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작전의 시작
1972년 6월 17일 새벽,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빌딩에서 5명의 침입자가 체포된다.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이들의 정체는 곧 밝혀진다.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와 연결된 인물들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절도 사건처럼 보였지만, 이 사건은 미국 정치사상 최대의 스캔들로 발전한다.
닉슨 행정부는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 백악관 비서실장 홀더먼과 보좌관 에를리히먼은 FBI 수사를 방해한다. 재선위원회는 침입자들에게 입막음 돈을 건넨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의 두 젊은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딥 스로트"라는 익명의 정보원이 기자들을 돕는다. 지하 주차장에서 비밀스럽게 만나며 정보를 제공한다. 훗날 FBI 부국장 마크 펠트로 밝혀진 이 인물은 "돈의 흐름을 따라가라"는 조언을 한다. 기자들은 워터게이트 침입자들과 백악관의 연결고리를 하나씩 밝혀낸다.
스캔들의 확대와 은폐 시도
닉슨은 1972년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재선된다. 하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은 가라앉지 않는다. 1973년 초, 침입자들의 재판이 시작된다. 판사 존 시리카는 피고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한다. 제임스 맥코드가 침묵을 깨고 백악관의 개입을 폭로한다.
상원은 워터게이트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 샘 어빈 위원장 주도로 청문회가 열린다.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는 청문회는 미국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존 딘 전 백악관 법률고문이 결정적 증언을 한다. "대통령 집무실에 암이 자라고 있다"며 닉슨의 은폐 시도를 폭로한다.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닉슨이 백악관 집무실에 비밀 녹음 시스템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모든 대화가 녹음되고 있었다.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가 테이프 제출을 요구한다. 닉슨은 거부한다. 행정부 특권을 주장하며 맞선다.
토요일 밤의 학살
1973년 10월 20일, 역사적인 '토요일 밤의 학살'이 벌어진다. 닉슨은 법무장관 엘리엇 리처드슨에게 특별검사 콕스를 해임하라고 명령한다. 리처드슨은 거부하고 사임한다. 차관 윌리엄 러켈스하우스도 거부하고 사임한다. 결국 법무차관보 로버트 보크가 콕스를 해임한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를 뒤흔든다. 닉슨이 법치주의를 무시한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의회는 새로운 특별검사 임명을 요구한다. 결국 리언 재워스키가 새 특별검사로 임명된다. 그는 테이프 제출 요구를 계속한다.
대법원이 개입한다. 1974년 7월, 대법원은 8대 0 만장일치로 닉슨에게 테이프를 제출하라고 명령한다. 대통령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역사적 판결이다. 닉슨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다.
흡연총(Smoking Gun)의 발견
테이프가 공개되자 결정적 증거가 나타난다.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 6일 후인 1972년 6월 23일 녹음에서 닉슨이 CIA를 이용해 FBI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이른바 "흡연총(Smoking Gun)" 테이프다.
더 충격적인 것은 닉슨의 일상적인 대화 내용이었다. 욕설과 인종차별적 발언이 가득했다. 정적들에 대한 복수 계획도 논의되었다. "적 명단(Enemies List)"을 만들어 국세청 감사 등으로 괴롭히려 했다. 미국인들은 대통령의 추악한 민낯에 경악한다.
하원 법사위원회가 탄핵 절차를 시작한다. 초당적 지지로 탄핵안이 가결된다. 사법 방해, 권력 남용, 의회 모독 등의 혐의가 인정된다. 공화당 의원들도 닉슨을 버리기 시작한다.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이 닉슨을 찾아가 사임을 권고한다.
대통령의 사임
1974년 8월 8일, 닉슨은 TV 연설을 통해 사임을 발표한다. "나는 더 이상 의회의 지지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며 물러나기로 했다고 말한다.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정치적 상황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사임하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닉슨은 백악관을 떠난다. 헬리콥터에 오르며 승리의 V 사인을 보내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부통령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우리의 긴 국가적 악몽이 끝났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논란은 계속된다. 포드는 한 달 뒤 닉슨을 사면한다. 기소와 재판을 피하게 해준 것이다. "나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지만, 많은 이들이 분노한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포드의 지지율은 급락한다.
언론의 승리와 정보자유법
워터게이트 사건은 언론의 위대한 승리로 기록된다. 워싱턴 포스트는 권력에 맞서 진실을 추구했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퓰리처상을 받는다. 언론이 '제4부'로서 정부를 감시하는 역할이 부각된다.
