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론의 출현과 역사적 배경
지금까지 우리는 데카르트에서 시작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대륙 합리론의 전통을 살펴보았다. 이제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또 다른 철학적 조류인 '경험론(empiricism)'으로 시선을 돌린다. 경험론은 지식의 기원이 감각 경험에 있다고 보는 입장으로, 선험적 지식의 가능성을 강조한 합리론과는 대조를 이룬다.
17세기 영국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스튜어트 왕조와 의회 사이의 권력 투쟁은 1642-1651년 내전으로 이어졌고, 1688년 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권위보다는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사상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귀납적 방법론을 강조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이러한 지적 환경 속에서 체계적인 경험론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당대 유명한 자연과학자들과 교류했다. 로크는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휘그당(자유주의 세력)의 이론적 지지자로 활동했으며, 종교적 관용과 제한된 정부를 옹호했다. 그의 사상은 정치적으로는 입헌정부와 자연권 사상에, 인식론적으로는 경험에 기초한 실용적 접근에 영향을 받았다.
로크의 생애와 『인간지성론』
로크는 1632년 영국 서머셋주에서 청교도 가정에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서 공부했고, 후에 의학, 자연과학, 그리고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로크는 1667년 앤서니 애슐리 쿠퍼(후에 샤프츠베리 백작)의 개인 의사가 되었고, 이를 통해 정치계에 발을 들였다. 그의 정치적 인연은 그를 때로는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했으며, 1683년에는 정치적 이유로 네덜란드로 망명하기도 했다.
로크의 대표작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은 1690년에 출간되었지만, 그 저술은 약 20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로크는 1671년경부터 이 작품을 구상했으며, 네덜란드 망명 시절에 상당 부분을 완성했다. 『인간지성론』의 첫 부분에서 로크는 이 책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의 목적은 인간 지식의 기원, 확실성, 범위를 조사하고, 동시에 신념, 의견, 동의의 근거와 정도를 탐구하는 것이다."
『인간지성론』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 선천적 관념에 대한 비판 2권: 관념의 기원과 종류 3권: 언어에 관한 고찰 4권: 지식과 의견에 관한 논의
이 책은 로크가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던 '선천적 관념(innate ideas)'의 존재를 비판하고,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유래한다는 경험론적 입장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선천적 관념 비판
『인간지성론』 제1권에서 로크는 선천적 관념이라는 개념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선천적 관념이란 경험 이전에 정신에 이미 새겨져 있는 관념으로,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론자들이 주장했던 개념이다. 로크는 이 개념을 비판하기 위해 몇 가지 주요 논거를 제시한다:
1. 보편적 동의의 부재
선천적 관념이 존재한다면, 모든 사람이 그것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로크는 소위 선천적이라 여겨지는 원리들(예: 동일률, 모순율)조차 모든 사람이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원리들은 어린이, 백치, 야만인, 문맹자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만약 그것들이 선천적이라면, 이들도 그 원리를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2. 잠재적 선천성의 모순
선천적 관념 옹호자들은 종종 그것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사람들이 이성을 사용하게 되면 그 관념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크는 이것이 모순이라고 본다:
"이성을 사용해 발견하는 것을 선천적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성으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진리가 선천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선천적이라는 개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3. 문화적 다양성의 증거
로크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만약 이러한 관념들이 선천적이라면, 이런 문화적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선천적이라고 주장하는 도덕 원리들은 서로 다른 사회에서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그 원리들이 선천적이 아니라 교육과 관습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로크의 결론은 분명하다: 인간의 정신은 태어날 때 백지상태(tabula rasa)와 같다. 모든 지식, 관념, 원리는 경험을 통해 획득된다:
"정신은, 내가 말했듯이, 백지와 같아서 어떤 특성도 없고 어떤 관념도 없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그것이 채워지는가? ... 한마디로 경험에서 비롯된다."
