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21. 존 왕과 마그나카르타 - 귀족의 저항이 만든 법치의 기틀

SSSCH 2025. 5. 22. 00:01
반응형

리처드 사자심왕의 죽음과 존 왕의 등극

12세기 말 영국은 리처드 사자심왕의 십자군 원정과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큰 혼란을 겪는다. 1199년 4월, 프랑스 리무쟁 지방의 샬뤼 성 포위 중 부상을 입고 사망한 리처드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존이 왕위에 오른다. 존은 이미 '땅 없는 왕자'(Lackland)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인물로, 형제들 중 왕위 계승 순위가 낮아 처음에는 영지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형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왕위를 물려받게 된 존은 처음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다.

존 왕이 즉위할 당시 플랜태저넷 왕가는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광대한 영토도 지배하고 있었다. 노르망디, 앙주, 메인, 아키텐 등 프랑스 영토의 상당 부분이 영국 왕실의 소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존은 프랑스 왕 필립 2세(필립 오귀스트)와의 갈등에 곧바로 휘말리게 된다.

프랑스 영토의 상실과 명예 실추

필립 2세는 존 왕의 취약한 입지를 재빨리 파악하고 이를 활용했다. 존은 조카인 아서(존의 형 제프리의 아들)를 제거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이를 구실로 필립 2세는 존의 프랑스 영토를 공격했다. 처음에 존은 자신의 외교적 수완을 과신했으나, 1204년 노르망디가 함락되면서 상황은 급속히 악화됐다.

1206년까지 앙주, 메인, 투렌, 브리타니, 노르망디 등 플랜태저넷 가문의 핵심 영토들을 모두 상실한 존은 오직 가스코뉴와 포이투 일부만을 간신히 손에 쥘 수 있었다. 이 패배는 단순한 영토 손실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노르망디는 윌리엄 정복왕 이래 영국 왕실의 뿌리가 된 땅이었고, 이 땅을 잃은 것은 존에게 큰 명예 실추였다.

이후 존은 여러 차례 프랑스 영토 탈환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1214년 부빈 전투에서의 패배는 결정적이었다. 프랑스와 독일 제국의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지원했으나, 필립 2세에게 완패하면서 존의 대륙 영토 회복 꿈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교회와의 갈등과 국가 흑문

존 왕의 어려움은 프랑스와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1205년부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스티븐 랭턴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존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측근을 대주교로 앉히려 했다.

이에 교황은 1208년 영국 전체에 국가 흑문(종교적 제재)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세례와 결혼식을 제외한 모든 성사가 중단됐고, 죽은 자들은 제대로 된 장례식 없이 매장됐다. 이 상황은 1213년까지 지속됐다.

결국 존은 굴복해 스티븐 랭턴의 대주교 임명을 인정하고, 영국과 아일랜드를 교황청의 봉토로 바치는 굴욕적인 협정을 맺는다. 매년 1,000마르크의 조공도 약속했다. 이로써 흑문은 해제됐지만, 이 사건은 존의 명성에 또 다른 큰 타격을 주었다.

과도한 과세와 귀족들의 불만

존 왕은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봉건적 권리를 악용하며 과도한 세금을 거두었다. 기사 서임세(Scutage)를 무려 11차례나 부과했고, 이는 그의 아버지 헨리 2세가 35년 통치 기간 동안 7번 부과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횟수였다. 또한 상속세를 과도하게 책정하고, 귀족 자녀들의 결혼에 간섭하며 금전적 이득을 취했다.

특히 존은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왕실 법원을 이용해 귀족들에게 과도한 벌금을 부과했다. 또한 왕에 대한 충성심 의심만으로 귀족들의 자녀를 인질로 잡아두었다. 이러한 행위들은 귀족들 사이에서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더불어 존은 왕실 재정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효율적이었지만, 그 방식이 너무 가혹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세금 징수관들은 엄격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대했고, 이는 전국적인 원망을 샀다.

