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4세의 두 번째 통치기
1471년 헨리 6세와 그의 아들이 사망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의 직계는 사실상 끝났다. 에드워드 4세는 왕위를 확고히 하고 1483년까지 상대적으로 안정된 통치를 이어갔다. 그의 두 번째 집권기는 장미전쟁의 휴지기로, 영국은 오랜만에 내전 없는 평화를 경험했다.
에드워드는 뛰어난 군사 지도자일 뿐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왕실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특히 그는 의회에 의존하지 않고 왕실 수입을 확보하는 방법을 찾았는데, '자발적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귀족들에게 기부를 요청하고, 몰수한 랭커스터 영지를 활용했다. 또한 관세와 무역에서 얻는 수입도 늘렸다.
에드워드는 외교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475년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피케니 조약을 체결해 상당한 연금을 받는 대가로 프랑스 영토 주장을 포기했다. 국내적으로는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런던 상인들의 지지를 얻어 상업과 무역을 장려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통치에도 약점은 있었다. 그는 우드빌 가문에 과도한 특혜를 베풀어 다른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그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와의 갈등도 문제였다. 변덕스럽고 야심 넘치는 클래런스는 반복해서 음모를 꾸몄고, 결국 1478년 반역죄로 처형됐다. 동생을 처형한 결정은 에드워드에게 정치적, 개인적 부담이 됐다.
에드워드 5세와 보호자 리처드
1483년 4월 9일, 40세의 나이로 에드워드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장남인 12세 에드워드 왕자가 에드워드 5세로 즉위했지만, 너무 어려서 섭정이 필요했다. 죽기 전 에드워드 4세는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왕국의 수호자'로 임명했지만, 유언장에는 이를 명시하지 않았다.
어린 왕이 런던으로 오는 길에 리처드는 그를 호위하던 우드빌 가문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어 5월 초 리처드는 왕의 숙부로서 공식적으로 섭정이 됐다. 그러나 놀랍게도 몇 주 후인 6월 26일, 리처드는 조카인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가 불법적인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다른 여성과 약혼했기 때문에 그 결혼이 무효라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에 따라 의회는 에드워드 4세의 모든 자녀를 사생아로 선언했고, 리처드가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로 인정됐다. 6월 26일, 그는 리처드 3세로 정식 대관식을 올렸다. 두 왕자는 런던탑에 유폐됐고, 1483년 여름 이후 공개적으로 목격되지 않았다.
탑의 왕자들 미스터리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의 운명은 영국 역사의 가장 유명한 미스터리 중 하나다. 대중적인 견해는 리처드 3세가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조카들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주로 토마스 모어와 셰익스피어 같은 튜더 시대 작가들에 의해 강화됐다.
1674년 찰스 2세 시대에 런던탑에서 두 어린이의 유해가 발견됐고, 이것이 두 왕자의 것으로 여겨졌다. 1933년 재조사에서 뼈는 해당 연령대의 어린이 것으로 확인됐지만, 현대적 DNA 검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리처드의 책임을 의심한다. 다른 용의자로는 헨리 7세, 버킹엄 공작, 심지어 두 왕자를 탈출시켰을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리처드에게는 조카들을 제거할 동기가 있었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다. 이 미스터리는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어쨌든 두 왕자의 실종은 리처드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키웠고, 그의 통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는 곧 그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졌다.
리처드 3세의 짧은 통치
리처드 3세의 통치는 불과 2년 남짓이었지만, 그는 국가 개혁을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법률 제도를 개혁하고 보석금 제도를 확립했으며, 영어를 법정 언어로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또한 무역과 상업을 보호하는 법률을 도입했다. 북부 출신인 그는 요크와 같은 북부 도시들을 특별히 후원했다.
그러나 리처드의 개혁은 그의 왕위 찬탈 과정과 두 왕자의 의문의 실종으로 인한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483년 10월, 그의 전 동맹이었던 버킹엄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됐다. 이 반란에는 헨리 튜더라는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는 랭커스터 왕가의 먼 친척이었다.
