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 부족의 브리튼 정착 과정
5세기 초 로마군이 철수한 후, 브리튼은 외부 침략에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북쪽에서는 픽트족의 위협이 있었고, 동쪽 해안에서는 게르만계 부족들의 침입이 증가했다.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으로 구성된 이 게르만계 부족들은 처음에는 주로 해안 약탈자로 등장했지만, 점차 정착민으로 변모해갔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브리튼 지도자 보르티게른이 픽트족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색슨 용병 헹기스트와 호르사를 초청한 것이 게르만 부족 정착의 시작이었다. 8세기 역사가 비드는 그의 저서 『영국 교회사』에서 이들이 켄트 지역에 정착했으며, 이후 더 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브리튼으로 이주해왔다고 기록했다.
현대 고고학 연구는 이러한 단순한 '초청-배신-정복'의 서사보다 더 복잡한 과정을 보여준다. 게르만 부족의 이주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수십 년, 심지어 수세기에 걸친 점진적 과정이었다. 로마 말기에 이미 '연방군'으로서 게르만 병사들이 브리튼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초기 정착의 핵심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주 패턴도 지역에 따라 다양했다. 켄트 지역에서는 주트족이 우세했으며, 템스강 유역과 남부 해안에는 색슨족이, 동부와 북부 지역에는 앵글족이 주로 정착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았으며, 많은 지역에서 다양한 부족의 혼합이 이루어졌다.
정착 초기에는 게르만 이주민과 브리튼 원주민 사이에 갈등이 빈번했다. 6세기 역사가 기다스는 게르만족의 잔혹한 약탈과 브리튼 도시들의 파괴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관계 패턴을 보여준다. 일부 지역에서는 폭력적 정복이 있었던 반면, 다른 곳에서는 무역, 혼인 등을 통한 평화적 공존과 점진적 동화가 이루어졌다.
6세기 중반까지, 게르만계 정착민들은 브리튼 동부와 남부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켈트계 브리튼인들은 주로 서부와 북부 지역으로 밀려났다. 이 시기에 현재 잉글랜드의 기초가 되는 앵글로-색슨 왕국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헤프타키(일곱 왕국)의 형성과 구조
7세기 초에 이르러, 앵글로-색슨 영국에는 일곱 개의 주요 왕국이 등장했다. 이를 '헤프타키'라고 부르는데, 헬라어로 '일곱 통치'를 의미한다. 이 용어는 16세기 역사가들이 소개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이런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곱 왕국은 노섬브리아, 머시아, 동앵글리아, 에식스, 켄트, 서섹스, 웨섹스였다.
노섬브리아는 이름 그대로 '험버강 북쪽'에 위치한 왕국으로, 원래 베르니시아와 데이라 두 왕국이 통합되어 형성되었다. 이 왕국은 북쪽으로는 포스강까지, 서쪽으로는 컴브리아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7세기 에드윈, 오스왈드, 오스위 같은 강력한 왕들 하에서 노섬브리아는 잉글랜드 최강의 왕국으로 부상했으며,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누렸다.
머시아는 중부 잉글랜드에 위치한 왕국으로, '경계의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웨일스와 앵글로-색슨 영토 사이의 경계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약했으나, 7세기 중반 펜다 왕과 8세기 에텔발드, 오파 왕 시기에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동앵글리아는 현재의 노퍽과 서퍽 지역을 포함하는 동부 해안 왕국이었다. 이 지역은 '북부 사람들'과 '남부 사람들'의 영토로 구성되었다.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으나, 7-8세기에는 머시아와 노섬브리아의 압력을 받았다.
에식스는 '동부 색슨인'의 영토로, 현재의 에식스 지역과 런던 일부를 포함했다. 초기에는 중요한 왕국이었으나, 7세기 이후 영향력이 감소했다. 이 왕국은 특히 머시아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켄트는 가장 먼저 형성된 앵글로-색슨 왕국으로, 주트족이 세웠다는 전통이 있다. 대륙과 가장 가까운 위치 덕분에, 켄트는 유럽과의 무역 및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597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 활동이 시작된 곳도 바로 켄트였다.
