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5세와 그의 야망
1413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헨리 5세는 선왕들과는 다른 강력한 지도자였다. 젊고 야심찬 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오랜 주장을 되살리며 백년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어릴 적부터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헨리는 웨일스 반란을 진압하며 군사적 재능을 입증했고, 즉위 직후부터 프랑스 원정을 준비했다. 당시 프랑스는 샤를 6세의 정신질환과 왕족 간 분쟁으로 혼란에 빠져있었고, 이는 헨리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헨리는 외교적으로도 치밀했다. 1414년 프랑스에 노르망디 공국과 아키텐 지방의 반환을 요구했고, 이 요구가 거부되자 곧바로 군사 동원령을 내렸다. 그는 부르고뉴 공과도 비밀 동맹을 맺어 프랑스 내부 분열을 활용했다. 이러한 외교적·정치적 준비는 이후 전쟁에서 잉글랜드의 승리에 중요한 밑바탕이 됐다.
1415년 원정군의 출정과 하플뢰르 점령
1415년 8월, 헨리 5세는 약 1만 2천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세느강 하구의 항구도시 하플뢰르를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최신식 대포와 공성 무기를 대거 동원해 5주간의 포위 끝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승리의 대가는 컸다. 전염병과 이질로 원정군의 거의 절반이 사망하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됐고, 헨리는 귀국하느냐 전진하느냐는 어려운 결정에 직면했다.
결국 헨리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남은 병력을 이끌고 칼레까지 행군하여 잉글랜드로 귀환하는 경로를 택한 것이다. 이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프랑스군이 곳곳에서 잉글랜드군의 행진을 방해했고, 소름강을 건너는 길을 차단했다. 식량과 물자는 부족했고, 병사들은 지쳐갔다. 프랑스 귀족들은 이미 더 큰 군대를 모아 잉글랜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아지노쿠르 전투의 전개
1415년 10월 25일 성 크리스핀의 날, 두 군대는 아지노쿠르 마을 근처에서 마주쳤다. 프랑스군은 약 2만에서 3만 명으로 잉글랜드군의 두 배 이상이었다. 프랑스 기사들은 중장갑과 화려한 문장을 갖추고 있었고, 승리를 확신했다. 반면 잉글랜드군은 약 6천 명의 장궁수와 약 1천 명의 기사와 보병으로 구성됐다. 병사들은 피로하고 굶주렸지만, 생존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헨리는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다. 양쪽이 삼림으로 좁아진 들판에 진을 치고, 앞에는 나무말뚝을 박아 프랑스 기병의 돌격을 막을 수 있게 했다. 장궁수들은 V자 형태로 배치되어 적의 공격에 최대한 많은 화살을 쏠 수 있게 했다. 각 장궁수는 약 24개의 화살을 갖고 있었으며, 숙련된 사수는 분당 10~12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기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진흙 같은 땅을 걸어 전진했다. 잉글랜드 장궁수들은 사정거리에 들어온 프랑스군을 향해 '화살비'를 퍼부었다. 강력한 웨일스산 장궁에서 발사된 화살은 100야드 이상 거리에서도 갑옷을 뚫을 수 있었다. 프랑스 기병대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어진 보병 공격도 효과가 없었다.
장궁의 위력과 전술적 우위
장궁은 이 전투에서 결정적 무기였다. 당시 영국의 장궁은 길이가 약 1.8m에 달하는 강력한 무기로, 잡아당기는 힘만 50kg 이상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장궁수가 되기 위해선 어릴 때부터 훈련이 필요했고, 영국에선 일요일마다 의무적으로 장궁 훈련을 하는 법령까지 있었다.
장궁의 사거리는 최대 350m에 달했고, 숙련된 사수는 1분에 10발 이상 쏠 수 있었다. 특히 "보디킨" 화살촉은 근거리에서 기사의 갑옷을 뚫을 정도로 강력했다. 반면 당시 크로스보우는 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려 분당 2발 정도만 발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화력 차이가 수적 열세를 뒤집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헨리 5세의 천재적인 점은 이 장궁수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고 보호한 전술이었다. 그는 장궁수들 앞에 뾰족한 나무말뚝을 심어 기병의 돌격을 막았고, V자 형태로 배치해 더 넓은 각도에서 화살을 쏠 수 있게 했다. 또한 장궁수와 중장갑 보병을 함께 배치해 상호 보완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도록 했다.
프랑스군의 대실패와 전투의 결과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좁은 전장에 너무 많은 병력이 밀집해 있어 효과적으로 기동할 수 없었고, 진흙 땅에 갑옷 입은 기사들이 쓰러지자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약 6천 명의 프랑스 병사가 전사했고, 그중에는 프랑스의 고위 귀족 수십 명이 포함됐다. 반면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불과 600명 정도였다.
전투 중 한 순간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진영 뒤편의 짐꾼들을 공격하자, 헨리는 포로 살해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논란이 되는 결정은 후방 위협에 대한 대응이었지만, 당시에도 기사도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 이후 헨리는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세익스피어가 후에 『헨리 5세』라는 역사극에서 이 승리를 불멸화했다.
아지노쿠르 이후의 영향
아지노쿠르 승리 이후, 헨리 5세는 1417년 더 큰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1419년에는 루앙을 함락시켜 노르망디 전체를 장악했다. 1420년에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해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 캐서린과 결혼하고, 샤를 6세 사후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기로 약속받았다.
그러나 헨리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1422년 갑작스러운 이질로 사망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겨우 35세였다. 아들 헨리 6세는 생후 9개월에 두 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어린 왕을 위해 통치하는 섭정들은 헨리 5세의 업적을 지켜내지 못했다.
장기적으로 아지노쿠르 전투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이 전투는 중세 기사 문화의 쇠퇴를 상징했다. 고귀한 기사들이 평민 장궁수들에게 패배한 것은 봉건 질서에 충격을 가했다. 또한 이 전투는 영국인들의 국가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세인트 크리스핀의 날 연설"로 알려진 헨리의 격려 연설(실제로는 세익스피어가 극적 효과를 위해 창작)은 영국 애국심의 상징이 됐다.
군사 역사적으로도 아지노쿠르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는 중장갑 기사보다 훈련된 보병과 원거리 무기의 우월성을 증명했고, 이후 유럽 전장에서 장궁과 같은 원거리 무기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특히 영국은 이 전투 이후 장궁 훈련을 더욱 강화했고, 이는 영국의 군사력 기반이 됐다.
결론
아지노쿠르 전투는 헨리 5세의 뛰어난 전술과 영국 장궁수들의 우수성이 만들어낸 역사적 승리였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이 전투는 백년전쟁의 흐름을 바꾸었고, 잠시나마 영국이 프랑스 왕위를 차지할 가능성을 열었다. 비록 헨리 5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꿈은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지만, 아지노쿠르는 영국 군사 전통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 전투는 또한 군사 기술과 전술의 발전이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장궁이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무기와 이를 활용한 혁신적인 전술이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기사 중심의 전통적 전투 방식을 뒤집은 것이다. 아지노쿠르의 교훈은 오늘날까지도 군사 전략가들에게 연구되며, 영국 역사와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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