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25. 백년전쟁 서막과 크레시 전투 - 왕위 분쟁에서 시작된 오랜 갈등

SSSCH 2025. 5. 22. 00:05
반응형

백년전쟁의 기원과 복잡한 원인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간 지속된 백년전쟁은 중세 유럽사에서 가장 길고 복잡한 갈등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두 국가 간의 충돌이 아니라, 왕위 계승권, 봉건적 충성 관계, 영토 분쟁, 무역 이익 다툼 등 여러 요소가 얽힌 다층적 갈등이었다.

가장 표면적인 원인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였다. 1328년 프랑스의 카페 왕조 마지막 왕인 샤를 4세가 직계 남자 후손 없이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 이자벨(샤를 4세의 누이)을 통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들은 '살리카 법'을 들어 여계를 통한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대신 발루아 가문의 필립 6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두 번째 원인은 가스코뉴(기엔) 지역을 둘러싼 봉건적 관계 문제였다. 프랑스 남서부 지역인 가스코뉴는 영국 왕의 영토였지만, 동시에 프랑스 왕의 봉토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 가스코뉴 공작이라는 이중적 지위에 있었고, 이는 두 왕국 간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특히 필립 6세가 반복적으로 가스코뉴에 대한 영국의 권리를 간섭하자, 에드워드는 이에 반발했다.

세 번째 원인은 플랑드르를 둘러싼 경제적 이해관계였다. 플랑드르(현 벨기에 일부)는 당시 영국산 양모의 최대 수입국으로, 영국 경제에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플랑드르는 형식상 프랑스 왕의 봉토였고, 프랑스는 이를 이용해 영국 무역을 방해했다.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 도시들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영향력에 대항했다.

마지막으로, 스코틀랜드 문제도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스코틀랜드와 '오랜 동맹'(Auld Alliance)을 맺고 있었고, 이는 영국을 견제하는 수단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 문제에 프랑스가 개입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러한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1337년 필립 6세가 가스코뉴 영지를 몰수하자 에드워드 3세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의 초기 단계와 슬뤼스 해전

백년전쟁 초기에 에드워드 3세는 적극적인 외교와 동맹 구축에 나섰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 플랑드르 도시들, 브라반트 공작 등과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1339년 캄브레시스 지역 원정은 큰 성과 없이 끝났다. 동맹국들의 불화와 재정 부족으로 에드워드는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백년전쟁 초기의 결정적 승리는 해상에서 왔다. 1340년 6월 24일, 에드워드 3세가 지휘한 영국 함대는 플랑드르 해안 슬뤼스에서 프랑스 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은 활과 석궁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했고, 프랑스 함대는 거의 전멸했다.

슬뤼스 해전의 승리로 영국은 영불해협의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는 이후 프랑스 본토 원정의 기반이 되었고, 에드워드의 위신을 크게 높였다. 해전 이후 그는 자신을 '영국과 프랑스의 왕'으로 공식 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상 승리에도 불구하고 육상에서의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토르네와 생토메르 전투에서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1343년 양측은 잠정적 휴전인 말레스투아 조약을 체결하며 잠시 전쟁을 중단했다.

브르타뉴 계승 전쟁과 전략의 변화

휴전기 동안에도 두 나라의 대리전은 계속되었다. 가장 중요한 무대는 브르타뉴였다. 1341년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이복누이 잔 드 팡티에브르(프랑스 지지)와 이복동생 장 드 몽포르(영국 지지) 사이에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이 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자신들의 지지자를 내세운 대리전 양상으로 발전했다. 1342년 모르레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했지만, 브르타뉴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결국 이 지역은 분할되어 양측의 영향력이 공존하게 되었다.

브르타뉴 경험은 에드워드 3세의 전략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동맹국들과의 대규모 원정보다, 직접 지휘하는 영국군 중심의 집중적인 원정이 더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또한 전면전보다는 '기마 원정'(chevauchée)이라는 전술에 주목했다. 이는 적 영토를 신속히 종횡무진하며 약탈하고 파괴하는 전술로, 적의 경제력과 사기를 무너뜨리는 효과가 있었다.