관념의 기원과 종류
『인간지성론』 제2권에서 로크는 관념의 기원과 다양한 종류를 분석한다. 그에게 '관념(idea)'이란 "이해가 생각할 때 그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감각, 지각, 기억, 상상 등 정신의 모든 내용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로크에 따르면, 관념은 두 가지 주요 원천에서 온다:
1. 감각(sensation)
- 외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관념
- 예: 노랑, 하양, 열, 차가움, 부드러움, 딱딱함 등
2. 반성(reflection)
- 정신이 자신의 내적 작용을 관찰함으로써 얻는 관념
- 예: 지각, 사고, 의심, 믿음, 추론, 의지 등
"외부 물질적 사물들은 감각의 원천이며, 정신의 내적 작용은 반성의 원천이다. 이것들이 우리의 모든 관념의 원천이다."
중요한 점은 로크가 '반성'을 경험의 일종으로 본다는 것이다. 반성이란 외부 세계가 아닌 내적 작용에 대한 경험이다. 따라서 모든 관념은 궁극적으로 경험(감각과 반성)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경험론적 입장이 유지된다.
로크는 관념을 '단순관념(simple ideas)'과 '복합관념(complex ideas)'으로 나눈다:
1. 단순관념
-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적 관념
- 정신은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 창조하거나 파괴할 수 없음
- 예: 단일 감각에서 오는 관념(색, 소리), 여러 감각에서 오는 관념(공간, 운동), 반성에서 오는 관념(지각, 의지), 감각과 반성 모두에서 오는 관념(쾌락, 고통, 힘)
2. 복합관념
- 단순관념들을 결합, 비교, 추상화하여 형성된 관념
- 정신이 능동적으로 만들어냄
- 예: 실체, 관계, 집합적 관념(군중, 우주) 등
"정신은 단순관념에 대해서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복합관념에 대해서는 능동적이다. 정신은 단순관념을 결합하여 복합관념을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로크에게 가장 중요한 복합관념 중 하나는 '실체(substance)'의 관념이다. 그는 실체를 "단순관념들을 지탱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알 수 없는 주체"로 정의한다. 우리는 속성(색, 크기, 모양 등)은 직접 경험하지만, 그 속성들을 지탱하는 기체(基體, substratum)는 직접 경험할 수 없다. 따라서 실체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불완전하고 불분명하다:
"실체의 관념은 단순관념들의 집합과, 그것들을 지탱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가정으로 이루어진다."
일차성질과 이차성질의 구분
로크의 인식론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는 일차성질(primary qualities)과 이차성질(secondary qualities)의 구분이다. 이 구분은 그의 인식론과 존재론의 교차점에 위치한다.
1. 일차성질
- 물체 자체에 실재하는 성질
- 물체와 분리할 수 없음
- 예: 고체성, 연장(크기), 형태, 수, 운동
2. 이차성질
- 물체 자체에 실재하지 않고, 물체가 우리 감각에 미치는 힘에 불과
- 예: 색, 소리, 맛, 향기, 온도
"일차성질은 물체 자체의 성질로, 우리가 그것을 지각하든 말든 항상 물체 안에 있다. 반면 이차성질은 물체의 일차성질이 우리 감각에 특정한 관념을 일으키는 힘에 불과하다."
이 구분에 따르면, 우리가 사과를 볼 때 경험하는 빨간색은 사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의 입자 구조(일차성질)가 우리 눈에 특정한 시각적 감각을 일으키는 힘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사과의 달콤한 맛이나 향기도 사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가 우리 감각기관에 특정한 느낌을 일으키는 힘이다.
로크의 이러한 구분은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당시 발전하던 기계론적 자연관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구분은 버클리, 흄 같은 후대 경험론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특히 버클리는 일차성질과 이차성질을 구분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명석한 관념과 불명석한 관념
로크는 또한 관념을 그 명료성과 판명성에 따라 구분한다:
1. 명석한(clear) 관념
- 정신이 그 관념의 대상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경우
- 예: 시각이 좋은 사람이 보는 색의 관념
2. 불명석한(obscure) 관념
- 정신이 그 관념의 대상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
- 예: 시력이 나쁜 사람이 보는 흐릿한 색의 관념
3. 판명한(distinct) 관념
- 다른 관념들과 명확히 구별되는 관념
- 예: 원과 타원의 관념이 명확히 구별됨
4. 혼연한(confused) 관념
- 다른 관념들과 충분히 구별되지 않는 관념
- 예: 비슷한 색조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
로크는 이러한 구분을 통해 지식과 확실성의 정도를 평가한다.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에 기초한 지식은 더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어와 관념의 관계
『인간지성론』 제3권에서 로크는 언어와 의미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그는 단어의 의미가 관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언어가 지식 획득과 소통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탐구한다.
