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19. 앙주 제국과 헨리 2세 개혁 - 왕권 강화와 법질서의 확립

SSSCH 2025. 5. 2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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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주 가문의 등장과 제국의 형성

헨리 2세(1154-1189)의 통치는 영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첫 군주이자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그러나 헨리의 이야기는 그의 외할아버지인 헨리 1세와 할머니 마틸다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헨리 1세는 1135년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그의 딸 마틸다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헨리 1세의 조카인 스티븐이 왕위를 차지했고, 이는 잉글랜드를 거의 20년간의 내전으로 몰아넣었다. 이 시기는 '무정부 상태'(the Anarchy)라고 불린다. 마틸다는 프랑스 앙주(Anjou) 백작 조프리 플랜태저넷과 결혼했고, 그들의 아들이 바로 헨리 2세였다.

1153년, 헨리는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스티븐과 대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면전 대신 협상을 통해 합의에 도달했다. 월링포드 조약에 따라 스티븐은 생존 기간 동안 왕으로 남고, 헨리가 그의 후계자가 되기로 했다. 스티븐은 이듬해인 1154년에 사망했고, 21세의 헨리 2세가 즉위했다.

헨리 2세는 즉위 당시 이미 상당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노르망디 공국을, 아버지로부터 앙주, 투렌, 메인 백작령을 물려받았다. 1152년에는 아키텐의 여백작 엘레오노르와 결혼함으로써 프랑스 남서부의 광대한 영토도 차지했다. 1154년 잉글랜드 왕이 된 그는 프랑스 국토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앙주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헨리 2세의 초기 개혁

헨리 2세는 즉위 직후 잉글랜드의 질서 회복에 착수했다. 내전 기간 동안 스티븐이 귀족들에게 지나치게 양보한 결과,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불법으로 지어진 성채들이 난립했고, 왕실 재산이 대거 유출되었으며, 사법 체계가 거의 붕괴 상태에 있었다.

헨리의 첫 번째 조치는 불법 성곽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스티븐 시대에 왕실 허가 없이 지어진 수백 개의 성을 철거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스티븐이 귀족들에게 하사한 왕실 영지와 특권의 대부분을 회수했다. 이는 귀족들의 반발을 샀지만, 헨리의 강력한 의지와 군사력 앞에 대부분이 굴복했다.

화폐 제도도 개혁했다. 내전 기간 중 주조된 부실한 화폐를 회수하고, 품질과 무게가 일정한 새 화폐를 발행했다. 이는 상업 활동을 촉진하고 왕실 수입을 증대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행정 체계의 효율성도 높였다. 헨리는 유능한 관리들을 발탁하여 중앙 정부의 역량을 강화했다. 특히 그의 친구이자 조언자였던 토마스 베켓을 대법관(Chancellor)에 임명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베켓은 뛰어난 행정가로서 왕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시행했다.

사법 제도의 혁신

헨리 2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잉글랜드 사법 제도의 혁신이었다. 그는 중앙집권적이고 효과적인 사법 체계를 구축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에게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1166년 클래런던 칙령(Assize of Clarendon)은 형사 사법 제도를 개혁했다. 이 법령에 따라 각 지역에서 12명의 자유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범죄 혐의자를 지목하도록 했다. 이를 '대배심'(grand jury)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이전에는 피해자가 직접 고발해야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지역 사회의 합의에 의해 범죄자를 기소할 수 있게 되었다.

1176년의 노섬프턴 칙령(Assize of Northampton)은 이러한 개혁을 더욱 발전시켰다. 중범죄(살인, 강도, 방화, 위조 등) 혐의자는 '물의 시련'(trial by water)이라는 신판(神判)을 받아야 했다. 비록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미신적이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범죄자 처벌의 표준화된 절차였다.

헨리는 또한 '순회 법관'(justices in eyre) 제도를 정례화했다. 왕실 법관들이 정기적으로 지방을 순회하며 재판을 열고 왕의 법을 집행했다. 이는 지방 영주의 법정에 의존하던 이전 시스템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공정했다. 순회 법관은 또한 세금 징수와 행정 감독의 역할도 수행했다.