1345년 휴전이 공식적으로 끝나자, 에드워드는 세 방향에서 프랑스를 공격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의 사촌 헨리 랭커스터는 가스코뉴에서, 아들 에드워드(흑태자)는 노르망디에서, 그리고 에드워드 자신은 플랑드르에서 각각 작전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 세 방향 공격은 프랑스의 방어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크레시 전투와 영국의 결정적 승리

1346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원래 계획과 달리 노르망디 생발레리앙픽에 상륙했다. 약 1만 여명의 군대를 이끈 그는 노르망디를 가로질러 파리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은 마주치는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며 광범위한 파괴를 일으켰다. 이는 프랑스 왕권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현지 주민들의 사기를 꺾는 효과가 있었다.

필립 6세는 대규모 군대를 모아 영국군을 추격했다. 수적 열세에 처한 에드워드는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플랑드르로 후퇴하려 했으나, 결국 솜 강 포드를 건너 크레시 마을 근처에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프랑스군을 기다렸다.

1346년 8월 26일, 양국 군대는 크레시에서 격돌했다. 영국군은 약 1만 명(대부분 장궁수)이었던 반면, 프랑스군은 2만에서 3만 명(주로 기사와 석궁수)으로 추산된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군대를 완만한 언덕 위에 세 부대로 배치했다. 16세의 흑태자가 이끄는 전방 부대, 노섬벌랜드 백작 부대, 그리고 에드워드 자신이 지휘하는 예비대가 그것이다.

무엇보다 영국의 가장 큰 강점은 장궁(longbow)이었다. 이 강력한 무기는 석궁보다 발사 속도가 3배 이상 빨랐고, 200m 이상의 사거리와 기사의 갑옷을 뚫는 관통력을 가졌다. 영국은 약 7,000명의 숙련된 장궁수를 배치했다.

전투는 프랑스 제노바 용병 석궁수들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날의 행군으로 지쳐 있었고,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현이 느슨해진 석궁의 사거리와 정확도도 떨어졌다. 반면 영국 장궁수들은 정상 상태의 무기로 대응사격을 가했고, 석궁수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참패를 당한 석궁수들이 후퇴하자, 프랑스 기사들은 자신들의 용병이 도망친다고 생각하고 분노했다. 알랑송 백작이 이끄는 제1진 기사들은 질서 없이 영국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이들은 진흙투성이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영국 장궁수들의 집중 사격을 받았고, 많은 기사와 말이 쓰러졌다.

그럼에도 일부 기사들은 영국 보병선까지 도달했고, 흑태자가 위험에 처한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단단한 방어선과 조직적인 전투 대형은 무너지지 않았다. 흑태자의 부관이 지원을 요청했지만, 에드워드 3세는 "내 아들이 오늘 자신의 박차를 얻게 하라"며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제2진, 제3진도 차례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무질서한 돌격은 장궁수들의 집중 사격과 영국 보병의 단단한 방어에 번번이 좌절되었다. 해가 질 무렵, 프랑스 왕 필립 6세는 전장에서 도주했고, 프랑스군은 와해되었다.

크레시 전투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프랑스는 1,500명 이상의 기사와 귀족, 수천 명의 보병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에는 보헤미아의 장님 왕 요한, 알랑송 백작, 플랑드르 백작 등 유럽 각국의 중요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반면 영국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적어, 약 300명 정도로 추산된다.

크레시 이후: 칼레 포위와 전쟁의 확산

크레시에서의 승리 후, 에드워드 3세는 칼레 항구를 포위했다. 칼레는 해협에서 가장 좁은 지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1346년 9월부터 1347년 8월까지 11개월간의 포위 끝에 칼레는 항복했다. 에드워드는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처음에는 도시의 주요 시민들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으나, 왕비 필리파의 중재로 그들을 사면했다.