로크에 따르면, 단어는 직접적으로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속의 관념을 지시한다:
"단어는 사람들의 사용과 동의에 의해, 그들의 관념의 감각적 표지가 된다. 즉, 단어는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을 의미하지, 외부 사물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언어적 오해와 논쟁의 원인을 설명해 준다. 사람들이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그들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이 다르다면, 그들은 실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로크는 특히 '추상적 일반 관념(abstract general ideas)'의 문제에 주목한다. 우리는 개별적인 경험만 하지만, 어떻게 '사람', '동물', '정의' 같은 일반적 개념을 형성하는가? 로크에 따르면, 정신은 여러 개별 경험에서 공통된 특징을 추출하고, 개별적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추상적 일반 관념을 형성한다:
"정신은 개별적 존재에서 받은 관념을 취하여, 그것을 일반적 이름의 대표로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이름 아래 포함되는 모든 것에 공통된 본성을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로크는 이런 추상 과정이 때로는 명확성을 잃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철학과 종교에서 사용되는 많은 추상적 용어들('정의', '신', '영혼' 등)은 종종 불명확하고 혼란스러운 관념과 연결된다. 이는 무의미한 논쟁과 불필요한 갈등의 원인이 된다.
경험론적 지식 이론
『인간지성론』 제4권에서 로크는 자신의 지식 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지식을 "두 관념 사이의 연결과 일치, 또는 불일치와 모순에 대한 지각"으로 정의한다. 이는 지식이 관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의미다.
로크는 지식을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1. 직관적 지식(intuitive knowledge)
- 두 관념의 일치나 불일치를 직접적으로, 중간항 없이 지각하는 것
- 가장 명석하고 확실한 종류의 지식
- 예: "흰색은 검은색이 아니다", "3은 1보다 크다"
2. 논증적 지식(demonstrative knowledge)
-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관념들의 관계를, 중간 관념들을 통해 인식하는 것
- 직관적 지식보다 확실성이 떨어짐
- 예: 기하학적 증명, 신의 존재 증명
3. 감각적 지식(sensitive knowledge)
- 외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지각
- 가장 확실성이 낮은 종류의 지식
- 예: "내 앞에 책상이 있다"
로크에 따르면, 우리 지식의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완전한 확실성을 가진 지식은 직관적 지식과 논증적 지식에 국한되며, 이는 우리 관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항상 불확실성의 요소를 갖는다.
"우리의 지식은 우리의 관념보다 넓을 수 없다. 지식은 관념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크는 회의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지식의 제한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지식 능력을 주었다고 믿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지식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의 능력이 우리의 상태와 관심사에 맞게 조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인간 지식의 한계에 만족할 이유를 찾을 것이다."
경험론의 출발점으로서의 로크
로크의 철학은 영국 경험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기본 원칙을 확립했고, 이는 버클리, 흄, 그리고 나중에는 밀과 같은 경험론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로크의 경험론은 여전히 많은 합리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 그는 일차성질과 이차성질을 구분함으로써, 물질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 그는 수학적, 도덕적 지식의 확실성을 주장했다.
- 그는 신의 존재를 논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측면들은 후대의 더 급진적인 경험론자들(특히 흄)에 의해 비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인간 지식의 경험적 기원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지식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근대 인식론의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로크의 철학은 또한 계몽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경험주의적 접근, 관용에 대한 강조, 권위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모두 계몽주의의 핵심 가치와 일치한다. 특히 그의 교육 이론은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 교육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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