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28. 장미전쟁의 발발과 귀족 간 권력 투쟁

SSSCH 2025. 5. 22.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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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후유증과 왕권의 약화

1453년 백년전쟁의 막이 내리면서 영국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프랑스 본토에서의 패배는 영국 왕실과 귀족층의 위신에 큰 타격을 입혔고, 수많은 군인들이 일자리를 잃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귀족들의 사병(私兵)으로 고용되어 정치적 불안정을 가중시켰다. 특히 헨리 6세의 무능한 통치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헨리 6세(1421-1471)는 9개월 때 왕위에 올랐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아버지 헨리 5세의 뛰어난 지도력을 전혀 물려받지 못했다.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경건한 성격이었으나, 국정을 다루기엔 부적합했다. 특히 1453년 그가 겪은 정신질환은 1년 반 동안 지속됐고, 이 공백기에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본격화됐다.

왕실 재정도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백년전쟁의 비용과 헨리 6세의 방만한 후원 정책으로 왕실은 빚에 시달렸다. 귀족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고, 중앙 정부의 통제는 약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두 유력 가문의 대립이 전면에 부상했다.

요크가와 랭커스터가의 갈등 배경

장미전쟁의 두 주역은 요크가와 랭커스터가였다. 둘 다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파로, 에드워드 3세의 자손들이었다. 랭커스터가는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 존 오브 건트의 후손으로, 헨리 6세가 이 계보에 속했다. 요크가는 넷째 아들 에드먼드와 다섯째 아들 토마스의 결합된 혈통을 물려받았다.

혈통만 보면 요크가의 리처드 공작이 왕위 계승 순서에서 더 우선이었다. 그러나 랭커스터가는 1399년부터 실제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리처드 공작은 헨리 6세의 정신질환 기간 동안 섭정으로 활약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고, 그의 능력은 무능한 왕과 대비되었다.

두 가문의 갈등은 단순한 왕위 계승 분쟁을 넘어섰다. 귀족 간 지역적 라이벌 관계,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개인적 원한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특히 서포크 공작과 서머셋 공작 같은 랭커스터 측 귀족들이 헨리 6세에게 미친 영향력은 요크 측의 불만을 키웠다.

결정적으로, 헨리 6세의 프랑스 출신 왕비 마거릿 오브 앙주가 정치에 깊이 관여하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됐다.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성품의 마거릿은 남편의 무능함을 보완하려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했고, 요크가에 대한 불신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첫 번째 충돌 - 세인트 올번스 전투

1455년 5월 22일, 영국 역사에서 장미전쟁의 첫 전투가 세인트 올번스(St. Albans)에서 발생했다. 요크 공작 리처드는 영향력을 키워가는 서머셋 공작에 대항하여 군대를 모았다. 리처드는 자신을 충성스러운 신하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서머셋을 제거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전투에서 요크군은 성벽을 돌파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서머셋 공작은 전사했고, 헨리 6세는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이 승리로 리처드는 왕의 '수호자'로 지명됐고, 정부를 사실상 장악했다. 그러나 왕비 마거릿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반격을 준비했다.

이후 몇 년간 표면적 평화가 유지됐지만, 양측은 모두 지지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마침내 1459년 9월 블로어히스(Blore Heath)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내전이 재개됐다. 초기에 요크가는 승기를 잡았지만, 랭커스터군은 1460년 12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반격했다. 이 전투에서 리처드 공작이 전사했고, 그의 몸은 적에 의해 모욕을 당했다.

요크가의 왕위 찬탈과 에드워드 4세

리처드 공작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가 요크가의 수장이 됐다.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에드워드는 1461년 2월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격파했다. 같은 해 3월 29일, 요크셔의 타우턴에서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영국 내전 중 하나가 벌어졌다. 눈보라 속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양측 합쳐 2만 8천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타우턴 전투의 승리로 에드워드는 런던으로 진군해 에드워드 4세로 즉위했다. 헨리 6세와 마거릿은 스코틀랜드로 도주했다. 왕비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받아 계속 저항했지만, 에드워드 4세는 1464년까지 북부 지역마저 장악했다.

