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23. 의회(parliament)의 제도화 - 왕권과 균형을 이루는 새로운 권력

SSSCH 2025. 5. 2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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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의회의 기원

영국 의회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정치적 진화의 산물이다. 그 뿌리는 앵글로 색슨 시대의 '위턴나게모트'(Witenagemot, 현자들의 회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의는 왕과 귀족, 고위 성직자들이 모여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왕의 직속 신하들로 구성된 '쿠리아 레지스'(Curia Regis, 왕실 평의회)가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다.

'의회'(Parliament)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parler'(말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초기에는 단순히 '논의'나 '협의'를 의미했다. 헨리 3세 통치 시기인 13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의회는 정기적으로 소집되는 제도가 아니라, 왕이 필요에 따라 소집하는 비정규적 회의체였다.

마그나카르타와 의회 발전의 씨앗

1215년 마그나카르타는 의회 발전의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공동 협의 없이는 과세하지 않는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원칙은 이후 왕이 세금을 거두기 위해 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관행으로 이어졌다. 제2차 바론 전쟁(1264-1267) 중 시몬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는 1265년 최초로 기사(knights)와 시민(burgesses) 대표를 의회에 소집했는데, 이는 평민원(House of Commons)의 원형이 되었다.

헨리 3세의 긴 통치(1216-1272) 동안 의회는 점차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왕의 재정 위기 시 세금 승인의 대가로 귀족들이 정치적 양보를 얻어내는 패턴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거래 관계는 의회가 단순한 자문 기구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기반이 되었다.

에드워드 1세와 '모범 의회'

의회 제도화의 결정적 전환점은 에드워드 1세 통치 시기(1272-1307)에 찾아온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 정복과 스코틀랜드 원정 등 야심찬 군사 활동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의회의 협조를 구해야 했다. 그는 의회를 정기적으로 소집하며 제도화했다.

1295년, 에드워드 1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회를 소집했는데, 이후 '모범 의회'(Model Parliament)로 불리게 된다. 이 의회의 특징은 "모두에게 관련된 일은 모두가 승인해야 한다"(Quod omnes tangit ab omnibus approbetur)는 원칙 아래, 사회의 모든 주요 계층 대표를 포함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들(the Lords Spiritual), 백작, 남작 등 세속 귀족들(the Lords Temporal), 그리고 기사와 시민 대표들(Commons)이 참여했다.

모범 의회는 특히 세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의회가 단순히 귀족들의 모임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기구로 발전했다는 점, 둘째, 왕이 세금을 걷기 위해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는 점, 셋째, 의회가 단순한 자문 기구를 넘어 입법 기능을 가진 기관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의회의 분화: 상원과 하원

14세기 초반, 의회는 점차 두 개의 별도 회의체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대주교, 주교 등 성직 귀족과 백작, 남작 등 세속 귀족은 '귀족원'(House of Lords)을 형성했고, 기사와 시민 대표는 '평민원'(House of Commons)을 구성했다. 이러한 분화는 1341년에 이르러 공식화되었다.

기사단은 본래 하급 귀족이었지만 점차 지역 사회의 부유한 지주층(gentry)으로 발전했고, 시민 대표는 도시의 상인과 수공업자 계층에서 선출되었다. 초기에는 귀족원이 압도적인 권력을 가졌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평민원의 영향력이 점차 증가했다.

평민원 의원들은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의 지역구 민원을 전달하는 역할에 그쳤지만, 점차 더 넓은 국가적 사안에 대해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특히 과세 문제에 있어 평민원의 동의는 필수적이었는데, 이는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자가 권력을 갖는다'는 원칙이 작동한 결과였다.

에드워드 2세와 3세 시기의 의회 권한 확대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2세(1307-1327) 시기에는 왕의 무능함과 부패한 측근들에 대한 반발로 귀족들의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1311년 '성직자 조례'(Ordinances)를 통해 의회는 왕의 지출과 측근 임명에 대한 감독권을 요구했다. 결국 에드워드 2세는 폐위되었고, 이는 의회(특히 귀족원)가 부적합한 왕을 폐위시킬 수 있는 선례를 남겼다.

에드워드 3세(1327-1377) 시기에는 백년전쟁의 발발로 인해 왕의 재정 수요가 급증했고, 이는 의회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에드워드 3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거의 매년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는 이를 기회로 다양한 정치적 양보를 얻어냈다.