서섹스는 '남부 색슨인'의 영토로, 현재의 서섹스 지역에 위치했다.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했으나, 뚜렷한 역사적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웨섹스는 '서부 색슨인'의 영토로, 초기에는 템스강 유역에 정착했으나 점차 남서부로 영역을 확장했다. 7세기까지는 상대적으로 약했으나, 9세기 알프레드 대왕 시기에 바이킹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심지가 되면서 부상했으며, 결국 통일 잉글랜드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일곱 왕국 외에도 더 작은 왕국들이 존재했다. 머시아 내의 휘친사에타스, 마곤새타스, 노섬브리아 내의 린디시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큰 왕국에 흡수되었다.
앵글로-색슨 사회 구조와 법
앵글로-색슨 사회는 분명한 계층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최상층에는 왕이 있었으며, 그 아래로 귀족, 자유민, 반자유민, 노예 등으로 나뉘었다.
왕의 권력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그는 부족 지도자에서 점차 발전한 존재로, 초기에는 주로 전쟁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왕의 권위는 그의 전투 능력, 부의 분배 능력, 그리고 신성한 혈통에 기반했다. 대부분의 앵글로-색슨 왕가는 신적 조상(보통 북유럽 신화의 신 오딘/보던)에게서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귀족층은 처음에는 혈통에 기반했으나, 7세기 이후에는 점차 왕에 대한 봉사와 토지 소유에 기반한 계층으로 변화했다. 특히 전사 귀족인 테인은 왕의 친위대 역할을 하며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자유민은 앵글로-색슨 사회의 기본 구성원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무기를 들 권리와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지역 회의인 민회에 참여하여 발언권을 가졌다.
노예는 사회 최하층으로, 전쟁 포로, 채무 불이행자, 범죄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앵글로-색슨 시대 후기로 갈수록 기독교의 영향으로 노예제는 점차 쇠퇴했다.
앵글로-색슨 사회는 혈연에 기반한 강한 결속을 특징으로 했다. 개인은 친족 집단의 일원으로서 보호받고 책임을 졌다. 살인이나 상해와 같은 범죄에 대해서는 피해자 가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는 체계가 있었으며, 이 배상금의 액수는 피해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졌다.
법적 체계로는 여러 왕국에서 법전이 편찬되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켄트의 에텔베르트 왕이 약 602-603년경 발표한 법전이다. 이후 웨섹스의 이네 왕, 머시아의 오파 왕, 웨섹스의 알프레드 대왕 등이 법전을 발표했다. 이 법전들은 배상금 체계, 교회 보호, 토지 소유 등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었다.
지방 통치는 '샤이어'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졌다. 샤이어는 오늘날 영국 카운티의 전신으로, 각 샤이어는 왕의 대리인인 '알더만' 또는 '셰리프'가 다스렸다. 샤이어 법정은 지역 사건을 심리했으며, 민회는 지역 문제를 논의하는 장이었다.
생활양식과 경제 활동
앵글로-색슨인들은 주로 농업 경제에 의존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마을에 모여 살며 주변 토지를 경작했다. 일반적인 마을은 20-30가구로 구성되었고, 각 가구는 마을 주변의 공동 경작지에서 자신의 몫을 가졌다.
농업 방식으로는 '오픈 필드' 시스템이 흔했다. 이는 마을 공동체가 큰 경작지를 여러 개의 세장형 띠로 나누어 각 가구에 할당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하면 좋은 토지와 나쁜 토지가 공평하게 분배될 수 있었다. 주요 작물로는 밀, 보리, 귀리, 호밀 등의 곡물과 콩, 완두콩 같은 채소가 있었다.
가축 사육도 중요했다. 소는 고기와 우유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농경에 필요한 견인력을 제공했다. 양은 양모와 고기를 위해 사육되었으며, 돼지는 숲에서 도토리를 먹으며 반야생 상태로 키워졌다.
수공업으로는 금속 가공, 목공, 도자기 제작, 직물 생산 등이 있었다. 특히 앵글로-색슨 시대의 금속 공예는 높은 수준에 있었는데, 서튼 후 유적에서 발견된 정교한 금속 장신구와 무기는 이를 증명한다.
