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8. 5세기 로마 철수와 힘의 공백 - 제국의 종말과 혼란의 시작

SSSCH 2025. 5. 19.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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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위기와 브리튼 방어선의 약화

로마 제국은 3세기부터 내부적 혼란과 외부 압력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군인 황제' 시대의 정치적 불안정, 경제 침체, 전염병 유행, 그리고 제국 변경에서의 지속적인 야만족 침입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4세기 후반에 이르러 훈족의 서진은 게르만 부족들을 로마 제국 내부로 밀어내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켰다. 이 시기 브리튼은 제국의 서북 변경에 위치한 원격 속주로, 점차 중앙 정부의 관심과 자원이 줄어드는 상황에 처했다.

브리튼의 방어 체계는 하드리아누스 방벽, 색슨 해안(Saxon Shore) 요새, 그리고 내륙 도시들의 방어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4세기 후반, 이 체계는 두 가지 위협에 직면했다. 북쪽에서는 픽트족과 스코티족의 침입이 증가했고, 동쪽 해안에서는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 등 게르만계 해적들의 습격이 빈번해졌다. 367년 '야만인의 대음모(Barbarian Conspiracy)'로 알려진 사건에서는 이러한 부족들이 조직적으로 연합해 브리튼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비록 테오도시우스 장군이 파견되어 상황을 수습했지만, 이는 브리튼 방어 체계의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4세기 말, 로마 제국의 마지막 통일자인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의 사망 후, 제국은 공식적으로 동서로 분할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점점 더 이탈리아와 중부 지중해 지역 방어에 집중했고, 브리튼과 같은 원격 속주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 치하에서는 라인강 방어선이 무너지며 갈리아가 야만족의 침입에 크게 노출되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브리튼의 상황에 영향을 미쳤다.

로마군의 단계적 철수와 마그누스 막시무스 반란

브리튼에서 로마군의 철수는 단일 사건이 아닌 수십 년에 걸친 과정이었다. 이미 3세기 말부터 브리튼 주둔 군대의 규모는 점진적으로 감소했다. 주요 전환점은 383년 브리튼 군 사령관 마그누스 막시무스(Magnus Maximus)의 반란이었다. 그는 군대 대부분을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가 서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Gratian)를 축출했다. 비록 막시무스는 388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패배했지만, 그가 브리튼에서 빼낸 군대는 대부분 섬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군대 차출이 있었다. 395년 유제니우스(Eugenius) 반란 진압, 401년 스틸리코(Stilicho)의 이탈리아 방어, 그리고 407년 콘스탄티누스 3세(Constantine III)의 반란 등의 사건으로 브리튼의 군사력은 계속 약화되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3세는 브리튼에 남아있던 거의 모든 정규군을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가, 사실상 브리튼의 로마군 주둔을 종결시켰다.

당시 사료에 의하면, 410년경 브리튼 지도자들이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는 "브리튼인들은 스스로를 방어하라(Britannici should look to their own defence)"는 유명한 답변을 보냈다. 이는 실질적으로 로마 중앙 정부가 브리튼 포기를 선언한 순간으로 해석된다. 역사가 조시무스(Zosimus)는 이 시기에 브리튼 도시들이 "로마의 법을 버리고 자체적인 방식으로 살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도시 쇠퇴와 빌라 시스템 붕괴

로마군의 철수는 브리튼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도시 생활의 급격한 쇠퇴였다. 로마 도시들은 군사력과 행정력의 중심이었으며, 또한 군대와 관리들이 주요 소비자였다. 이들의 부재는 도시 경제의 근간을 무너뜨렸다.

고고학적 증거는 5세기 초반부터 대부분의 로마-브리튼 도시들이 급격히 쇠퇴했음을 보여준다. 실로체스터(Silchester), 랭커스터(Lancaster), 글로스터(Gloucester) 등 주요 도시들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층위에서는 목조 건물이 석조 건물을 대체하고, 기존 로마식 구획이 무시되며, 폐기물 처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흔적이 발견된다. 샐리스버리(Salisbury) 근처의 올드 세럼(Old Sarum)과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로마 도시가 완전히 폐허가 되고 인근에 새로운 정착지가 형성되기도 했다.

도시의 일부 공공 건물들은 다른 용도로 전용되었다. 예를 들어, 린컨(Lincoln)의 포럼은 5세기 초 목조 교회로 바뀌었다. 이는 로마 행정 기능의 상실과 기독교의 지속적 영향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많은 도시들에서 이전의 공공 목욕탕이나 신전 구역에 초라한 주거지가 들어서는 현상이 나타났다.

