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America

미국 역사 45. 9/11 테러와 대테러 전쟁: 미국 외교정책의 대전환과 자유의 역설

SSSCH 2025. 5. 1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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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화요일 아침의 충격

2001년 9월 11일 아침 8시 46분,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충돌한다. 17분 뒤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남쪽 타워에 부딪친다. 9시 37분에는 아메리칸 항공 77편이 펜타곤을 공격한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은 승객들의 저항으로 펜실베이니아 들판에 추락한다.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참사를 목격한다. 불타는 쌍둥이 빌딩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린다. 남쪽 타워가 먼저 무너지고, 북쪽 타워도 붕괴된다. 맨해튼은 먼지와 연기로 뒤덮인다. 약 3,000명이 목숨을 잃는다.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본토에 대한 최대 규모 공격이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에서 소식을 듣는다. 백악관으로 돌아가는 대신 공군기지를 전전한다. 저녁에야 백악관으로 복귀해 대국민 연설을 한다.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숨겨주는 자들을 구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

공격의 배후로 알카에다가 지목된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이다. 아프가니스탄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탈레반 정권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도 이들의 소행이었다.

빈 라덴은 미국을 "이슬람의 적"으로 규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고, 이스라엘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한다. 지하드(성전)를 선포하고 미국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아프가니스탄의 훈련 캠프에서 테러리스트들을 양성한다.

9/11 이전에도 경고 신호는 있었다. 2000년 10월 예멘에서 USS 콜 함정이 공격받았다. CIA와 FBI는 알카에다의 움직임을 포착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정보기관 간 협조 부족이 문제였다. 9/11 위원회는 "상상력의 실패"라고 비판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시작

미국은 신속하게 보복에 나선다.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시작한다. "항구적 자유 작전"이라 명명한다.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고 알카에다를 소탕하는 것이 목표다. 북부동맹과 협력해 지상전을 펼친다.

초기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11월 13일 수도 카불이 함락된다. 12월 탈레반 정권이 붕괴한다. 빈 라덴은 토라보라 산악지대로 도주한다. 하지만 포위망을 빠져나가 파키스탄으로 탈출한다. 많은 알카에다 조직원들도 함께 도망친다.

하미드 카르자이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된다. 국제안보지원군(ISAF)이 파견된다. 민주화와 재건이 시작된다. 하지만 탈레반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파키스탄 부족지역에서 재편성한다. 게릴라전을 계속한다.

애국법과 시민자유 논란

9/11 직후 의회는 애국법(USA PATRIOT Act)을 통과시킨다. 테러 예방을 위해 정부 권한을 대폭 확대한다. 영장 없는 도청과 감청이 가능해진다. 도서관 대출 기록과 인터넷 사용 내역도 열람할 수 있다. 테러 용의자의 무기한 구금이 허용된다.

시민자유 단체들은 강력히 반발한다. 헌법상 권리가 침해된다고 주장한다. 프라이버시가 사라진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테러 공포 속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안보와 자유 사이의 균형이 무너진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무슬림과 아랍계 미국인들이 표적이 된다. 공항에서 추가 검색을 받는다. 증오 범죄가 증가한다. 종교적 프로파일링이 문제가 된다. 일부는 부당하게 구금되거나 추방된다. 다문화 사회의 균열이 심화된다.

이라크 전쟁으로의 확전

부시 행정부는 대테러 전쟁을 확대한다. 2002년 연두교서에서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권 교체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UN에서 증거를 제시한다. 하지만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반대한다. UN 안보리 결의 없이 2003년 3월 20일 침공을 시작한다. "충격과 공포" 작전으로 바그다드를 폭격한다. 3주 만에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다.

5월 1일 부시는 항공모함에서 "주요 전투 종료"를 선언한다. 하지만 이는 성급한 판단이었다. 수니파 저항세력이 게릴라전을 시작한다. 시아파 민병대도 활동한다. 외국인 지하디스트들이 유입된다. 내전 상태로 빠져든다.

관타나모와 고문 논란

테러 용의자들을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한다. "적 전투원"으로 분류해 제네바 협약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한다. 군사재판을 받게 한다. 변호인 접견권도 제한한다. 국제사회의 비판이 쏟아진다.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학대 사건이 폭로된다. 미군이 이라크인 수감자들을 고문하고 모욕한 사진이 공개된다. 전 세계가 충격에 빠진다. 미국의 도덕적 권위가 추락한다. 이슬람권의 반미 감정이 폭발한다.