특히 획기적인 것은 '일반 소송'(common pleas) 제도의 도입이었다. 토지 분쟁과 같은 민사 소송을 해결하기 위한 이 제도는 폭력이나 자력 구제 대신 법적 절차를 통한 해결을 장려했다. 원고는 왕실 서기관으로부터 '영장'(writ)을 구매하여 소송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는 왕실 법정의 권위를 확대하고 수입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영국 보통법(Common Law)의 근간을 형성했다. 순회 법관들이 전국에서 유사한 판례를 적용함으로써 법의 일관성이 높아졌고, 이는 점차 전국 공통의 법체계로 발전했다. 이것이 바로 '보통법'의 어원이다.

헨리의 법 개혁과 재산권

헨리 2세의 법 개혁은 특히 토지 소유권 분야에서 혁신적이었다. 1176년 '소유권 확인 칙령'(Assize of Novel Disseisin)은 불법적으로 토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에게 신속한 구제책을 제공했다. 이전에는 강제로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이 오랜 소송을 통해서만 권리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훨씬 빠르고 효율적인 절차가 마련됐다.

'조상 상속 칙령'(Assize of Mort d'Ancestor)은 부모가 사망했을 때 자녀의 상속권을 보호했다. 이 법령은 봉건 영주가 합법적 상속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방지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개인의 재산권을 강화하고 법적 절차를 통한 분쟁 해결을 장려했다. 이는 단순히 공정성을 증진하는 것을 넘어, 안정적인 재산권이 보장됨으로써 경제 활동과 투자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었다.

헨리의 법 개혁은 또한 형사 소송 절차도 개선했다. '배심원에 의한 심리'(trial by jury)가 점차 물의 시련이나 결투와 같은 신판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는 처음에는 민사 소송에서 시작되어 점차 형사 재판으로 확대되었다.

헨리와 교회의 갈등: 베켓 분쟁

헨리 2세의 통치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는 교회와의 갈등, 특히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과의 분쟁이었다. 헨리는 1162년 자신의 신뢰하는 대법관 베켓을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는 베켓이 왕의 이익을 위해 교회를 통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베켓은 대주교가 된 후 교회의 권익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인물로 변모했다.

가장 큰 갈등은 '유계 성직자'(criminous clerks) 문제였다. 당시 성직자들은 교회법에 따라 재판을 받는 특권이 있었고, 교회 법정은 일반적으로 더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헨리는 범죄를 저지른 성직자들도 세속 법정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베켓은 이를 교회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보고 강력히 반대했다.

1164년 헨리는 '클래런던 칙령'(Constitutions of Clarendon)을 통해 교회에 대한 왕의 권한을 명문화하려 했다. 이 문서는 성직자의 범죄자를 세속 법정에서 재판하고, 교황에게 상소하는 것을 제한하며, 고위 성직자의 선출에 왕의 동의를 의무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베켓은 처음에는 이에 동의했다가 나중에 번복했고, 결국 프랑스로 망명했다.

6년간의 망명 생활 끝에 베켓은 1170년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그와 헨리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동년 12월 29일, 헨리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귀찮은 신부를 없애줄 사람은 없는가?")을 듣고 네 명의 기사가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베켓을 살해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유럽 전역에 파문을 일으켰고, 헨리는 교황으로부터 파문 위협을 받았다.

헨리는 공개적인 참회를 통해 위기를 모면했다. 1174년 그는 맨발로 캔터베리 대성당까지 걸어가 베켓의 무덤 앞에서 채찍질을 당하는 굴욕적인 의식을 치렀다. 이를 통해 교황과의 관계를 회복했지만, 베켓 살해 사건은 헨리의 통치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앙주 제국의 통치

헨리 2세의 영토는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피레네 산맥까지 뻗어 있었다. 이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그는 거의 끊임없이 여행했다. 30년 재위 동안 잉글랜드에서 보낸 시간은 총 13년에 불과했다고 한다.

각 영토는 고유의 법과 관습을 유지했지만, 헨리는 중앙집권적 통제를 강화하려 노력했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관리들을 지방 통치자로 임명했고, 효율적인 정보 전달 체계를 구축했다. 또한 지역 귀족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결혼 동맹과 토지 하사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재정 관리도 철저했다. 헨리는 정기적인 회계 감사를 통해 지방 관리들의 세금 징수를 감독했다. '재무부 점검부'(Pipe Rolls)라는 상세한 재정 기록이 이 시기부터 체계적으로 보존되기 시작했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재정 관리 시스템 중 하나였다.