특히 1340년과 1341년 의회는 왕의 주요 관리들이 의회에 책임을 지도록 요구했고, 왕실 재정에 대한 감사권을 획득했다. 또한 1362년에는 영어가 법정 언어로 공식 채택되면서, 평민원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그때까지 법정과 귀족 사회에서는 노르만 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

의장(Speaker)의 등장과 의회 절차 발전

14세기 중반에는 평민원을 대표하는 '의장'(Speaker) 직책이 등장했다. 피터 드 라 메어(Peter de la Mare)가 1376년 '착한 의회'(Good Parliament)에서 최초의 실질적인 의장 역할을 수행했다고 여겨진다. 의장은 평민원의 의견을 왕과 귀족원에 전달하고, 의회 내 토론을 주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에 의회 절차와 관련된 여러 관행도 형성되었다. 의안(bills)의 제출, 상하원 간의 의견 조율, 왕의 승인 등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국 의회의 기본 구조가 14세기에 이미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세 번의 독회(readings)를 거쳐 법안을 통과시키는 관행은 이 시기에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의회의 주요 권한 확립

14세기를 거치며 의회는 세 가지 핵심 권한을 확립했다:

  1. 과세 동의권: 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원칙이 확고해졌다. 이는 마그나카르타에서 비롯된 원칙으로, 1340년 의회 법령을 통해 재확인되었다.
  2. 입법권: 의회는 왕, 귀족원, 평민원의 동의를 받은 '법령'(Statute)을 제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왕의 일방적인 '칙령'(Ordinance)보다 상위의 법적 지위를 가졌다.
  3. 탄핵권: 1376년 '착한 의회'에서는 왕의 부패한 측근들을 탄핵하는 절차가 처음 사용되었다. 평민원이 고발하고 귀족원이 심판하는 이 탄핵 제도는 왕의 측근들에 대한 의회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권한들은 의회가 단순한 자문 기구가 아니라 왕권과 균형을 이루는 독립적인 정치 기관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지방 대표성과 선거 관행

초기 의회에서 평민원 의원들은 어떻게 선출되었을까? 기사 대표는 각 주(county)의 '샤이어 법정'(shire court)에서 선출되었고, 시민 대표는 도시의 유력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이 시기의 '선거'는 현대적 의미의 민주적 과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는 지역의 유력자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지명하는 형태에 가까웠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주에서 기사를 선출할 때는 일정액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40 실링 자유보유자)만이 투표권을 가졌고, 도시에서는 길드 회원이나 재산세 납부자 등으로 선거권이 제한되었다. 여성, 농노, 일반 노동자들은 정치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또한 각 선거구마다 선거 방식도 달랐다. 일부 '포켓버러'(pocket borough)에서는 지역 영주가 의원을 사실상 지명했고, '썩은 자치구'(rotten borough)에서는 소수의 유권자가 의원을 선출하는 불균형이 존재했다. 이러한 불균형은 19세기 선거법 개혁 전까지 계속되었다.

삼 신분(Three Estates)과 사회 대표성

중세 의회는 당시 사회를 구성하는 '삼 신분'(Three Estates)의 개념을 반영했다. 제1신분은 성직자(clergy), 제2신분은 귀족(nobility), 제3신분은 평민(commons)이었다. 영국에서는 성직자와 세속 귀족이 함께 귀족원을 구성했고, 평민은 평민원을 형성했다.

1295년 '모범 의회'에서는 이 세 신분이 모두 대표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의회에 대표되는 계층은 전체 인구 중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일반 농민과 노동자들은 의회에서 직접적인 대표성을 갖지 못했다.

또한 초기 의회는 오늘날과 같은 정당 체제가 아니라, 개인적 이해관계와 지역 연고에 기반한 느슨한 파벌로 구성되었다. 의원들은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는 자신이 대표하는 지역과 계층의 이익을 우선시했고,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대표'와 다른 점이었다.

결론

13세기 말부터 14세기에 걸쳐 영국 의회는 왕의 필요에 따라 간헐적으로 소집되는 자문 기구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제도화된 정치 기관으로 발전했다. 특히 1295년 에드워드 1세의 '모범 의회'는 사회 각 계층의 대표성을 갖춘 의회의 기본 틀을 확립했고, 이후 상원과 하원으로 분화되며 오늘날 영국 의회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의회는 점차 과세 동의권, 입법권, 탄핵권 등 핵심적인 권한을 확보하며 왕권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성장했다. 비록 초기 의회의 대표성과 민주성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왕권의 독단을 제어하고 다양한 사회계층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의의가 있었다.

이러한 의회 제도의 발전은 영국이 절대왕정으로 나아가지 않고 입헌군주제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세금을 내는 자들이 정치적 대표성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은 이후 미국 독립전쟁의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구호로 이어지는 등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영국 의회의 점진적 발전 과정은 혁명적 단절 없이 제도가 진화해온 영국 정치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비록 완전한 민주주의 제도의 확립까지는 여러 세기가 더 필요했지만, 13-14세기에 형성된 의회 제도의 기본 골격은 현대 의회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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