CIA의 "강화된 심문 기법"도 문제가 된다. 물고문(워터보딩), 수면 박탈, 극한 자세 유지 등이 사용된다. 비밀 수용소(black site)가 운영된다. 딕 체니 부통령은 "어두운 면으로 가야 한다"고 옹호한다. 하지만 고문 논란은 계속된다.

국토안보부 창설과 안보 체제 재편

9/11 이후 정보기관 실패에 대한 반성이 일어난다. 2002년 국토안보부(DHS)가 창설된다. 22개 연방기관을 통합한 거대 부처다. 테러 예방, 국경 보안, 이민 관리를 담당한다. 연방정부 조직의 대대적 개편이다.

공항 보안이 강화된다. 교통보안청(TSA)이 설립된다. 액체류 반입이 제한된다. 신발을 벗고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전신 스캐너가 도입된다. 여행의 불편함이 일상이 된다.

테러 위협 경보 시스템이 도입된다. 색깔별로 위험도를 표시한다. 주요 시설물의 경비가 강화된다. 생물학·화학 테러에 대비한 훈련이 실시된다. 사이버 보안도 중요해진다. 안보가 일상생활에 깊숙이 파고든다.

이라크 내전과 증파(Surge)

이라크 상황은 계속 악화된다. 2006년 시아파 성지 폭탄 테러로 종파 갈등이 폭발한다. 하루 수백 명이 죽는 내전 상태가 된다. 미군 사상자도 늘어난다. 국내 여론이 악화되고 반전 시위가 일어난다.

2007년 부시는 "증파(Surge)" 전략을 채택한다. 3만 명의 병력을 추가 파병한다. 데이비드 페트레이어스 장군이 새로운 대반란전(COIN) 전략을 시행한다. 수니파 부족들과 협력해 알카에다를 고립시킨다. "안바르 각성"이 일어난다.

증파는 일정한 성과를 거둔다. 폭력 사태가 감소한다. 바그다드에 안정이 찾아온다. 하지만 정치적 화해는 여전히 요원하다. 막대한 전쟁 비용에 대한 비판도 계속된다. 대량살상무기는 결국 발견되지 않는다.

금융위기와 전쟁 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다. 경제가 급속히 악화된다. 전쟁 비용이 더욱 부담스러워진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수조 달러가 투입되었다. "총과 버터" 문제가 다시 부각된다.

전쟁 피로가 누적된다. 장기간 파병으로 군인들의 정신적 외상이 심각해진다. 자살률이 증가한다. 가족 해체도 늘어난다. 재향군인 의료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다. 베트남전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민주당이 반전을 기치로 2006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한다. 2008년 대선에서도 버락 오바마가 이라크 철군을 공약으로 당선된다. 부시의 지지율은 20%대로 떨어진다. 네오콘의 일방주의 외교가 비판받는다.

문화 충돌과 이슬라모포비아

9/11 이후 "문명의 충돌" 담론이 부상한다. 새뮤얼 헌팅턴의 이론이 주목받는다. 이슬람과 서구의 근본적 대립으로 해석된다. 종교적 차원의 갈등으로 비화된다. 십자군 전쟁의 기억이 소환된다.

이슬라모포비아가 확산된다.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늘어난다. 모스크 건설 반대 운동이 일어난다. 특히 그라운드 제로 근처 이슬람 문화센터 논란이 격렬하다. 쿠란 소각 사건도 발생한다. 종교 간 대화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한편으로는 다문화주의도 강화된다. 무슬림 미국인들의 권리 보호 운동이 활발해진다. 종교 간 이해 프로그램이 늘어난다. 아랍어 교육이 확대된다. 미국 사회의 다원성이 시험받는다.

결론

9/11은 미국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다. 냉전 이후 10년간의 낙관주의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미국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비국가 행위자에 의한 비대칭 위협이 현실화되었다. 전통적 안보 개념이 도전받았다.

대테러 전쟁은 미국의 가치를 시험했다. 안보를 위해 자유를 희생할 것인가? 테러와의 싸움에서 민주적 원칙을 지킬 수 있는가? 고문과 인권 침해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런 근본적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일방주의가 가진 한계를 보여주었다. 군사력만으로는 평화를 만들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수출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중동의 복잡한 현실을 과소평가한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회복력도 보여주었다. 9/11 직후의 단결은 인상적이었다. 시민사회는 정부의 과도한 권한 확대에 저항했다. 언론은 비판적 역할을 계속했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9/11과 대테러 전쟁은 미국을 시험했지만, 동시에 그 강인함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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