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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역사 20. 리처드 사자심왕과 3차 십자군 - 부재한 왕과 전설이 된 영웅

SSSCH 2025. 5. 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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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의 즉위와 초기 정책

1189년 7월 6일, 헨리 2세가 사망하자 그의 둘째 아들 리처드가 33세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리처드 1세(1189-1199)는 역사에서 '사자심왕'(Lionheart)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으나, 잉글랜드보다 프랑스 영토와 십자군 원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리처드는 1157년 9월 8일 옥스퍼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영향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프랑스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프로방스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트루바두르(음유시인)처럼 직접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어린 나이부터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보였다.

즉위 직후 리처드는 왕관을 얻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어머니 엘레오노르를 16년간의 가택연금에서 풀어주고, 그녀에게 잉글랜드 섭정의 역할을 맡겼다. 또한 아버지의 충신들 중 일부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측근들을 주요 직위에 임명했다.

리처드의 대관식은 1189년 9월 3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거행됐다. 이 행사는 불행히도 런던의 유대인에 대한 폭력 사태로 얼룩졌다. 대관식에 참석하려던 유대인 대표들이 공격을 받았고, 이는 곧 유대인 지역 전체에 대한 약탈과 살인으로 확대되었다. 리처드는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큰 피해가 발생한 후였다.

리처드가 가장 큰 관심을 둔 것은 십자군 원정이었다. 1187년 예루살렘이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교황은 3차 십자군을 선포했다. 리처드는 즉위 전부터 십자군 참여를 맹세했고, 왕이 된 후에는 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원정 자금 마련과 왕국의 정비

십자군 원정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리처드는 "내가 런던을 팔 수 있다면 팔았을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길 정도로 자금 마련에 열심이었다. 실제로 그는 왕실 영지, 관직, 특권, 면제 등을 대대적으로 판매했다.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에게는 1174년 이후 잉글랜드에 대한 봉신 의무를 면제해 주는 대가로 1만 마르크를 받았다. 더럼 주교에게는 새들버그 영지를 600마르크에 판매했고, 요크 대주교 자리는 3,000마르크에 거래되었다. 또한 많은 도시들이 자치권을 얻기 위해 왕에게 상당한 금액을 지불했다.

리처드는 또한 관료제를 효율화하여 세금 징수를 강화했다. 특히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 특별세를 부과했는데, 이는 당시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반영한 조치였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할 수 없었던 고리대금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왕실 재정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원정을 떠나기 전, 리처드는 왕국의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던 동생 존에게도 관대한 조치를 취했다. 대륙의 영토는 아니지만 잉글랜드 내에서 광대한 영지와 여러 백작령을 하사했다. 그러나 존이 리처드의 부재 중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우려하여, 그가 왕의 허가 없이 3년간 잉글랜드를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잉글랜드의 통치는 엘리 주교 윌리엄 롱샹프에게 맡겼다. 롱샹프는 대법관과 교황 특사를 겸하는 강력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고, 잉글랜드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이는 후에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3차 십자군의 출발과 과정

리처드는 1190년 여름, 마르세유에서 지중해를 건너 십자군에 합류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의 함대는 약 100척의 배와 8,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이미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명성이 높았다.

원정 도중 리처드는 시칠리아에 들렀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 왕 필립 2세와 합류했지만, 두 왕 사이에는 곧 불화가 생겼다. 또한 시칠리아에서 리처드는 자신의 동생 조프리의 미망인이자 시칠리아 왕의 누이인 조앤나가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메시나 시를 점령하고 시칠리아 왕 탕크레드를 압박하여 조앤나의 권리를 회복시켰다.

1191년 봄, 리처드의 함대는 키프로스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지역 통치자 이삭 콤네노스와 충돌했다. 이삭이 난파된 영국 배의 승객들을 포로로 잡자, 리처드는 격노하여 키프로스 전체를 정복했다. 이 승리로 그는 상당한 보물을 얻었고, 십자군에게 중요한 보급 기지를 확보했다. 또한 키프로스에서 리처드는 나바라의 베렝가리아와 결혼했다.

1191년 6월, 리처드는 마침내 성지에 도착하여 아크레 포위전에 참여했다. 그의 도착은 전세를 바꾸었고, 곧 아크레는 십자군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리처드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와 심각한 불화를 빚었다. 레오폴드의 깃발이 정복된 도시에 게양되자 리처드는 이를 분노하며 끌어내렸는데, 이는 후에 그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아크레 함락 후, 프랑스 왕 필립은 건강 문제와 리처드와의 불화를 이유로 유럽으로 돌아갔다. 이제 십자군의 지도자는 리처드 혼자게 되었다.

