됐다. 반면 영국은 헨리 6세의 약한 리더십과, 이어진 장미전쟁으로 국력이 소진됐다. 결정적으로 영국은 프랑스보다 인구와 자원이 훨씬 적었기에, 장기전에서 불리했다.

조앤의 유산과 역사적 의미

조앤 오브 아크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로 남았다. 그녀는 단기간에 백년전쟁의 흐름을 뒤바꿨고, 프랑스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이야기는 수세기 동안 문학, 예술,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감의 원천이 됐다.

역사학적으로 그녀의 경험은 중세 후기 유럽 사회의 여러 측면을 보여준다. 평민 여성이 전쟁과 정치에 개입한 것은 당시 사회 규범에 대한 도전이었다. 종교적 비전을 통한 그녀의 권위는 중세인들의 신앙관을 반영하는 동시에, 교회 지도부의 권력 남용도 드러냈다.

영국 역사에서 조앤은 불편한 존재다. 그녀로 인해 영국은 프랑스 본토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는 영국이 섬나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해양 제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됐다. 프랑스 대륙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영국은 이후 해외 식민지와 무역에 집중하게 됐다.

결론

조앤 오브 아크의 등장과 프랑스의 반격은 백년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꿨다. 단 몇 년 만에 거의 패배 직전이던 프랑스는 승리의 길로 들어섰고, 결국 영국을 프랑스 본토에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더욱 통합된 국가로 발전했고, 초기 민족의식이 생겨났다.

조앤 자신은 비극적 죽음을 맞았지만, 그녀의 유산은 프랑스 역사와 정체성 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녀는 오늘날까지도 불의에 맞서 싸운 용기, 애국심, 그리고 신념의 상징으로 추앙받는다. 백년전쟁에서 영국의 패배는 표면적으론 큰 손실이었지만, 장기적으론 영국이 해양 강국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조앤의 이야기는 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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