농촌 지역에서는 빌라(villa) 시스템의 붕괴가 진행되었다. 빌라는 로마식 대규모 농장으로, 로마화된 엘리트들의 거주지이자 경제 활동의 중심이었다. 5세기 초반부터 대부분의 빌라는 버려지거나 훨씬 소박한 형태로 사용되었다.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의 코니움(Chedworth) 빌라와 같은 고급 주택들에서는 모자이크 바닥 위에 흙바닥 오두막이 지어지는 형태의 '하향' 사용 흔적이 발견된다. 이는 로마식 생활양식의 쇠퇴와 경제적 어려움을 시사한다.

화폐 유통도 극적으로 감소했다. 로마 황제들의 초상이 새겨진 공식 주화는 더 이상 브리튼에 공급되지 않았고, 기존 주화도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물물교환 경제가 다시 우세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금속 조각을 무게로 거래하는 관행이 나타났다.

지방 권력의 재편과 지역 지도자의 부상

로마 중앙 정부의 공백 속에서 지방 권력의 재편이 일어났다. 기존 로마 행정 체계가 무너지자, 다양한 형태의 지역 리더십이 등장했다. 이 시기 브리튼의 정치 상황은 사료 부족으로 명확히 알기 어렵지만, 몇 가지 패턴을 추측할 수 있다.

첫째, 일부 지역에서는 로마화된 브리튼 엘리트들이 권력을 유지했다. 이들은 로마 행정관이나 군 지휘관 출신으로, 로마 중앙 정부가 사라진 후에도 지역 방어와 행정을 주도했다. 6세기 갈리아 역사가 기다스(Gildas)는 이 시기 "브리튼의 폭군들(tyrants of Britain)"을 언급하는데, 이는 이러한 지역 권력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특히 서부와 북부 지역에서는 켈트 부족 체계가 부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로마화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이 지역들에서는 전통적인 부족 지도자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웨일스와 콘월(Cornwall)은 이러한 켈트 부활이 가장 두드러진 지역이었다.

셋째, 일부 도시에서는 자치 의회(council)가 지역 통치를 담당했다. 이는 로마 시대 시 의회(curia)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런던(London)과 같은 주요 도시들에서는 이러한 자치 정부의 존재 가능성이 높다.

종교계, 특히 기독교 교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마 행정 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교회는 상대적으로 조직이 유지된 몇 안 되는 기관이었다. 5세기 초 브리튼 주교들이 갈리아 교회 회의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에도 조직화된 교회 구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지역 주교들은 종교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리더십도 제공했다.

이 혼란기에 등장한 전설적 인물이 바로 '브리튼의 마지막 로마인'으로 불리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Ambrosius Aurelianus)다. 6세기 역사가 기다스는 그를 "로마 혈통의 고귀한 사람으로, 그의 친척들이 왕관을 쓰고 죽임을 당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색슨족에 대항해 브리튼인들을 이끈 지도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대 아서 왕 전설의 역사적 원형 중 하나로 여겨진다.

종교와 언어의 변화

로마 철수 후 브리튼의 종교적 상황도 변화했다. 기독교는 공식적인 국가 종교로서의 지위를 잃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특히 도시와 남동부 지역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지속되었다. 5세기 초반 펠라기우스(Pelagius) 이단에 맞서 정통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갈리아에서 성 게르마누스(St. Germanus)가 브리튼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에도 활발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전통적인 켈트 신앙의 부활 징후도 나타났다. 로마 시대에 금지되었던 드루이드 의식이 일부 지역에서 다시 시행되었고, 신성한 샘, 나무, 언덕 등에 대한 숭배가 재개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혼합 현상은 특히 농촌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언어적으로는, 라틴어의 공식적 지위가 약화되었다. 로마 시대에 라틴어는 공공 행정, 교육, 상류층 교류의 언어였지만, 5세기에는 켈트어의 사용이 확대되었다. 다만 기독교 교회에서는 라틴어가 계속 사용되었고, 이는 중세 시대까지 이어졌다. 또한 일부 라틴어 차용어는 켈트어에 흡수되어 언어적 유산으로 남았다.

