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7. 로마 브리튼의 경제·종교 변동 - 문명의 흐름과 신앙의 확산

SSSCH 2025. 5. 1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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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식 도시와 도로망의 발달

로마가 브리튼을 정복한 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인프라 구축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체계적인 도로망 건설이다. 로마인들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제국 전역에 도로를 건설했는데, 브리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사적 목적으로 시작된 도로 건설은 점차 경제적 순환과 문화 전파의 동맥 역할을 하게 되었다.

로마식 도로는 직선적이고 견고했다. 여러 층의 자갈과 석재로 포장되어 있어 우천 시에도 이동이 가능했으며, 일정 간격마다 설치된 이정표(milestone)는 거리 정보를 제공했다. 현대 영국의 많은 주요 도로들, 특히 'A'로 시작하는 간선도로 중 상당수가 로마 시대 도로의 경로를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런던에서 요크로 향하는 어닝 스트리트(Ermine Street)나 런던과 체스터를 잇는 왓링 스트리트(Watling Street)는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도로망의 확충과 함께 도시 발전도 이루어졌다. 로마는 브리튼에 약 20개의 주요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콜체스터(Colchester), 글로스터(Gloucester), 링컨(Lincoln)과 같은 식민지(colonia)로, 퇴역 군인들을 정착시켜 로마 문화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둘째, 켄터베리(Canterbury), 세인트 올번스(St Albans)와 같은 자치시(municipium)로, 현지 엘리트들에게 제한적 자치권을 부여한 도시들이다. 셋째, 부족 수도(civitas capital)로, 기존 부족 중심지를 로마식으로 재편한 도시들이다.

이러한 도시들은 포럼, 목욕탕, 원형극장, 신전 등 로마식 공공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목욕탕은 단순한 위생시설을 넘어 사교와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간이었다. 바스(Bath)의 목욕탕 유적은 당시의 정교한 건축 기술과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경제 시스템의 변화

로마의 지배는 브리튼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화폐 경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켈트 시대에도 일부 화폐가 사용되긴 했으나, 로마 통치 하에서는 더욱 체계화된 화폐 체계가 확립되었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은 경제적 수단일 뿐만 아니라 로마 통치의 상징이기도 했다.

농업 분야에서는 빌라(villa)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빌라는 대규모 농장으로, 주로 로마인이나 로마화된 브리튼인이 소유했다. 이들은 노예나 소작농을 고용하여 경작했으며, 생산된 작물은 도시 시장이나 군대에 공급되었다.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의 코니움(Chedworth)이나 켄트(Kent)의 루툴리피아이(Lullingstone) 빌라 유적은 당시 부유층의 농촌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광업도 크게 발전했다. 로마인들은 웨일즈의 금광, 멘딥 힐스(Mendip Hills)의 납광, 콘월(Cornwall)의 주석광 등을 체계적으로 개발했다. 특히 납은 수도관과 욕조 제작에 필수적이었으며, 주석은 청동 제작에 중요했다. 또한 철광석 채굴과 제련 기술도 한층 발전했는데, 웰드(Weald) 지역은 주요 철 생산지였다.

무역 역시 활발해졌다.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됨으로써 브리튼은 광범위한 교역망에 편입되었다. 이탈리아와 갈리아에서는 고급 도자기와 와인이, 스페인에서는 올리브유가, 북아프리카에서는 곡물이 수입되었다. 반면 브리튼에서는 양모, 가죽, 곡물, 납, 주석 등이 수출되었다. 런던(Londinium)은 템스강을 통한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다양한 수입품이 발견되었다.

세금 제도도 체계화되었다. 로마는 인두세, 토지세, 상속세 등 다양한 세금을 부과했으며, 이를 위해 정기적인 인구조사와 토지 측량을 실시했다. 이렇게 걷힌 세금은 로마 제국의 군사비와 행정비로 사용되었다.

