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권 사상의 발전과 로크의 시대적 배경
지난 강의에서는 존 로크의 인식론을 살펴보았다. 이번 강의에서는 그의 정치철학과 사회사상을 탐구한다. 로크의 정치철학은 그의 주저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1689)에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책은 당시 영국의 정치적 상황, 특히 1688년 명예혁명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17세기 후반 영국은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다. 스튜어트 왕조와 의회 사이의 권력 투쟁은 찰스 1세의 처형(1649), 크롬웰의 공화정, 왕정복고(1660), 그리고 마침내 명예혁명(1688)으로 이어졌다. 이 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폐위되고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 통치자로 등극했으며, 의회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로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치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샤프츠베리 백작의 비서로 일하면서 휘그당(자유주의 세력)의 지지자가 되었고, 절대왕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683년 왕권 복고 세력에 의한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명예혁명 이후 귀국했다. 『통치론』은 이런 경험과 사상적 발전의 결과물이다.
『통치론』의 구조와 목적
『통치론』은 두 개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논문: 통치에 관한 거짓 원리들의 허위와 오류
- 로버트 필머(Robert Filmer)의 『가부장제(Patriarcha)』 비판
- 왕권신수설과 절대군주제의 반박
제2논문: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목적
- 자연 상태와 자연법 이론
- 소유권 이론
- 사회계약과 정치사회의 형성
- 입법부, 행정부, 연방적 권력
- 혁명의 권리
이 책의 주요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절대군주제의 이론적 기반을 해체하는 것, 둘째, 제한된 정부와 민주적 원칙에 기초한 대안적 정치체제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와 자연법
로크의 정치철학은 '자연 상태(state of nature)'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한다. 자연 상태란 정치적 권위나 시민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의 인간 조건을 의미한다:
"완전한 자유의 상태, 자연법의 범위 내에서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고 자신의 소유물과 신체를 처분할 수 있는 자유의 상태다. 또한 동등한 상태로, 모든 권력과 관할권이 상호적이며, 누구도 다른 이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지 않는다."
로크의 자연 상태는 홉스의 것과 달리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가 아니다. 로크에게 자연 상태는 자연법에 의해 규제되는 도덕적 질서의 상태다. 자연법은 이성으로 발견할 수 있으며, 인간의 자기보존과 인류 전체의 보존을 요구한다:
"자연법은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을 가진다. 이성은 모든 인류에게, 모두가 평등하고 독립적이므로 누구도 타인의 생명, 건강, 자유나 소유물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자연 상태에는 세 가지 결정적 결함이 있다:
- 자연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공통의 권위가 없다.
- 자연법을 공정하게 집행할 권력이 없다.
- 법을 위반한 자를 처벌할 일관된 방법이 없다.
이러한 결함은 사람들이 자연 상태를 떠나 정치사회를 형성하는 동기가 된다.
소유권 이론: 노동과 가치
로크의 정치철학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부분 중 하나는 소유권에 관한 이론이다. 그는 "어떻게 개인이 원래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자연 자원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로크의 해답은 '노동 이론(labour theory of property)'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다. 그의 노동, 그의 손의 작업은 적절히 그의 것이다. 따라서 자연이 제공한 것에서 그가 노동을 섞은 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즉, 사람이 자연에서 무언가를 채취하거나 가공할 때, 그는 자신의 노동을 그것에 '섞음'으로써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얻는다. 로크는 이것이 세 가지 조건 하에서 정당하다고 본다:
- 충분성 조건: 타인을 위해 "충분하고 동등한 것"이 남아 있어야 한다.
- 비낭비 조건: 가져간 것이 낭비되거나 망가지지 않아야 한다.
- 노동 가치 조건: 물건의 가치는 주로 그것에 투입된 노동에서 온다.
이 이론은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로크는 노동을 통한 사유재산의 축적을 자연권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중상주의적 규제에서 벗어나는 시장경제의 윤리적 기반을 마련했다:
"농부의 씨앗과 빵 사이의 차이, 또는 땅에 매장된 도토리와 은 사이의 차이를 계산해보라. 그것은 순수하게 노동의 결과다."
특히 화폐의 도입은 소유의 축적에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고 로크는 설명한다. 화폐는 썩지 않으므로 비낭비 조건의 제약을 우회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람들은 화폐를 통해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이 생겨났다. 그러나 로크는 이러한 불평등이 모든 사람의 암묵적 동의에 기초한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본다.
사회계약과 정치사회의 형성
로크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계약을 맺어 정치사회를 형성한다: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나 정부를 이룰 때, 그들은 자연 상태에서 가졌던 처벌권을 포기하고, 공동체가 지정한 자에게 그것을 맡긴다. 이것이 정치사회의 원초적 권리와 기원이다."
이 계약에는 두 단계가 있다:
- 사회 형성 계약: 개인들이 서로에게 정치적 공동체(시민사회)를 형성하기로 약속
- 통치 계약: 형성된 공동체가 통치자에게 제한된 권력을 위임
중요한 점은 로크의 계약이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가 아니라, 개인들 사이에서 맺어진다는 것이다. 공동체는 통치자에게 권력을 위임하지만, 궁극적 주권은 여전히 인민에게 있다.
로크에게 정치사회의 목적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자연 상태를 떠나 사회에 들어가는 주요 목적은 자신의 재산의 보존이다."
