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22. 에드워드 1세와 웨일스·스코틀랜드 원정 - 브리튼 섬 통합의 야망

SSSCH 2025. 5. 22. 00:02
반응형

에드워드 1세의 등극과 통치 이념

1272년 11월, 헨리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1세로 즉위한다. 당시 33세였던 에드워드는 제9차 십자군 원정 중이었으므로 실제 귀국은 1274년 8월에 이루어진다. 그는 강인한 체격과 182cm가 넘는 장신으로 '롱샹크스'(Longshanks, 긴 다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에드워드 1세는 즉위 직후부터 강력한 왕권 확립과 브리튼 섬 전체의 통합이라는 야망을 품었다. 그는 자신을 아서 왕의 후계자로 여기며, 전설 속 브리튼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다. 또한 그는 법률가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어 '영국 법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제정된 수많은 법령들은 영국 법체계의 근간을 형성했다.

웨일스 정복과 병합

에드워드 1세의 첫 번째 군사적 목표는 웨일스였다. 웨일스는 오랫동안 잉글랜드와 갈등 관계에 있었지만, 완전히 정복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특히 그윈네드(Gwynedd) 왕국의 룰루웰린 아프 그리피드(Llywelyn ap Gruffydd)는 '웨일스의 왕자'를 자처하며 웨일스의 독립을 주장했다.

1276년, 룰루웰린이 에드워드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하자 에드워드는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다. 잉글랜드군은 세 방향에서 웨일스를 공격했고, 식량 공급로를 차단해 룰루웰린을 항복시켰다. 1277년 노벰버 트리티(Treaty of Aberconwy)를 통해 룰루웰린은 웨일스 동부 영토를 포기하고 왕자 칭호를 그윈네드 지역에만 한정해 사용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282년, 룰루웰린의 동생 다비드가 반란을 일으켰고, 룰루웰린도 이에 합류했다. 에드워드는 다시 한번 대군을 이끌고 웨일스를 침공했다. 같은 해 12월, 원쇼 전투에서 룰루웰린이 전사하고, 이듬해 6월 다비드가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웨일스의 저항은 끝났다.

1284년 웨일스 법령(Statute of Wales)을 통해 에드워드는 웨일스를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왕국에 병합했다. 그는 웨일스를 잉글랜드식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고, 성곽 건설을 통해 통치력을 강화했다. 카나번, 콘웨이, 하를레크, 보마리스 등 '쇠고리 성곽'(Iron Ring of Castles)이라 불리는 거대한 요새들은 웨일스인들의 반란을 억누르는 수단이 되었다.

또한 에드워드는 자신의 아들(후의 에드워드 2세)에게 '웨일스의 왕자'(Prince of Wales) 칭호를 부여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영국 왕위 계승자의 전통적 칭호로 이어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어만 사용하는 왕자를 원한다"는 웨일스인들의 요구에 자신의 갓난아기 아들을 보여주며 "여기 웨일스어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왕자가 있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스코틀랜드 개입과 독립전쟁의 시작

웨일스 정복에 성공한 에드워드는 다음 목표로 스코틀랜드를 겨냥했다. 그의 기회는 1286년 스코틀랜드 알렉산더 3세 왕이 사망하면서 찾아왔다. 알렉산더의 후계자는 노르웨이의 어린 공주 마가렛(일명 '노르웨이의 처녀')이었는데, 에드워드는 그녀를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켜 양국 통합을 꾀했다.

그러나 마가렛은 1290년 오크니 제도로 오는 도중 사망했고, 스코틀랜드는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렸다. 13명의 계승 후보자(경쟁자들, Competitors)가 나타났고,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중재자로 에드워드 1세를 선택했다. 에드워드는 이를 기회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다.

1292년, 에드워드는 존 베일리올(John Balliol)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인정했지만, 그를 자신의 봉신으로 취급했다. 베일리올이 충성 서약을 거부하자 에드워드는 1296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던바 전투에서 승리하고 베일리올을 폐위시켰다. 이어 스콘 수도원에서 스코틀랜드 왕관의 상징인 '운명의 돌'(Stone of Destiny)을 탈취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가져갔다.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에 직접 통치를 시도했으나, 1297년 윌리엄 월레스(William Wallace)와 앤드루 드 모레이(Andrew de Moray)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같은 해 9월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영국군을 크게 물리쳤다. 비록 1298년 팰커크 전투에서 에드워드 1세는 월레스를 격파했지만, 스코틀랜드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1305년 월레스가 체포되어 처형된 후에도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가 1306년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에드워드 1세는 그를 진압하기 위해 마지막 원정을 준비했으나, 1307년 7월 솔웨이 근처에서 행군 중 병으로 사망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유골을 스코틀랜드 원정군 앞에 매달고 가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에드워드 1세의 법률 개혁과 의회 발전

에드워드 1세는 '영국 법의 아버지'라는 별명에 걸맞게 광범위한 법률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통치 기간(1272-1307) 동안 제정된 법령들은 영국 법체계의 근간을 이루며, 이 시기를 '에드워드식 법령 시대'라고 부른다.