군사적으로는 '방패세'(scutage) 제도를 확대했다. 이는 봉건적 군사 봉사 의무 대신 현금을 지불하는 제도로, 헨리는 이 자금으로 자신에게 직접 충성하는 용병을 고용할 수 있었다. 이는 봉건 영주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왕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아일랜드 정복의 시작

헨리 2세 시대에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에 대한 개입을 시작했다. 이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복잡한 관계의 시작점이 되었다.

1166년, 렌스터의 추방된 왕 데르모트 맥머로(Dermot MacMurrough)가 헨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헨리는 직접 개입하는 대신 자신의 귀족들에게 맥머로를 돕도록 허락했다. 노르만 귀족들, 특히 '스트롱보우'라 불리는 펨브룩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스트롱보우는 맥머로의 딸과 결혼하고 렌스터 왕국의 상속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헨리는 자신의 귀족이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는 것을 경계하여 1171년 직접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그는 아일랜드 왕들의 항복을 받고 '아일랜드의 군주'(Lord of Ireland)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영국의 지배는 더블린 주변의 '페일'(Pale)이라 불리는 지역에 국한되었다. 아일랜드 대부분은 여전히 전통적인 게일 지도자들의 통제 하에 있었다. 이런 부분적 정복은 후에 수세기 동안 지속될 영국-아일랜드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헨리의 가족과 후계 문제

헨리와 엘레오노르는 다섯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그러나 가족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갈등이 많았다. 헨리는 평생 여러 정부(情婦)를 두었고, 이는 엘레오노르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1170년대 이후 엘레오노르는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서 지냈다.

헨리는 아들들에게 권력을 분배하여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려 했다. 1170년 장남 '젊은 헨리'를 공동 왕으로 대관했고, 리처드에게는 아키텐, 조프리에게는 브리타니, 막내 존에게는 아일랜드를 할당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아들들은 실질적인 권력 없이 명목상의 지위만 가진 것에 불만을 품었다. 1173-74년 엘레오노르의 지원을 받은 세 아들(젊은 헨리, 리처드, 조프리)이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2세는 이 위기를 군사적으로 제압했지만, 가족 간의 신뢰는 회복되지 않았다.

1183년 젊은 헨리가 질병으로 사망했고, 1186년에는 조프리가 마상 시합 중 사고로 사망했다. 이제 리처드와 존만이 남았는데, 1189년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립 2세와 동맹을 맺고 다시 한 번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전쟁 중에 헨리 2세는 병으로 쇠약해졌고, 결국 르망에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내 자식들에게 지다니"였다고 한다.

헨리 2세의 유산

헨리 2세는 중세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내전으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특히 사법 제도의 개혁은 영국 법률 발전의 기초를 놓았다.

헨리가 구축한 보통법 체계는 영미법(Anglo-American law)의 근간이 되었다. 판례를 중시하고, 배심원 제도를 활용하며, 형식적인 법적 절차를 중요시하는 전통은 헨리 시대에 형성되었다. 오늘날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영연방 국가들의 법체계는 여전히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행정 제도 면에서도 헨리의 공헌은 크다. 그는 능력 있는 관리들을 중용하여 효율적인 관료제를 구축했다. 특히 '치치스터의 리처드'나 '솔즈베리의 로저' 같은 유능한 행정가들이 왕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실행했다.

헨리 2세의 앙주 제국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의 아들들과 후손들은 점차 대륙의 영토를 상실했다. 그러나 그가 잉글랜드에 구축한 통치 체제는 수세기 동안 영국 정치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의 통치는 중세 잉글랜드가 유럽의 중요한 권력으로 부상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결론

헨리 2세의 통치는 영국 역사의 결정적인 장을 열었다. 그는 내전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중앙 정부를 건설했으며, 효율적인 법 체계를 확립했다. 영국 역사에서 헨리의 통치 기간은 단순한 정치적 안정을 넘어, 영국의 법적, 행정적 발전의 초석을 놓은 시기였다.

헨리의 위대한 업적은 그가 직면한 어려움을 생각할 때 더욱 돋보인다.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부담, 교회와의 갈등, 가족 내부의 반란 등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잉글랜드를 강력하고 안정된 국가로 변모시켰다.

앙주 제국은 결국 몰락했지만, 헨리가 잉글랜드에 남긴 제도적 유산은 영구적이었다. 오늘날 영국과 그 영향을 받은 국가들의 법률, 정치, 행정 체계에는 헨리 2세 시대의 개혁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 영국 국가의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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