새 왕 에드워드는 강인하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다. 그는 무역과 상업을 장려해 왕실 재정을 개선했고, 법치를 회복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곧 내부 갈등에 직면했는데, 특히 '킹메이커'로 불리는 워릭 백작과의 불화가 결정적이었다.

워릭 백작의 배신과 헨리 6세의 복위

리처드 네빌,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를 왕좌에 앉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엄청난 부와 군사력을 보유했고, 초기에 에드워드의 최측근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1464년 워릭의 동의 없이 평민 출신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리에 결혼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우드빌 가문이 왕실에서 영향력을 키워가자 워릭은 소외감을 느꼈다.

1469년 워릭은 에드워드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과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성공했으나 에드워드가 곧 권력을 회복했다. 1470년 워릭은 극적인 결단을 내린다. 그는 오랜 적이었던 마거릿 오브 앙주와 화해하고,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중재로 동맹을 맺었다.

1470년 9월, 워릭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영국에 상륙했다. 에드워드는 준비가 부족해 네덜란드로 도주했고, 워릭은 헨리 6세를 왕위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버건디 공작의 도움을 받아 1471년 3월 영국에 돌아왔다. 4월 14일 바넷 전투에서 에드워드는 워릭군을 격파했고, 워릭은 전사했다.

워릭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거릿과 그녀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가 프랑스군과 함께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5월 4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에드워드 4세는 또다시 승리했다. 랭커스터 측 에드워드 왕자는 전투 중 또는 직후 살해됐고, 헨리 6세는 런던 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내전의 사회적 영향과 특징

장미전쟁은 중세 영국을 무대로 귀족들이 사병을 이끌고 벌인 내전이었다. 이 전쟁은 몇 가지 특징적인 양상을 보였다. 첫째, 전투는 대개 단기간에 끝났고, 평민들의 일상생활에 미친 직접적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둘째, 전투 자체보다 전쟁의 정치적 결과가 더 중요했다. 전쟁은 주로 귀족 계층 내부의 갈등이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 전쟁은 영국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귀족 가문이 전장에서 멸망하거나 정치적 숙청으로 몰락했다. 1455년 이전에는 약 60개의 귀족 가문이 있었지만, 1485년에는 겨우 30개 정도만 남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왕권 강화와 귀족 권력 약화로 이어졌다.

도시 상인층과 소지주 젠트리(gentry) 계층은 상대적으로 이 혼란에서 이득을 보았다. 귀족 세력이 약화되는 동안, 그들은 지방 행정과 경제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또한 전쟁은 불확실성을 증가시켜 군주들이 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장미전쟁은 '장미'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그렇게 불리지 않았다. 이 명칭은 16세기 튜더 시대 작가들이 붙인 것으로, 요크가의 백장미와 랭커스터가의 홍장미 상징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이 상징들이 전쟁 중에 광범위하게 사용됐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결론

장미전쟁의 발발은 백년전쟁 실패 후 심화된 정치적 불안정과 헨리 6세의 무능한 통치가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였다. 요크가와 랭커스터가의 충돌은 표면적으로는 왕위 계승 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당대 영국 귀족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권력 투쟁이 얽힌, 더 깊은 정치적 위기의 표출이었다.

1455년부터 시작된 내전은 에드워드 4세의 즉위와 헨리 6세 사망으로 첫 번째 국면이 마무리됐지만, 요크가 내부의 불화와 랭커스터 지지 세력의 잔존으로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 이 전쟁은 영국 중세 봉건 질서의 쇠퇴와 근대 중앙집권국가로의 전환 과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무엇보다 장미전쟁은 영국 역사에서 중세와 근대의 경계를 이루는 사건으로, 곧 튜더 왕조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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