살라딘과의 대결과 예루살렘 원정

리처드와 살라딘의 대결은 중세 군사사의 위대한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치열하게 맞섰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두 지도자의 기사도적 행동과 상호 존중을 강조하여 묘사했다.

아크레에서 출발한 리처드는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여 야파를 목표로 했다. 1191년 9월 7일, 그는 아르수프 전투에서 살라딘의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리처드는 뛰어난 전술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적의 화살 공격에도 진형을 유지하도록 엄격히 명령했고, 기다렸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기사들의 일제 돌격을 지시했다.

아르수프 승리 후 리처드는 야파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러나 겨울이 다가오자 그는 진군을 멈추고 전열을 재정비했다. 1192년 초, 그는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갔지만, 여러 요인으로 인해 최종 공격을 포기했다. 군수 보급의 어려움, 프랑스 귀족들의 이탈, 그리고 잉글랜드에서 전해오는 동생 존의 반란 소식 등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리처드는 직접적인 예루살렘 공격 대신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살라딘과의 협상 끝에 1192년 9월 '야파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순례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고, 십자군은 해안의 도시들(티레에서 야파까지)을 보유하게 되었다. 비록 예루살렘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리처드는 이를 통해 기독교인들의 입지를 상당히 개선시켰다.

포로가 된 왕: 귀환 여정의 비극

십자군 원정을 마친 리처드는 1192년 10월 유럽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중해가 겨울 폭풍으로 위험해지자, 그는 육로로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리처드는 변장하고 소규모 일행과 함께 여행했지만, 오스트리아 영토를 지나던 중 1192년 12월 레오폴드 공작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었다. 아크레에서의 모욕을 잊지 않은 레오폴드는 리처드를 감금했고, 후에 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양도했다.

하인리히 황제는 리처드의 석방을 위해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다. 최종적으로 15만 마르크(당시 잉글랜드 연간 세입의 2-3배)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책정되었다. 이 소식이 잉글랜드에 전해지자 왕의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석방 협상과 몸값 마련을 주도했다.

몸값을 모으기 위해 잉글랜드에서는 전례 없는 세금이 부과되었다. 모든 기사 영지(knight's fee)당 20실링, 모든 자유민의 소득과 동산의 4분의 1, 모든 교회 보물의 10분의 1 등이 징수되었다. 엘레오노르는 이렇게 모은 돈을 직접 가지고 독일로 가서 아들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리처드는 1194년 2월 4일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그는 즉시 잉글랜드로 돌아와 3월 17일 기사회의(Great Council)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형식적으로 두 번째 대관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포로 생활로 인한 왕권의 약화를 만회하기 위한 조치였다.

잉글랜드의 위기: 리처드의 부재 중 벌어진 일

리처드가 원정과 포로 생활로 잉글랜드를 비운 동안(1190-1194), 왕국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처음에는 롱샹프 주교가 섭정으로서 통치했지만, 그의 전제적 통치 방식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리처드의 동생 존은 롱샹프의 정적이 되었다. 1191년 여름, 존은 윈저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롱샹프에 대항했다. 이어 요크 대주교 조프리와 체스터 백작 랜들프 등이 존의 편에 섰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191년 말 존은 사실상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여러 성채를 장악하고 스스로를 잉글랜드의 통치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엘레오노르 여왕과 일부 충성스러운 귀족들이 이에 저항했다.

1193년, 리처드가 포로로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프랑스 왕 필립 2세는 노르망디를 침공했고, 존에게 막대한 영토를 약속하며 동맹을 맺었다. 존은 노골적으로 형의 왕위를 노리게 되었다.

1193년 1월, 존과 필립은 파리에서 만나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르면 필립은 노르망디의 상당 부분(지조르와 베신 지역)을 차지하고, 존은 리처드의 나머지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다. 존은 프랑스로 돌아와 리처드가 결코 석방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리처드의 석방 소식이 전해지자 상황은 급변했다. 존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그를 떠났고, 그는 필립의 궁정으로 도피했다. 1194년 5월, 리처드는 노르망디에서 반역자로 선포된 존을 만났다. 놀랍게도 리처드는 동생을 용서했고, "그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며 나쁜 조언자들에게 현혹되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리처드의 마지막 5년: 노르망디 재건과 샬뤼 전투

리처드는 잉글랜드에 돌아온 후 불과 두 달만인 1194년 5월 다시 프랑스로 떠났다. 이후 그는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주로 필립 2세에게 빼앗긴 노르망디 영토를 회복하는 데 있었다.