의회는 정보자유법(FOIA)을 강화한다. 정부 문서에 대한 국민의 접근권을 확대한다. 정부 감시 기능이 제도화된다. 언론 보호법도 논의된다. 기자의 취재원 보호권이 중요한 이슈가 된다.
하지만 언론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일부는 언론이 너무 큰 권력을 갖게 되었다고 우려한다. 사생활 침해와 선정주의도 문제로 지적된다. 객관성과 공정성에 대한 논란도 계속된다.
정치 개혁과 제도 변화
워터게이트는 광범위한 정치 개혁을 촉발한다. 의회는 전쟁권한법을 통과시켜 대통령의 군사력 사용을 제한한다. 예산집행거부통제법으로 대통령의 예산 권한도 견제한다. 권력 분립이 강화된다.
선거자금법도 개정된다. 기업과 노조의 직접 기부가 금지된다. 개인 기부 한도가 설정된다. 공개 원칙이 강화된다. 연방선거위원회가 설립되어 감독 기능을 맡는다. 정치자금의 투명성이 높아진다.
특별검사제도가 확립된다. 행정부 고위층의 범죄를 독립적으로 수사할 수 있게 된다. 의회의 행정부 감시 기능도 강화된다. 청문회와 조사 권한이 확대된다. 삼권분립의 원칙이 재확인된다.
정부 불신의 시대
워터게이트는 정부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1960년대 중반 70%를 넘던 정부 신뢰도는 1970년대 중반 30%대로 떨어진다. 정치인은 거짓말쟁이라는 인식이 퍼진다. 냉소주의가 만연한다.
베트남전의 실패와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겹치며 미국인들은 깊은 환멸을 느낀다. "신뢰성 격차"가 더욱 벌어진다. 정부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게 된다. 음모론도 확산된다.
이런 불신은 정치 참여도 위축시킨다. 투표율이 하락한다. 공직에 대한 관심도 줄어든다. "워싱턴 정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아웃사이더 정치인이 인기를 얻는 배경이 된다.
개인정보와 감시국가 논란
닉슨의 도청과 감시 활동은 프라이버시 논란을 일으킨다. 정부가 국민을 감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진다. 조지 오웰의 《1984》가 다시 주목받는다. 빅브라더 사회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진다.
의회는 정보기관 활동을 조사한다. 처치 위원회와 파이크 위원회가 CIA와 FBI의 불법 활동을 폭로한다. 국내 스파이 활동, 암살 계획, 쿠데타 지원 등이 드러난다. 정보기관 개혁이 시작된다.
외국정보감시법(FISA)이 제정된다. 정보기관의 국내 감시를 제한한다. 의회 정보위원회가 설립되어 감독 기능을 맡는다. 하지만 안보와 자유 사이의 긴장은 계속된다. 9/11 이후 다시 중요한 이슈가 된다.
대중문화 속의 워터게이트
워터게이트는 미국 대중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1976년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은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취재 과정을 그린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더스틴 호프먼이 주연을 맡아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정치 스릴러 장르가 유행한다. 정부 음모론을 다룬 영화들이 쏟아진다. 《콘도르》, 《패럴랙스 뷰》 같은 편집증적 스릴러가 인기를 끈다. 권력의 부패와 언론의 역할이 주요 테마가 된다.
"게이트"는 정치 스캔들을 지칭하는 접미사가 된다. 이란-콘트라게이트, 모니카게이트, 러시아게이트 등 수많은 "게이트"가 생겨난다. 워터게이트가 정치 스캔들의 원형이 된 것이다.
결론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시험이었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이 확인되었다. 언론의 감시 기능, 의회의 견제 역할, 사법부의 독립성이 모두 작동했다. 제도적 장치들이 헌정 위기를 극복하게 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지속적인 상처를 남겼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정치 냉소주의가 퍼졌다. 분열된 정치 문화가 고착화되었다. 언론과 정부의 적대적 관계도 심화되었다.
워터게이트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더욱 위험하다. 투명성과 책임성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자유 언론과 독립적인 사법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이 사건은 또한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증명했다. 위기 속에서도 미국의 제도는 작동했고, 평화적인 권력 이양이 이루어졌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자정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워터게이트는 미국 민주주의의 어두운 순간이자, 동시에 그 강인함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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