여기서 '재산(property)'은 단지 물질적 소유물뿐 아니라, 생명, 자유, 그리고 물질적 소유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즉, 정치사회의 목적은 개인의 자연권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권력 분립과 제한된 정부
로크는 정부가 세 가지 주요 권력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 입법권(Legislative Power): 법을 제정하는 권력
- 집행권(Executive Power): 국내에서 법을 집행하는 권력
- 연합권(Federative Power): 외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권력
로크는 특히 입법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국가 내에서 최고의 권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권력조차 제한되어야 한다:
"입법부의 권력이 아무리 최고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제한된다."
로크가 입법권에 부과하는 제한은 다음과 같다:
- 법은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 법은 공공선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 입법부는 인민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
- 입법부는 입법권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
이러한 제한은 로크 정치철학의 핵심인 '제한된 정부(limited government)' 개념을 보여준다. 모든 정치권력은 인민의 동의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인민의 자연권과 복지를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만 행사되어야 한다.
저항권과 혁명의 정당화
로크 정치철학의 가장 급진적인 측면은 '저항권(right of resistance)' 이론이다. 통치자가 사회계약을 위반하고 인민의 신탁을 배반할 경우, 인민은 저항하고 심지어 혁명을 일으킬 권리가 있다:
"입법부나 최고 집행자가 신탁에 반하여 행동할 때... 그들은 인민이 그들에게 위임한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며, 이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로크는 매우 과감한 주장을 한다. 통치자가 계약을 위반할 때, 실제 '반역자'는 통치자이지 저항하는 인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항하는 인민은 단지 자신의 자연권을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크는 저항권이 경솔하게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혁명은 통치자의 반복적이고 체계적인 권리 침해가 있을 때만 정당화된다:
"혁명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행위가 인민 대다수에게 불신을 받게 될 때 발생한다. 이는 잦은 압박과 권력의 오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사상은 미국 독립선언서와 프랑스 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 독립선언서의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라는 구절은 로크의 자연권 사상을 반영한다.
관용에 관한 로크의 견해
로크의 정치사상에서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종교적 관용에 대한 그의 견해다. 『관용에 관한 편지(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1689)에서 그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 그리고 양심의 자유를 옹호한다:
"교회는 그 자체로 완전히 별개이고 국가와 구별되는 것이다. 교회의 경계는 고정되어 있으며, 그것은 자발적인 사회다."
로크는 종교적 신념은 내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므로, 외적 강제로는 진정한.믿음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종교와 정치는 목적이 다르다: 교회는 영혼의 구원을, 국가는 시민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추구한다.
따라서 국가는 특정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되며,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관용해야 한다. 다만 로크는 두 가지 예외를 둔다:
- 사회 질서와 평화를 위협하는 종교적 관행
- 무신론자들(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므로 약속과 계약을 지킬 도덕적 동기가 없다고 로크는 생각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로크의 관용론은 서구 세계에서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의 발전에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로크와 자유주의의 탄생
로크의 정치철학은 근대 자유주의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그가 발전시킨 핵심 개념들—자연권, 사회계약, 동의에 기초한 정부, 제한된 권력, 소유권, 저항권—은 이후 자유민주주의 전통의 근간이 되었다.
로크의 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개인주의: 사회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며,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한다.
2. 계약주의: 정치적 권위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 사이의 계약에서 비롯된다.
3. 동의 이론: 정당한 정치권력은 인민의 동의에 기초해야 한다.
4. 권리 중심주의: 정치사회의 목적은 개인의 자연권(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5. 제한 정부: 정부의 권력은 제한되어야 하며, 권력 남용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로크의 이러한 사상은 몽테스키외, 루소, 제퍼슨, 매디슨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권력 분립, 입헌정부, 대의민주주의와 같은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들은 로크의 사상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로크에 대한 비판과 한계
로크의 정치철학은 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비판을 받아왔다:
1. 역사적 허구성: 자연 상태와 사회계약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가설적 구성에 불과하다.
2. 소유권 이론의 문제: 로크의 소유권 이론은 초기 자본주의를 정당화하지만, 현대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독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로크의 이론이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고 비판한다.
3. 시민사회의 모순: 로크는 시민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성, 노동자, 비기독교인 등의 배제를 묵인했다.
4. 식민주의와의 연관성: 로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토지에 대한 유럽인들의 점유를 정당화하는 데 자신의 소유권 이론을 적용했다.
5. 추상적 개인주의: 로크는 개인을 모든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분리된 추상적 존재로 상정한다. 이는 공동체와 전통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로크의 정치철학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정부의 책임과 한계, 그리고 민주적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현대 정치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론: 로크의 유산
존 로크는 근대 경험론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사상가다. 그의 인식론이 인간 지식의 경험적 기원과 한계를 탐구했다면, 그의 정치철학은 정치권력의 기원과 정당성, 그리고 그 한계를 탐구했다.
로크의 정치사상은 무엇보다 '동의에 기초한 정부'라는 혁신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정부는 피통치자들의 동의에 기초할 때만 정당하며, 이 동의는 자연권의 보호라는 조건부로 주어진다. 이는 군주의 신권적 권위를 주장하는 전통적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로크의 사상은 실천적 영향력도 컸다. 그의 이론은 1689년 영국의 권리장전,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 등 근대 민주주의의 주요 문서들에 반영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많은 정치적 가치와 제도—개인의 권리, 법 앞의 평등, 권력 분립, 대의민주주의, 종교의 자유—는 로크의 사상적 유산이다.
로크의 정치철학은 그의 인식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적 능력과 권리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자연법을 인식하고, 자유롭게 동의하여 정의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계몽주의적 낙관주의는 오늘날까지도 민주주의의 이상을 뒷받침하는 철학적 기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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