귀족들의 반란과 마그나카르타의 탄생

1214년 부빈 전투 패배 후, 귀족들의 불만은 폭발했다. 1215년 1월, 귀족들은 존 왕에게 헨리 1세의 대헌장(Charter of Liberties)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귀족들은 무력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5월 17일, 반란군은 런던을 점령했고, 존 왕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6월 15일, 런던 근교 러니미드 초원에서 존 왕과 귀족들은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에 서명했다. 이 문서는 원래 63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나, 이후 여러 차례 수정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형태가 되었다.

마그나카르타는 표면적으로는 귀족들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한 문서였지만, 그 안에는 영국 헌정사의 근간이 될 몇 가지 중요한 원칙들이 담겨 있었다:

  1. 왕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
  2. 적법한 절차 없이는 어떤 자유인도 체포, 투옥, 재산 몰수, 추방될 수 없다는 원칙
  3.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
  4. 과세에 대한 의회의 동의 필요

특히 39조와 40조는 가장 유명한 조항으로, "어떠한 자유인도 동료들의 합법적 판결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투옥, 재산 몰수, 법외 방치, 추방되거나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받지 않는다"와 "우리는 누구에게도 정의와 권리를 팔지 않을 것이며, 거부하지 않을 것이며, 지연시키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전의 발발과 존 왕의 죽음

그러나 존 왕은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한 직후부터 이를 무효화하려 했다. 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호소해 마그나카르타를 무효화하는 교황 칙서를 얻어냈고, 이는 귀족들과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귀족들은 프랑스 왕세자 루이(후의 루이 8세)를 영국의 왕으로 초청했고, 루이는 1216년 5월 런던에 도착해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내전은 영국 전역으로 확산됐고, 존 왕은 동부 잉글랜드에서 반란군을 상대로 작전을 펼치던 중 1216년 10월 18일 넷워크에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존의 죽음으로 그의 9살 아들 헨리가 헨리 3세로 즉위했고,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이 섭정이 되었다. 마셜은 마그나카르타를 수정해 재발행함으로써 반란 귀족들을 회유했고, 1217년 링컨 전투와 샌드위치 해전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면서 내전은 종결됐다.

마그나카르타의 영향과 의의

마그나카르타는 서명 당시에는 단지 봉건적 귀족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문서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는 크게 확장됐다. 13세기와 14세기를 거치며 여러 차례 재확인되고 수정되면서, 마그나카르타는 점차 모든 자유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문서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특히 17세기 영국 내전과 명예혁명 시기에 의회파와 법률가들은 마그나카르타를 왕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무기로 활용했다. 찰스 1세와 제임스 2세의 독단적 통치에 맞서, 마그나카르타는 법치주의와 의회 주권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더 나아가 마그나카르타의 정신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국 독립선언서와 헌법, 프랑스 인권선언, UN 세계인권선언 등 현대의 많은 헌법과 인권 문서들이 마그나카르타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자유와 재산을 침해받지 않는다는 원칙은 현대 법치국가의 핵심 원리가 되었다.

존 왕에 대한 역사적 평가

존 왕은 영국 역사상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왕 중 한 명이다. 그의 통치 시기에 프랑스 영토 대부분이 상실되었고, 교회와의 갈등으로 국가 흑문이라는 굴욕을 겪었으며, 과도한 과세와 자의적인 통치로 귀족들의 반란을 초래했다.

그러나 최근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존에 대한 평가를 재고하고 있다. 그가 행정적으로는 효율적이었고, 앵글로-노르만 귀족들의 이중 충성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법원 제도를 개선하고 해군력을 강화하는 등 긍정적인 업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존 왕의 가장 큰 역설은 그의 실패가 오히려 영국 헌정사의 가장 중요한 문서인 마그나카르타를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그의 독단적인 통치가 없었다면, 법치주의와 왕권 제한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일찍 영국에 뿌리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결론

존 왕과 마그나카르타의 이야기는 단순한 권력 투쟁을 넘어 영국 헌정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한 왕의 실패와 귀족들의 저항이 법치주의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긴 것이다. 마그나카르타는 비록 그 당시에는 제한된 의미를 가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보편적 원칙으로 발전했다.

중세 봉건 사회에서 시작된 이 문서가 오늘날 전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위대함을 보여준다. 존 왕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영국과 세계 민주주의의 큰 성공이 된 것이다. 마그나카르타는 법이 왕보다 위에 있다는 획기적인 사상을 담아내며,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