사회 구조의 변화와 로마화

로마 통치는 브리튼 사회 구조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켈트 시대의 부족 중심 사회가 로마식 계층 사회로 전환되었다. 최상층에는 로마인 총독과 고위 관리, 그리고 군 지휘관들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브리튼 엘리트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지방 행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간 계층에는 상인, 장인,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로마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계층으로, 로마식 생활방식을 따르는 것을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여겼다. 가장 하층에는 소작농, 노예, 하인들이 있었다. 노예는 주로 전쟁 포로나 채무 불이행자들로 구성되었으며, 광산, 대규모 농장, 부유한 가정에서 노동력을 제공했다.

'로마화(Romanization)'는 복잡한 과정이었다. 로마는 강제적 동화보다는 엘리트 계층을 통한 문화적 침투 전략을 선호했다. 로마식 교육을 받고 로마 시민권을 얻은 지역 엘리트들은 로마 문화의 전달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로마화의 정도는 지역과 계층에 따라 크게 달랐다. 남동부 지역은 가장 깊이 로마화된 반면, 북부와 서부 지역은 켈트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또한 도시 지역은 농촌보다 로마화가 더 진전되었으며, 상류층은 하층민보다 로마 문화를 더 많이 수용했다.

언어적 측면에서는 라틴어가 공식 언어로 자리 잡았으나, 일상생활에서는 켈트어가 계속 사용되었다. 이중 언어 사용이 일반적이었으며, 켈트어에 라틴어 단어가 차용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로마화는 물질문화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로마식 건축, 의복, 음식, 장신구 등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종교의 변화와 기독교의 유입

종교적 측면에서, 로마 통치 초기에는 켈트 신앙과 로마 종교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로마는 정복지의 신들을 자신들의 신화 체계에 편입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예를 들어, 켈트의 수신(水神) 술리스(Sulis)는 로마의 미네르바와 동일시되어 '술리스 미네르바'로 숭배되었다. 바스의 유명한 목욕탕은 원래 이 여신을 위한 신전이었다.

드루이드 종교는 초기에 로마의 탄압을 받았다. 드루이드들은 종교적 권위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는 이들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에 드루이드 의식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민간 신앙으로서의 켈트 종교적 요소는 계속 유지되었다.

동방 신비 종교도 브리튼에 유입되었다. 특히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미트라스(Mithras) 숭배, 이시스(Isis) 숭배 등이 대표적이다. 런던, 요크, 체스터 등 주요 군사 기지에서 미트라스 신전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종교들은 구원과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 입회식과 신비한 의식을 통한 소속감 제공 등으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기독교의 유입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세기 말이나 3세기 초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주로 도시 지역과 무역업자, 군인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나갔다. 기독교는 초기에 로마에서 불법 종교였기 때문에, 브리튼에서도 공개적인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후, 브리튼에서도 기독교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4세기의 고고학적 증거들 - 키독그램(chi-rho) 문양이 새겨진 물건들, 기독교식 무덤, 초기 교회 건물 등 - 은 이 시기 기독교의 확산을 보여준다. 314년 아를 공의회에 브리튼 주교들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에 이미 브리튼에 조직화된 교회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세인트 올번스(St Albans)의 알반(Alban) 순교다. 그는 로마 군인으로, 박해받는 기독교 사제를 숨겨주다가 체포되어 순교한 브리튼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순교 장소는 나중에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그러나 브리튼에서 기독교화는 완전하지 않았다. 농촌 지역과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켈트 신앙이 강하게 남아있었으며, 이는 로마 철수 후 토착 신앙 부활의 토대가 되었다.

문화적 성취와 일상생활

로마 통치 시기 브리튼의 문화적 성취는 건축물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석조 건축, 타일 포장, 수도 시설, 바닥 난방(하이포코스트) 등 로마의 선진 건축 기술이 도입되었다. 부유한 가정에서는 모자이크 바닥과 벽화로 집을 장식했는데, 도셋(Dorset)의 힌턴 세인트 메리(Hinton St Mary) 빌라에서 발견된 기독교 모티프의 모자이크는 로마 말기 기독교 확산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다.

문학과 교육 면에서는, 상류층 자녀들은 로마식 교육을 받았다. 라틴어 문법, 수사학, 고전 문학 등을 배웠으며, 일부는 더 높은 교육을 위해 갈리아나 로마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발달된 문해력을 보여주는 증거로, 빈디란다(Vindolanda)에서 발견된 나무 글판에는 일상생활, 군사 업무, 개인 편지 등 다양한 내용의 라틴어 글이 남아있다.