칼레의 함락은 영국에게 중요한 전략적 거점을 제공했다. 이곳은 향후 200년 이상 영국의 손에 남았고, 프랑스 본토 원정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또한 칼레는 영국 상인들을 위한 무역 중심지가 되었고, 영국 양모의 대륙 수출 허브로 발전했다.

크레시 전투와 칼레 점령 이후 1348년부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전쟁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양국 모두 인구의 1/3 이상을 잃으면서 지속적인 전투를 벌일 여력이 없었다. 1356년에 이르러서야 에드워드의 아들 흑태자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생포하는 또 다른 대승을 거두었다.

백년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며 여러 번의 휴전과 재개를 반복했다. 영국은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가스코뉴에 대한 완전한 주권과 칼레를 포함한 여러 영토를 획득했지만,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은 포기했다. 그러나 이 조약도 오래가지 못했고, 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크레시 전투의 군사적, 사회적 의미

크레시 전투는 단순한 승패를 넘어 중세 유럽의 군사와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가장 두드러진 영향은 기사 중심 전투 방식의 쇠퇴였다. 중세 기사도의 상징이었던 중갑 기병이 보병, 특히 장궁수에게 대패한 것은 유럽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이는 귀족 기사 계층의 군사적 지위 하락을 의미했다.

둘째, 이 전투는 영국의 독특한 장궁 중심 전술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에드워드 3세와 그의 아들 흑태자는 장궁수와 기병, 보병의 조합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방어적 위치에서 장궁의 화력으로 적의 공격을 분쇄하는 전술은 이후 영국군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셋째, 크레시는 직업 군인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영국의 장궁수들은 대부분 직업 군인으로, 오랜 훈련으로 숙련된 전문가들이었다. 반면 프랑스의 봉건적 징집군은 훈련과 규율이 부족했다. 이는 점차 직업 군대가 봉건적 군사 체계를 대체하는 흐름을 강화했다.

마지막으로, 크레시 승리는 영국 내에서 국가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강화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강대국을 물리친 승리는 영국인들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특히 영국의 장궁수들은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이는 계급을 초월한 국가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백년전쟁과 국가 정체성의 형성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시작된 전쟁은 결과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별개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백년전쟁 이전까지 영국 귀족들은 노르만 정복의 유산으로 프랑스와 깊은 문화적, 언어적 연결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귀족들이 프랑스에 영지를 갖고 있었고, 궁정에서는 노르만 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영국 귀족들은 프랑스 영지를 상실했고, 영국 내 정체성이 강화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이러한 변화를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영국적 정체성을 강조했다. 1362년에는 법정 언어가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공식 변경되었고, 문학에서도 초서와 같은 작가들이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은 또한 양국의 정치 구조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는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의회가 자주 소집되었고, 이는 의회의 권한과 역할 확대로 이어졌다. 프랑스에서는 반대로 전쟁 위기 속에서 군주권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사회적으로도 전쟁은 양국에 다른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승리로 인한 자신감과 국가적 통합을 경험한 반면, 프랑스는 계속된 패배와 점령으로 인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는 프랑스에서 민족 의식 각성의 계기가 되었고, 특히 잔 다르크의 등장은 프랑스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결론

백년전쟁의 서막과 크레시 전투는 중세 유럽의 군사적, 정치적 판도를 크게 변화시킨 사건이었다.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분쟁에서 시작된 이 갈등은 점차 두 왕국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근대 국가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를 가져왔다.

크레시 전투에서 보여준 영국의 군사적 혁신은 중세 기사 문화의 변화를 상징했다. 장궁수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전술적 우위는 기사 중심의 봉건적 전투 방식에 도전했고, 보다 전문화된 군사 체계의 우위를 보여주었다.

또한 백년전쟁은 양국에서 국가적 정체성 형성을 촉진했다. 영국에서는 프랑스와의 문화적 연결이 약화되고 영어와 영국적 관습이 강화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외부 위협에 대한 공동 저항이 민족의식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동을 반영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크레시에서의 결정적 승리는 영국에게 일시적 우위를 가져다주었지만, 전쟁은 앞으로도 수십 년간 계속되며 유럽의 역사 지형을 재편하게 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