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폭풍우가 몰아치다
793년 6월 8일, 북쪽 바다에서 온 낯선 배들이 노섬브리아 해안의 린디스팜 수도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화로운 수도원 생활을 하던 수사들은 그날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이 침략자들은 수도원의 보물을 약탈하고, 많은 수사들을 학살했으며, 일부는 노예로 끌고 갔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는 "이교도들이 하느님의 교회를 피로 더럽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은 영국 역사에서 바이킹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지역에서 나온 북게르만족이다. '바이킹'이라는 단어는 '만(bay)'이나 '피오르드'에서 온 단어로, 이들이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며 약탈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8세기 말부터 11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바이킹 시대 동안 이들은 단순한 약탈자에서 정착민, 그리고 결국 지배자로 변모해간다.
초기 바이킹 침공의 특성
린디스팜 습격 이후 수십 년 동안 바이킹은 간헐적으로 영국 해안을 습격했다. 이 시기 바이킹의 특징은 '히트 앤드 런' 전술이었다. 빠른 드라카(drakkar)라 불리는 바이킹 배를 타고 갑작스럽게 등장해 약탈한 후 신속하게 사라지는 방식이었다. 초기 침략자들이 노린 것은 주로 해안가에 위치한 수도원들이었다. 수도원은 방어력이 약했고, 금과 은으로 만든 성물과 식량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바이킹은 아일랜드 해, 셰틀랜드, 오크니, 헤브리디스 등 대영제도 전역을 습격 대상으로 삼았다. 796년 아이오나 수도원 습격, 806년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약탈 등 종교 시설이 주요 표적이 되었다. 그들의 침략은 기독교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당시 유럽 기독교인들은 바이킹을 신의 분노가 구현된 존재로 여겼다.
대군단(Great Heathen Army)의 등장
초기 소규모 약탈에서 상황이 급변한 것은 865년 '위대한 이교도 군단'(Great Heathen Army)이 영국 동부 해안에 상륙하면서부터다. 이 군단은 전설적인 바이킹 지도자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들인 이바르(Ivar the Boneless), 하프단(Halfdan), 우베(Ubba) 등이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
이 대군단은 이전의 약탈자들과 달리 정복과 정착을 목표로 했다. 그들은 먼저 동앵글리아를 점령하고 현지 왕 에드먼드를 잔인하게 처형했다. 이어서 노섬브리아의 주요 도시인 요크(옛 에보라쿰)를 함락시켰다. 바이킹은 요크를 '요르빅'이라 부르며 그들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867년부터 870년 사이에 바이킹은 머시아와 웨섹스까지 진출하며 영국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었다. 당시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서로 분열되어 있었고, 갑작스러운 대규모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강한 저항을 보인 곳은 웨섹스 왕국이었다.
압박받는 앵글로색슨 사회
바이킹의 침략은 앵글로색슨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먼저 수도원과 교회의 파괴는 당시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가 무너짐을 의미했다. 많은 필사본과 예술품들이 약탈되거나 불태워졌고, 지식의 전달이 단절되었다.
또한 바이킹의 침략으로 인한 불안정은 앵글로색슨 왕국들 사이의 권력 구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노섬브리아와 머시아 같은 강대국들이 쇠퇴했고,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약했던 웨섹스가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바이킹 침략의 또 다른 영향은 도시의 변화였다. 그들은 요크, 린컨, 더비, 스탬포드, 레스터 등의 도시를 '다네로우'(Danelaw, 덴마크인의 법이 적용되는 지역)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이들 도시는 바이킹 통치 하에서 무역과 수공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스칸디나비아 문화의 유입
바이킹은 약탈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들이 영국에 남긴 문화적 영향도 상당했다. 무엇보다 언어에 큰 흔적을 남겼다. 현대 영어에서 'sky'(하늘), 'egg'(달걀), 'knife'(칼), 'die'(죽다) 등 일상적인 단어들이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유래했다. 또한 '-by'(마을), '-thorp'(농장), '-toft'(집터) 등으로 끝나는 지명들(예: 휘트비, 그림스비)은 바이킹 정착의 증거다.
법과 행정 체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바이킹은 '팅'(thing)이라 불리는 주민 회의를 통해 지역 문제를 결정했는데, 이는 기존 앵글로색슨의 '위탄'(witan)과 유사하면서도 더 민주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바이킹이 가져온 신화와 예술 양식도 앵글로색슨 문화와 융합되었다. 오딘, 토르 같은 북유럽 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퍼졌고, 바이킹 특유의 동물 문양과 노트 패턴이 장신구와 석조물에 반영되었다.
린디스팜 복음서와 문화 파괴
바이킹 침략의 상징적 피해 사례로 린디스팜 복음서를 들 수 있다. 7세기에 제작된 이 필사본은 당대 영국 기독교 예술의 정수로, 화려한 채색과 정교한 세공으로 유명하다. 바이킹의 린디스팜 습격 당시 수사들은 복음서와 성 커스버트의 유골을 가지고 피신했다. 이후 수세기 동안 이 보물들은 영국 북부 여러 지역을 떠돌다가 결국 더럼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많은 문화유산이 린디스팜 복음서처럼 운이 좋지 않았다. 수많은 필사본과 예술품이 불에 타거나 약탈되었고, 바이킹 침략기 동안 앵글로색슨 문화 생산은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노섬브리아의 황금기를 대표했던 문화적 성취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사라졌다.
앵글로색슨의 대응과 군사 혁신
바이킹의 위협에 맞서 앵글로색슨은 방어 체계를 혁신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버그'(burh)라는 요새화된 정착지의 건설이었다. 이는 미래의 웨섹스 왕 알프레드가 주도한 전략으로, 전략적 위치에 방어용 정착지를 건설하고 주변 시골 지역의 주민들이 위험할 때 대피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군사 조직도 개편했다. '파이어드'(fyrd)라 불리는 민병대 시스템을 강화해 지역별로 빠르게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했다. 바이킹 전사들은 개인적으로 뛰어난 전투력을 가졌지만, 앵글로색슨이 조직적인 방어 체계를 갖추면서 점차 우위를 잃기 시작했다.
해군력 강화도 중요한 변화였다. 바이킹의 우수한 선박 기술에 대응하기 위해 알프레드 왕은 새로운 디자인의 전함을 만들었다. 이 배들은 바이킹 배보다 더 크고 안정적이었으며, 해안 방어에 효과적이었다.
결론
8세기 말 린디스팜 수도원 습격으로 시작된 바이킹의 침공은 영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초기의 약탈자에서 점차 정복자로 변모한 바이킹은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권력 구도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영국 사회와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린디스팜, 아이오나와 같은 종교 중심지의 파괴는 앵글로색슨 문화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바이킹의 위협은 앵글로색슨 사회가 더 강한 방어 체계와 통합된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두 문화의 충돌과 융합은 영국의 언어, 법률, 행정 제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린디스팜에서 시작된 바이킹의 폭풍은 영국을 영원히 변화시켰으며,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 영국 문화의 다양한 측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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