헨리 튜더는 어머니 쪽으로 존 오브 건트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왕위 주장은 약했다. 그러나 그는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약속함으로써 요크가와 랭커스터가를 통합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는 전쟁에 지친 많은 귀족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보즈워스 전투와 장미전쟁의 종결
1485년 8월 22일, 헨리 튜더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웨일스 남부에 상륙했다. 그는 영국을 가로질러 진격하며 지지자들을 모았다. 리처드 3세는 서둘러 군대를 소집해 그를 맞이했다. 두 군대는 레스터셔의 보즈워스 들판에서 만났다.
리처드는 수적 우세를 점했지만, 전투 중 결정적인 배신이 일어났다. 스탠리 경과 노섬버랜드 백작이 중립을 지키다가, 스탠리가 결정적 순간에 헨리 편으로 가담했다. 고립된 리처드는 헨리를 직접 공격하는 무모한 돌격을 감행했고, 전장에서 전사했다. 그의 모자는 가시나무에서 발견됐고, 시신은 말 위에 던져져 레스터로 후송됐다. 그는 그레이프라이어스 수도원에 매장됐으나, 무덤은 종교개혁 시기에 파괴됐다. 2012년에야 그의 유해가 레스터의 주차장 아래에서 발견됐고, 2015년 레스터 대성당에 재안장됐다.
보즈워스 전투는 전통적으로 장미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여겨진다. 전장에서 헨리는 리처드의 왕관을 씌워졌고, 헨리 7세로 즉위했다. 그는 1486년 엘리자베스 오브 요크와 결혼해 두 가문을 통합했다. 물론 1487년 심킨 워벡 같은 위장 왕위 주장자들의 반란이 있었지만, 헨리는 이들을 모두 진압했다.
리처드 3세에 대한 역사적 평가
리처드 3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왕 중 한 명이다. 전통적인 튜더 시대 관점에서 그는 왕위를 찬탈한 폭군으로 묘사됐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는 그를 신체적, 도덕적으로 기형인 악당으로 그렸다. 실제로 리처드는 척추측만증이 있었지만,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것처럼 극단적인 기형은 아니었다.
20세기 이후 일부 역사학자들은 '리처드 3세 재평가'를 시도했다. 그들은 리처드가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튜더 왕조의 선전에 의해 악마화됐다고 주장한다. 1924년 설립된 '리처드 3세 협회'는 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리처드는 분명 개혁 의지가 있는 유능한 통치자였지만, 왕위 찬탈과 조카들의 운명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그의 평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중세 정치의 현실에서 그의 행동은 특별히 이례적이지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요크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
장미전쟁의 영향과 유산
30년간의 간헐적 내전은 영국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특히 봉건 귀족 계층은 큰 타격을 입었다. 많은 귀족 가문이 전장에서 사라졌고, 생존한 가문들도 재산과 영향력이 크게 감소했다. 이는 튜더 왕조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데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장미전쟁은 또한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기사도와 봉건 충성의 개념은 약화됐고, 권력 정치와 국가 이익이 더 중요해졌다. 특히 전쟁의 성격도 변화했는데, 제한된 규모의 귀족 간 전투에서 점차 대규모 민병대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역설적으로, 이 처참한 내전은 결국 영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 튜더 왕조의 등장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제의 시작을 알렸고, 헨리 7세와 8세의 통치 아래 영국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결론
보즈워스 전투와 리처드 3세의 죽음은 장미전쟁의 극적인 막을 내렸다. 이 전투는 단순히 한 왕의 죽음이 아니라, 중세 영국 정치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상징했다. 리처드의 실패는 그의 개인적 결함보다는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고립에 더 기인했다.
장미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왕위 계승 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봉건 질서의 해체와 근대 국가로의 전환 과정이었다. 이 전쟁의 종결로 1066년 노르만 정복 이래 영국을 지배해온 플랜태저넷 왕조가 막을 내렸고, 헨리 튜더의 즉위로 영국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보즈워스 들판에서의 결전은 중세 영국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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