프랑스에서 리처드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다시 한 번 발휘했다. 그는 새로운 성곽 건설 기술을 도입하여 '샤토 가이야르'(Château Gaillard)라는 견고한 요새를 세웠다. 이 성은 세느강 계곡을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했으며, 당대 최고의 방어 시설로 평가받았다.

1198년, 리처드는 베르뇌유 전투에서 필립 2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그는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또한 프랑드르, 불로뉴, 샹파뉴, 투루즈 등의 군주들과 동맹을 맺어 필립을 고립시켰다.

그러나 리처드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199년 3월, 그는 리무쟁의 샬뤼 성 근처에서 반란을 진압하던 중 석궁 화살에 어깨를 맞았다. 상처 자체는 치명적이지 않았지만, 치료 과정에서 패혈증이 발생했다. 리처드는 4월 6일,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음을 앞둔 리처드는 동생 존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비록 그의 조카인 브리타니의 아서(사망한 형 조프리의 아들)가 정통성 면에서 더 강한 주장을 할 수 있었지만, 리처드는 성인인 존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왕국을 더 잘 통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리처드는 자신을 죽인 석궁수를 용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그렇지 않았다. 리처드가 사망한 후 석궁수는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리처드 사자심왕의 유산과 평가

리처드 1세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10년 재위 기간 중 잉글랜드에서 불과 10개월만 보냈고, 국가 통치보다 전쟁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의 원정과 전쟁으로 인해 왕국에 막대한 재정적 부담이 지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중세 시대 가장 유명한 왕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의 용맹함, 기사도적 행동, 그리고 십자군에서의 활약은 많은 전설과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특히 그의 충성스러운 시종 블론델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다가 리처드의 감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로맨틱한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다.

리처드는 또한 로빈 후드 전설과도 연결된다. 비록 역사적 리처드와 전설 속 로빈 후드의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후대의 문학 작품에서 로빈 후드는 악한 존 왕에 맞서 싸우며 포로가 된 리처드 왕의 귀환을 기다리는 충성스러운 신하로 묘사되곤 했다.

군사적으로 리처드는 명백히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전략과 전술에 정통했고,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성곽 설계와 공성전에도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리처드 사망 후 수세기 동안 모범 사례로 연구되었다.

행정적 측면에서는 흥미롭게도, 리처드가 자주 부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상대적으로 잘 통치되었다. 그는 유능한 관리들을 임명했고, 아버지 헨리 2세가 구축한 행정 시스템이 대체로 원활하게 작동했다. 특히 리처드의 귀환 후 1194년에 단행된 행정 개혁은 지방 정부의 효율성을 높였다.

십자군의 유산과 중세 유럽 사회

3차 십자군은 명목상으로는 실패했다. 예루살렘은 회복되지 않았고,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은 좁은 해안 지역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유럽과 중동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 유럽인들은 이슬람 세계의 발전된 과학, 의학, 철학에 접하게 되었다. 이는 후에 유럽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십자군은 지중해 무역을 활성화시켰고,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상업적 발전을 촉진했다.

종교적 측면에서는 십자군의 실패가 교황의 권위에 타격을 주었다. 신의 뜻을 대변한다는 교황이 축복한 원정이 실패하자, 사람들은 점차 교회의 절대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영국 내부적으로 십자군은 유대인 공동체에 큰 비극을 가져왔다. 리처드의 대관식 때 시작된 폭력은 요크에서의 대학살로 이어졌다. 1190년 3월, 요크 성에 피신한 유대인 약 150명이 폭도들에게 포위되었고, 대부분이 집단 자살을 선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십자군은 또한 영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리처드의 군사적 명성은 잉글랜드가 유럽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동시에 원정의 재정적 부담은 후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결론

리처드 사자심왕은 길지 않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영국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왕 중 한 명으로 남아있다. 그는 영웅적인 전사이자 형편없는 행정가, 위대한 군사 지도자이자 부재중인 군주라는 모순된 평가를 받는다.

리처드가 잉글랜드보다 대륙 영토와 십자군에 더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맥락에서 이는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앙주 왕가에게 잉글랜드는 그들 제국의 일부에 불과했고, 재정적으로 중요했지만 문화적, 정치적으로는 노르망디나 아키텐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

리처드의 재위는 영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예고했다. 그의 사망 후 즉위한 존 왕은 대륙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는 잉글랜드가 점차 고유한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리처드의 원정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은 후에 존 왕 시대의 정치적 위기와 마그나카르타 체결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리처드 사자심왕은 결국 중세의 기사도적 이상을 체현한 인물로 기억된다. 그는 완벽한 통치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용맹함과 모험은 영국 사람들의 상상력을 수세기 동안 사로잡았다. 비록 그가 잉글랜드에 거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영국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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