외부 위협의 증가와 앵글로-색슨 이주의 시작

로마의 보호막이 사라진 브리튼은 여러 외부 세력의 침입에 취약해졌다. 북쪽에서는 픽트족과 스코티족의 압력이 증가했다. 픽트족은 현재의 스코틀랜드 북동부에 거주하던 부족으로, 로마 시대에도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넘어 침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스코티족은 원래 아일랜드 출신으로, 4-5세기에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특히 현재의 아가일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동부와 남부 해안에서는 게르만계 침입자들, 특히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의 위협이 커졌다. 이들은 이미 4세기부터 해적 활동을 통해 브리튼 해안을 괴롭혔으나, 5세기 중반부터는 본격적인 정착이 시작되었다. 앵글족은 주로 현재의 독일 북부와 덴마크 반도에서 온 부족으로, 동부 해안과 북부 잉글랜드에 정착했다. 색슨족은 엘베강 하류 지역 출신으로, 주로 템스강 유역과 남부 잉글랜드에 자리잡았다. 주트족은 유틀란드 반도 출신으로 켄트(Kent)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초기 이주 과정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6세기 역사가 기다스의 저서 『브리튼의 몰락과 정복에 관하여(De Excidio et Conquestu Britanniae)』와 8세기 비드(Bede)의 『영국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브리튼 '폭군' 보르티게른(Vortigern)이 픽트족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색슨 용병 헹기스트(Hengist)와 호르사(Horsa)를 초청했으나, 이들이 후에 반란을 일으켜 브리튼을 정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 연구는 이러한 단순한 서사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주의 패턴은 지역별로 다양했으며, 폭력적 정복 대신 점진적 정착과 문화적 혼합이 더 일반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초기 단계에서는 브리튼인과 게르만계 이주민 사이의 무역, 동맹, 혼인 등을 통한 평화적 관계도 존재했다.

이 시기 게르만계 정착의 흔적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 특히 화장 묘(cremation burial)와 특징적인 도자기, 무기, 장신구 등이 동부와 남부 잉글랜드에서 발견된다. 서퍽(Suffolk)의 서튼 후(Sutton Hoo) 선박 매장지는 6-7세기 앵글로-색슨 문화의 정교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후기 로마-브리튼 사회의 문화적 연속성

로마 철수가 브리튼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문화적 연속성도 존재했다. 특히 서부 지역(현재의 웨일스, 콘월, 컴브리아)에서는 로마-브리튼 문화가 상당 기간 유지되었다.

건축 분야에서는, 목재와 진흙으로 지은 원형 또는 타원형 가옥이 석조 로마 건물을 대체했다. 이는 켈트 전통 건축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반면, 일부 중요 건물에서는 로마식 건축 기술이 계속 사용되었다. 특히 교회 건축에서는 로마 기술의 영향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예술 분야에서는, 금속 공예와 장신구 제작이 계속 발전했다. 6-7세기 웨일스와 콘월에서 제작된 금속 작품들은 켈트와 로마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특히 키독그램(chi-rho)과 같은 기독교 상징이 켈트 디자인과 함께 사용된 예가 많다.

문학과 지식 전통도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 수도원은 로마 학문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으며, 라틴어 문헌의 보존과 복사가 이루어졌다. 초기 웨일스 시와 전설에도 로마 영향의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아서 왕 전설의 초기 형태는 이 시기 로마-브리튼 저항의 기억을 담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일부 로마 행정 구역이 중세 초기까지 유지되었다. 특히 교회 교구(diocese)는 로마 시대 행정 구역을 기반으로 했다. 또한 로마의 도로망은 앵글로-색슨 시대와 그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결론

5세기 로마의 브리튼 철수는 급격한 단절이 아닌 점진적 과정이었다. 군사력 철수, 행정 체계 붕괴, 경제 침체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브리튼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도시의 쇠퇴, 빌라 시스템의 붕괴, 화폐 경제의 약화는 물질문화의 '하향' 변화를 가져왔다.

권력의 공백 속에서 다양한 지역 지도자와 정치 체제가 등장했다. 로마화된 엘리트, 켈트 부족 지도자, 도시 의회, 교회 지도자 등이 각 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이 분열된 상황은 외부 세력, 특히 앵글로-색슨족의 침입과 정착을 용이하게 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완전한 단절보다는 변형과 적응이 이루어졌다. 특히 서부 지역에서는 로마-브리튼 문화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며, 기독교는 로마 유산의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 이 시기는 고대와 중세의 전환점으로, 로마 브리튼의 해체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형성이 동시에 진행된 복잡한 시기였다.

로마 철수 후의 '암흑기'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있는 시기다. 그러나 고고학 연구의 발전과 함께, 이 시기에 대한 이해는 지속적으로 풍부해지고 있다. 문명의 급격한 몰락이라는 단순한 서사 대신, 변화와 적응, 쇠퇴와 창조가 공존했던 복잡한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로마-브리튼에서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로의 전환은 영국 역사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 과정은 연속성의 요소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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