1275년 웨스트민스터 제1법령은 지방 행정과 사법 제도를 정비했고, 1285년 웨스트민스터 제2법령은 토지법과 형사법을 체계화했다. 특히 '데 도니스'(De Donis) 조항은 토지의 상속권을 보호하는 중요한 규정이었다. 1290년 '퀴아 엠프토레스'(Quia Emptores) 법령은 봉건적 토지 보유 관계를 명확히 해 토지 거래의 투명성을 높였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의회 제도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1295년 그가 소집한 의회는 '모범 의회'(Model Parliament)라 불리며, 성직자, 귀족, 평민의 대표자들이 모두 참석하는 형태로 이후 영국 의회의 모델이 되었다. 이는 "모두의 관심사는 모두가 승인해야 한다"(Quod omnes tangit ab omnibus approbetur)는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다만 에드워드의 의회 소집 목적은 주로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 웨일스, 스코틀랜드 원정, 그리고 프랑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의회의 과세 승인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의회는 점차 자신들의 불만을 제기하고 왕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장으로 발전했다.

유대인 추방과 종교 정책

에드워드 1세의 통치에서 가장 어두운 측면 중 하나는 1290년 유대인 추방령이다. 중세 영국에서 유대인들은 상업과 금융업에 종사했지만, 점차 반유대주의 정서가 고조되었다. 에드워드는 처음에는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을 규제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결국 1290년 7월 모든 유대인(약 3,000명)을 영국에서 추방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추방령은 무려 366년 동안 지속되어, 유대인들이 공식적으로 영국에 다시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은 크롬웰 시대인 1656년이 되어서였다. 에드워드의 유대인 추방 정책은 당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반유대주의 움직임의 일환이었지만, 그의 통치에 큰 오점을 남겼다.

한편 에드워드는 가톨릭 교회와는 일반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고, 종교적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다만 교회의 토지 취득을 제한하는 '모트메인 법령'(Statute of Mortmain, 1279)을 통해 교회의 경제적 팽창은 견제했다.

에드워드 1세의 성격과 왕실 생활

에드워드 1세는 엄격하고 단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사적으로는 가족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는 첫 번째 왕비 카스티야의 엘레아노르와 깊은 사랑을 나누었고, 그녀가 1290년 사망했을 때 영국 각지에 '엘레아노르 십자가'(Eleanor Crosses)를 세워 애도했다. 런던의 차링 크로스(Charing Cross)는 이 십자가 중 하나가 있던 자리다.

그는 또한 기사 문화와 무예를 장려했다. 직접 무술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고, 아서 왕 전설에 심취해 1284년 아서 왕의 '원탁'으로 여겨지는 유물을 윈체스터 성에 설치했다. 이는 자신을 아서 왕의 계승자로 보는 정치적 상징이기도 했다.

에드워드는 또한 건축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가 웨일스에 건설한 성곽들은 당대 최고의 군사 건축물로, 오늘날에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재건하고, 왕실 궁전들을 확장하는 등 왕권의 위엄을 건축으로 표현했다.

결론

에드워드 1세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성공적인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법체계를 정비했으며, 웨일스를 완전히 정복해 잉글랜드에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스코틀랜드 정복은 미완의 과업으로 남았지만, 그의 통치는 영국의 국경과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유대인 추방과 같은 부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시대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가혹한 수단도 사용했다.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원정 과정에서 보여준 냉혹함은 '스코틀랜드의 망치'(Hammer of the Scots)라는 별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결국 에드워드 1세는 브리튼 섬 통합이라는 꿈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채 사망했지만, 그가 닦아놓은 법적, 제도적 기반은 이후 영국이 강력한 통합 국가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의 시대는 중세 영국이 근대 국가로 향해 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오늘날 영국의 정체성과 제도 속에 에드워드 1세의 유산이 깊이 녹아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