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스콜라 철학의 흐름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철학자가 있다. 바로 '형이상학의 첨예화자(Doctor Subtilis)'라 불리는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1266-1308)다. 아퀴나스 이후 스콜라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스코투스의 사상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영역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낸다. 오늘은 스코투스가 남긴 철학적 유산과 그의 깊이 있는 사유의 세계를 함께 탐험해보려 한다.
형이상학의 첨예화자, 둔스 스코투스
스코투스는 현재 스코틀랜드로 알려진 지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와 파리에서 수학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였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놀라울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철학 체계를 구축했는데,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대한 비판적 응답과 함께 독자적인 철학적 전망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스코투스의 사상이 빛나는 지점은 바로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of being)' 개념에 있다. 그는 신과 피조물에게 '존재(being)'라는 개념이 동일한 의미로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퀴나스가 신과 피조물 사이의 존재 개념이 유비적(analogical)이라고 본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스코투스에 따르면, '존재'라는 개념은 모든 실재에 일의적으로(univocally) 적용되며, 차이는 단지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존재는 신과 피조물 모두에게 동일한 개념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신은 무한한 존재이고, 피조물은 유한한 존재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해 보이지만 철학적으로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신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지성이 신에 대한 자연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이엇다해성(haecceitas) - 개체성의 형이상학적 원리
스코투스의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는 '이엇다해성(haecceitas)'이다. 이는 라틴어로 '이것임(thisness)'을 의미하는데, 개별 존재자가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게 만드는 고유한 형이상학적 원리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를 다른 모든 인간과 구별시키는 근본적인 원리가 바로 소크라테스의 '이엇다해성'인 것이다.
이는 중세 철학의 오랜 고민이었던 보편과 개별의 문제에 대한 독창적인 해답이었다. 스코투스는 보편자(universals)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개체가 단지 보편적 본질과 우연적 속성들의 집합이 아니라 고유한 형이상학적 원리를 갖는다고 봤다.
"개체성은 부정(negation)이나 우연적 속성의 집합이 아닌, 존재론적으로 긍정적인 고유한 실재다."
이 개념은 현대 철학에서도 여전히 매력적인 주제로 남아있다. 개체의 동일성, 개인의 고유함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스코투스의 이엇다해성 개념에서 중요한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의지주의(Voluntarism)와 신의 자유
스코투스의 또 다른 중요한 기여는 신학적 측면에서의 '의지주의(Voluntarism)'다. 그는 신의 본질적 속성으로 '지성(intellect)'보다 '의지(will)'를 강조했다. 아퀴나스가 신의 이성과 질서를 강조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스코투스는 신의 자유로운 의지 선택에 더 중점을 뒀다.
이러한 관점은 신의 절대권능(potentia absoluta Dei)과 질서권능(potentia ordinata Dei)의 구분으로 이어진다. 절대권능은 신이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질서권능은 신이 실제로 선택해 질서 지운 세계의 법칙 내에서 작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신은 절대적 능력으로는 현재와 다른 질서를 창조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특정한 질서를 선택했다면 그 질서 안에서 일관되게 행동한다."
이 구분은 자연법에 대한 스코투스의 견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는 십계명 중 첫 번째 판(제1-3계명)은 신의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지만, 두 번째 판(제4-10계명)은 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것으로 다른 방식으로도 명령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윤리학에서 일정 부분 도덕적 상대주의를 수용하는 복잡한 입장으로 이어진다.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인식
인식론적 측면에서 스코투스는 인간 지성의 두 가지 작용 방식을 구분했다. '직관적 인식(intuitive cognition)'은 대상의 현존과 실재성에 직접 관계하는 인식이며, '추상적 인식(abstractive cognition)'은 대상의 본질과 정의에 관한 인식이다.
"직관적 인식은 '이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추상적 인식은 '이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이 구분은 스코투스 인식론의 핵심으로, 그는 철학적 지식이 단순히 추상적 본질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개별적 실재의 존재와도 관련된다고 봤다. 이는 경험적 인식의 중요성을 일정 부분 인정한 것으로, 후대 경험주의 철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형식적 구분(distinctio formalis)
스코투스 형이상학의 또 다른 특징은 '형식적 구분(distinctio formalis)'이라는 새로운 구분법의 도입이다. 이는 실재적 구분(distinctio realis)과 이성적 구분(distinctio rationis)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적 형태의 구분이다. 형식적 구분은 사물 내에서 객관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적 실재성을 갖지만,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는 측면들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됐다.
예를 들어, 하나의 영혼 안에서 지성과 의지는 형식적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실재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다른 사물이 아니지만, 단지 인간의 사고방식에 의해서만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스코투스 철학의 정밀함과 복잡성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
"형식적 구분은 사물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구분이지만, 그 구분된 측면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구분법은 특히 신학적 난제들, 예컨대 삼위일체나 신의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됐다.
스코투스 사상의 역사적 영향
스코투스의 철학은 당대에도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철학사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윌리엄 오컴으로 대표되는 유명론자들은 스코투스의 복잡한 형이상학 체계에 반발해 더 단순한 설명을 추구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스코투스의 존재의 일의성 개념은 오컴의 유명론적 접근에도 중요한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다.
근대 철학에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스코투스의 개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하고 변형시켰다. 특히 형식적 구분과 개체성 원리에 관한 그의 사상은 근대 철학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 철학에서도 스코투스의 사상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분석철학과 현상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스코투스의 개념들이 재해석되고 있으며, 특히 개체성, 양상 논리, 가능세계 이론 등의 분야에서 그의 사상은 여전히 중요한 참조점으로 기능한다.
스코투스 철학의 현대적 의의
오늘날의 관점에서 스코투스의 철학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의 사상은 단순히 역사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생생한 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첫째, 개체성에 대한 그의 강조는 현대의 정체성 담론과 연결된다. 개인의 고유함, 대체 불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스코투스의 이엇다해성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존재의 일의성 개념은 형이상학적 논의의 가능성과 한계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신과 세계, 초월과 내재 사이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식에 있어 스코투스의 접근은 여전히 유효한 철학적 모델이다.
셋째, 그의 의지주의적 경향은 자유와 필연성, 도덕의 기초에 관한 현대적 질문들과 맞닿아 있다. 도덕적 규범의 기원과 정당화에 관한 논의에서 스코투스의 사상은 여전히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스코투스 철학의 도전과 매력
스코투스의 철학은 결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상이 아니다. 그의 저작은 기술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그의 논증은 종종 현기증 날 정도로 정교하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성 속에서 우리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놀라운 세밀함과 깊이를 발견할 수 있다.
스코투스의 사상은 단순한 교조적 신학이 아니라, 철저히 비판적이고 탐구적인 철학적 작업이었다. 그는 당대의 주요 철학적 과제들에 정면으로 맞서 독창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형이상학과 인식론, 윤리학의 영역에 중요한 기여를 남겼다.
우리가 스코투스의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단지 역사적 지식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여전히 살아있는 철학적 물음들에 직면해 있으며, 그의 개념들은 현대의 철학적 담론 속에서도 새롭게 빛을 발할 수 있다. 형이상학의 첨예화자가 남긴 철학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사유를 자극하고 도전하는 풍요로운 자원이다.
개체성과 보편성, 자유와 필연, 이성과 의지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했던 스코투스의 여정은 철학의 영원한 문제들과 씨름하는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러한 점에서 스코투스 철학의 여정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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