의복과 장신구도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토가(toga), 튜닉(tunic), 맨틀(mantle) 등 로마식 의복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그러나 추운 기후 때문에 브리튼에서는 갈리아식 바지와 같은 현지 적응형 의복도 널리 착용되었다. 장신구로는 브로치, 팔찌, 목걸이 등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들은 종종 켈트 디자인과 로마 기법이 혼합된 형태를 보였다.

음식 문화에서는, 로마의 영향으로 올리브유, 와인, 무화과, 올리브 등 지중해 식품이 소개되었다. 또한 요리법과 식사 예절도 변화했다. 부유층은 트리클리니움(triclinium)이라 불리는 식당에서 소파에 기대어 식사하는 로마식 관습을 따랐으며, 정교한 은제 식기와 유리 그릇을 사용했다.

오락과 여가 활동으로는, 원형극장에서의 검투사 경기와 동물 싸움이 있었다. 체스터와 런던에서 원형극장 유적이 발견되었다. 목욕탕은 사교의 장소였으며, 다양한 보드 게임과 주사위 게임도 즐겼다.

로마 브리튼의 쇠퇴 징후들

4세기 후반부터 로마 브리튼에서는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화폐 가치 하락과 함께 물물교환이 다시 증가했다. 빌라 시스템도 약화되어, 많은 빌라가 폐허가 되거나 더 간소한 주거지로 변모했다. 도시들도 축소되어, 이전의 공공 건물들이 다른 용도로 전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방어 시스템도 변화했다. 해안가에는 '색슨 해안(Saxon Shore)' 요새들이 건설되어 해상 침입에 대비했다. 이러한 요새들은 북해와 영국 해협을 따라 위치했는데, 현재의 노퍽(Norfolk)부터 햄프셔(Hampshire)까지 아홉 개의 주요 요새가 있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로마 군사 건축보다 더 두꺼운 벽과 둥근 탑을 특징으로 했다.

내부적으로는 사회적 불안이 증가했다. 4세기 중반에는 '바가우다이(Bagaudae)'라 불리는 농민 반란이 갈리아와 브리튼에서 발생했다. 이는 높은 세금과 지역 엘리트의 착취에 대한 반발이었다. 또한 서부와 북부 지역에서는 켈트 전통의 부활 조짐이 보였다.

외부적으로는 픽트족, 스코티족, 색슨족 등의 침입이 증가했다. 특히 367년의 '야만인의 음모(Barbarian Conspiracy)'는 심각한 위기였다. 픽트족, 스코티족, 색슨족, 아타코티족이 동시에 브리튼을 공격해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돌파하고 남부 지역까지 침입한 사건이다. 테오도시우스 장군이 파견되어 질서를 회복했으나, 이는 로마 통치의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결론

로마 브리튼 시기는 단순한 군사적 점령을 넘어 사회, 경제, 문화, 종교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로마인들이 가져온 도시 문명, 법과 질서, 선진 기술은 브리튼 사회를 크게 변모시켰다. 특히 도로망의 구축과 도시의 발전은 이후 영국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는 화폐 경제의 도입, 빌라 시스템, 체계적인 무역망 등이 근대적 경제 시스템의 초석을 놓았다. 사회적으로는 켈트 부족 사회에서 로마식 계층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로마화 과정을 통해 브리튼인들은 부분적으로 로마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켈트 신앙과 로마 종교의 융합, 동방 신비 종교의 유입, 그리고 무엇보다 기독교의 확산이 중요한 변화였다. 기독교는 로마 철수 후에도 브리튼에 남아 앵글로색슨 시대로 이어지는 문화적 연속성의 한 축이 되었다.

로마 브리튼의 유산은 도로, 도시, 건축물뿐만 아니라 법률, 행정, 문자 사용,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남아있다. 비록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는 5세기 초에 끝났지만, 로마가 심어놓은 문명의 씨앗은 이후 영국 역사의 토양 속에서 계속 영향을 미치며 자라났다. 로마 브리튼 시대는 켈트 브리튼과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사이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영국 정체성의 한 층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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