무역은 초기에는 제한적이었으나, 7세기 이후 활발해졌다. 특히 켄트와 동앵글리아는 대륙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양모, 직물, 금속 제품이 있었으며, 수입품으로는 와인, 유리제품, 보석, 향신료 등 사치품이 있었다. 8세기에는 런던, 이프스위치, 요크 등이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부상했다.
화폐 시스템도 발전했다. 7세기 중반부터 '스캣타스'라 불리는 은화가 유통되기 시작했으며, 8세기 후반 오파 왕 시기에는 보다 표준화된 '페니' 화폐가 도입되었다.
종교적 변화와 기독교화
앵글로-색슨인들은 원래 게르만 다신교를 믿었다. 그들은 오딘, 토르, 티우, 프레이야 같은 신들을 숭배했으며, 이들의 이름은 오늘날 영어 요일 이름(Wednesday, Thursday, Tuesday)에 남아있다. 종교 의식은 주로 자연 속 신성한 장소(나무, 우물, 언덕 등)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6세기 말부터 앵글로-색슨 사회의 기독교화가 시작되었다. 597년,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켄트로 파견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켄트 왕 에텔베르트와 그의 프랑크계 기독교 왕비 베르타의 지원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켄터베리에 수도원을 세우고 성공적으로 선교를 펼쳤다.
북부에서는 아일랜드-켈트 기독교의 영향이 컸다. 635년 아이오나 수도원에서 파견된 아이단은 린디스판 수도원을 설립하고, 노섬브리아의 기독교화를 주도했다. 이로써 앵글로-색슨 영국에서는 로마식 기독교와 켈트식 기독교라는 두 전통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 두 전통은 부활절 날짜 계산, 수도원 규율, 성직자 두발 형태 등 여러 관행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664년 휘트비 종교회의에서 논의되었으며, 결국 로마식 관행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켈트 기독교의 영향, 특히 그 수도원 전통과 미술 스타일은 앵글로-색슨 기독교 문화에 깊이 각인되었다.
기독교의 확산은 앵글로-색슨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수도원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교회는 새로운 권위 체계를 도입했다. 또한 라틴어 문자의 도입은 문자 문화의 발전을 촉진했다. 특히 노섬브리아의 베다와 같은 수도사 학자들은 앵글로-색슨 지식 전통의 기초를 놓았다.
교회는 또한 국제적 네트워크의 일부로서, 앵글로-색슨 왕국들을 더 넓은 유럽 세계와 연결시켰다. 켄터베리 대주교는 모든 앵글로-색슨 교회의 수장으로, 종종 정치적 통합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문화적 성취와 예술
앵글로-색슨 시대의 문화적 성취는 특히 문학과 미술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이 시대의 문학은 주로 구전 전통에 기반했으며, 많은 시들이 영웅의 업적이나 종교적 주제를 다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베오울프'가 있다. 이 영웅 서사시는 8세기경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10세기경 문자로 기록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문학 작품으로는 '핀스부르그의 전투', '월더' 등이 있다.
종교 문학도 발전했다. 노섬브리아의 케드먼은 최초의 알려진 앵글로-색슨 기독교 시인으로, 성경 이야기를 앵글로-색슨 전통 시 형식으로 표현했다. 8세기의 키네울프는 「엘레네」, 「그리스도」 같은 종교시를 남겼다.
역사서로는 8세기 베다의 『영국 교회사』가 가장 중요하다. 이 책은 앵글로-색슨 시대 초기 역사의 주요 정보원으로, 학문적 정확성을 추구한 선구적인 역사서다.
미술 분야에서는 금속 공예와 필사본 장식이 특히 발달했다. 서튼 후 유적에서 발견된 금은 제품들은 앵글로-색슨 금속 공예의 정교함을 보여준다. 또한 린디스판 복음서와 더럼 복음서 같은 필사본들은 켈트와 앵글로-색슨, 심지어 지중해 스타일이 융합된 독특한 '인슐라 미술'의 걸작이다.
건축에서는 초기에는 목조 건물이 주를 이루었으나, 7세기 이후 석조 교회와 수도원이 증가했다. 요크의 성 피터 교회, 모나스테리움과 자로우 수도원 등이 대표적이다.
언어적으로는 고대 영어가 발전했다. 이는 현대 영어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게르만계 언어지만 켈트어, 라틴어, 노르드어 등의 영향을 받았다. 알프레드 대왕 시기에는 라틴어 서적의 고대 영어 번역이 장려되어, 문자 문화가 더욱 확산되었다.
권력 투쟁과 브르트발다
헤프타키 시대 내내, 일곱 왕국들은 권력과 영향력을 두고 경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 왕국이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패턴이 나타났다. 이런 우세한 왕국의 지도자를 '브르트발다' 또는 '브리튼의 지배자'라고 불렀다.
베다는 『영국 교회사』에서 일곱 명의 브르트발다를 언급했다: 켄트의 에텔베르트, 동앵글리아의 레드발드, 노섬브리아의 에드윈, 오스왈드, 오스위, 그리고 웨섹스의 케드왈라와 이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 목록에 머시아의 에텔발드와 오파, 그리고 웨섹스의 에그베르트를 추가했다.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는 켄트가 에텔베르트 왕 하에서 우세했다. 에텔베르트는 켄트뿐만 아니라 템스강 남쪽의 여러 지역을 지배했으며, 기독교의 도입으로 유럽 대륙과의 연결도 강화했다.
7세기 전반에는 노섬브리아가 에드윈, 오스왈드, 오스위 왕 하에서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특히 에드윈은 북부 웨일스까지 정복하고, 상당 기간 잉글랜드 최강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633년 머시아의 펜다와 동맹한 웨일스 왕 카드왈론에게 패배하면서 노섬브리아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후계자 오스왈드는 일시적으로 노섬브리아의 위상을 회복했으나, 642년 펜다에게 패배해 사망했다.
7세기 중반부터는 머시아가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이교도 왕 펜다는 노섬브리아와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펜다의 사망 후 머시아는 잠시 주춤했으나, 7세기 후반 울프헤레와 에텔레드 하에서 다시 강화되었다.
8세기에는 머시아의 에텔발드와 오파가 연이어 강력한 브르트발다가 되었다. 특히 오파는 머시아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웨일스 접경에 '오파의 제방'이라는 거대한 흙 방벽을 건설해 영토를 방어했다. 그는 또한 샤르마뉴 황제와 동맹을 맺으며 국제적 위상도 높였다.
9세기 초에는 웨섹스의 에그베르트가 머시아를 물리치고 브르트발다가 되었다. 에그베르트의 성공은 후에 웨섹스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통일의 중심이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런 경쟁 속에서도, 앵글로-색슨 왕국들 사이에는 문화적, 언어적 공통성이 존재했다. 기독교의 확산은 이런 공통성을 더욱 강화했으며, 점차 느슨한 형태의 정체성 - '앵글로-색슨' 또는 '잉글리쉬' - 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결론
앵글로-색슨 일곱 왕국의 시대는 브리튼에서 잉글랜드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중요한 시기였다. 게르만계 이주민들이 브리튼 동부와 남부에 정착하면서, 이 지역의 언어, 문화, 사회 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로마-브리튼의 도시 문명은 쇠퇴했고, 대신 게르만적 요소가 강한 농촌 기반 사회가 발전했다.
헤프타키 시대는 정치적 분열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독특한 앵글로-색슨 문화가 형성되고 발전한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기독교의 도입은 문자 문화의 발전, 라틴 문명과의 재연결, 국제적 네트워크 형성 등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노섬브리아의 문화적 황금기, 머시아의 정치적 패권, 웨섹스의 부상 등은 이 시대의 중요한 이정표들이다.
앵글로-색슨 사회는 독특한 법체계, 경제 패턴, 문학 전통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유산은 이후 영국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영국 문화의 기초를 형성했다. 헤프타키에서 시작된 지방 분권적 전통, 법치의 원칙, 민회와 같은 참여 제도 등은 영국 정치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9세기 바이킹의 침입은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지형도를 크게 바꾸었다. 노섬브리아, 머시아, 동앵글리아가 바이킹에게 정복되면서, 웨섹스만이 독립을 유지했다. 알프레드 대왕의 지도 하에 웨섹스는 바이킹에 대한 저항의 중심이 되었고, 이후 그의 후손들은 점차 잉글랜드를 재통일해나갔다. 이로써 헤프타키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통일 잉글랜드 왕국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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