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체계에서 윤리학은 단순히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의 형이상학과 신학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학, 스토아 학파의 자연법 사상, 그리고 기독교 윤리를 종합하여 독창적인 윤리 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그의 자연법 이론은 서양 윤리학과 법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법학과 윤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준거점이 되고 있다. 이번 시간에는 아퀴나스의 윤리학적 기초와 자연법 이론, 그리고 그의 덕 윤리학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아퀴나스 윤리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아퀴나스의 윤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윤리 이론은 존재(being)와 선(good)의 관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통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존재와 선의 전환 가능성
아퀴나스는 존재와 선이 '전환 가능하다(convertible)'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선하고, 모든 선한 것은 존재한다는 의미다. 라틴어로 "ens et bonum convertuntur"로 표현되는 이 원칙은 그의 윤리학의 근본 전제다.
존재와 선의 전환 가능성은 일상적 경험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는 명백히 악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아퀴나스는 이에 대해 악(evil)은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여(privatio boni)'라고 설명한다. 악은 있어야 할 선이 없는 상태, 즉 존재의 결핍이다.
예를 들어, 질병은 건강(정상적인 기능 상태)의 결여이고, 무지는 지식의 결여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존재는 그것이 존재하는 한에서 선하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그 본성에 따라 가져야 할 완전성을 결여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악하다'고 말한다.
목적론적 세계관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우주를 목적론적으로 이해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본성에 따른 목적(telos)이나 선(good)을 향해 나아간다. 식물은 성장과 번식을 추구하고, 동물은 감각적 만족과 종의 보존을 추구하며,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지식과 덕을 통한 행복을 추구한다.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에서 '좋음'은 각 존재가 그 본성에 따라 완전하게 되는 것, 즉 그 본성적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좋은 것(인간의 선)은 인간의 본성에 따라 결정된다.
인간의 본성과 궁극적 목적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질료)와 영혼(형상)의 복합체다. 특히 인간의 영혼은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 단순한 감각적 인식을 넘어 보편적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모든 인간 행위는 궁극적으로 행복(beatitudo)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부, 권력, 명예, 쾌락과 같은 피상적인 선이 아니라 최고선(summum bonum)인 신과의 합일에 있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1-2부 1-5문에서 이에 대해 상세히 논한다.
현세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행복(felicitas)만을 누릴 수 있으며, 이는 덕(virtue)의 실천과 관조적 지혜(contemplative wisdom)를 통해 가능하다. 완전한 행복(beatitudo)은 내세에서 신을 직접 대면함(beatific vision)으로써만 달성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기초 위에서 아퀴나스는 그의 윤리학, 특히 자연법 이론을 전개한다.
아퀴나스의 자연법 이론
아퀴나스의 자연법(lex naturalis) 이론은 『신학대전』 1-2부 90-108문에서 상세히 다루어진다. 이는 법의 본질과 종류, 특히 자연법의 원리와 내용에 관한 체계적 설명이다.
법의 정의와 종류
아퀴나스는 법을 "공동선을 위해 공동체를 책임지는 자에 의해 공포된 이성의 명령"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다음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 이성의 명령(ordinance of reason): 법은 이성적 근거를 가진 규범이다.
- 공동선 지향성(common good): 법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선을 목적으로 한다.
- 권위 있는 공포(promulgation): 법은 공동체를 책임지는 합법적 권위에 의해 공포되어야 한다.
- 실천적 지침(practical precept): 법은 구체적 행동 지침을 제공한다.
아퀴나스는 법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 영원법(lex aeterna): 우주를 지배하는 신의 이성적 계획. 모든 법의 근원이다.
- 자연법(lex naturalis): 인간의 이성적 본성에 새겨진 영원법의 참여. 인간이 자연적으로 선을 분별하고 악을 회피하도록 이끄는 원리다.
- 인정법(lex humana): 자연법에 기초하여 인간이 특정 상황에 맞게 제정한 실정법.
- 신법(lex divina): 성서를 통해 계시된 신의 법. 이는 다시 구약의 법(Old Law)과 신약의 법(New Law)으로 나뉜다.
이 법들은 위계적 관계에 있다. 하위 법은 상위 법에 기초하고, 상위 법은 하위 법을 통해 구체화된다. 특히 인정법은 자연법에서 도출되어야 하며, 자연법에 위배되는 인정법은 법의 본질을 잃는다("부정의한 법은 법이 아니라 법의 왜곡이다").
자연법의 제1원리와 기본 경향성
자연법의 핵심은 인간의 이성이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기본 원리들이다. 자연법의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Good is to be done and pursued, and evil is to be avoided)"이다.
이 원리는 너무 근본적이어서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이해하는 자명한 원리다. 모든 다른 도덕 원칙들은 이 기본 원리에서 파생된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세 가지 기본적인 자연적 경향성(natural inclinations)이 있다고 보았다:
- 존재 보존의 경향성: 모든 실체와 공유하는 경향성으로, 자기 존재의 보존을 추구한다. 이에 따라 생명을 보존하고 해로운 것을 피하는 것이 선이다.
- 종의 보존 경향성: 모든 동물과 공유하는 경향성으로, 종의 보존과 양육을 추구한다. 이에 따라 성적 결합, 자녀 양육 등이 선이다.
- 이성적 경향성: 인간에게 고유한 경향성으로, 진리와 사회적 삶을 추구한다. 이에 따라 신에 관한 진리를 추구하고, 사회 속에서 살며, 무지를 피하는 것이 선이다.
이 세 가지 경향성은 위계적 질서를 이루며, 이성적 경향성이 가장 상위에 있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자신의 본성적 경향성들을 올바로 조정하고 실현함으로써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자연법의 구체적 원리들
자연법의 제1원리("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에서 더 구체적인 원리들이 도출된다. 아퀴나스는 자연법의 원리들을 세 가지 수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 일차적 원리: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인식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 이차적 원리: 십계명과 같은 더 구체적인 원칙들. 대부분의 인간이 약간의 교육과 반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이 있다. 이 원칙들도 일반적으로는 변하지 않지만, 드문 경우에 예외가 있을 수 있다.
- 삼차적 원리: 매우 구체적인 도덕적 결론들. 이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이성적 숙고가 필요하며, 복잡한 상황에서는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할 수 있다. 이 수준에서는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적용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타인의 물건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이차적 원리에서 "위험한 무기를 정신이상자에게 돌려주지 말아야 한다"와 같은 삼차적 원리가 도출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자연법이 변하지 않는 보편적 원칙들을 포함하면서도, 구체적 상황에서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법과 실정법의 관계
자연법은 인정법(실정법)의 기초가 된다. 인정법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연법에서 도출된다:
- 결론으로서의 도출(per modum conclusionis): 자연법의 원리에서 논리적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 예를 들어, "해를 끼치지 말라"는 자연법 원리에서 "살인을 금지한다"는 법이 도출된다.
- 구체화로서의 도출(per modum determinationis): 자연법의 일반 원칙을 특정 상황에 맞게 구체화하는 방식. 예를 들어, 자연법은 교통 질서가 필요하다는 일반 원칙을 제시하지만, 우측 통행인지 좌측 통행인지는 입법자의 결정에 맡겨진다.
아퀴나스는 자연법에 어긋나는 인정법은 진정한 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부정의한 법에 대한 시민 불복종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불복종이 더 큰 혼란과 해악을 가져올 경우, 부정의한 법에도 복종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고 본다.
아퀴나스의 덕 윤리학
아퀴나스의 윤리학은 자연법 이론만이 아니라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측면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학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발전시켰다.
덕의 정의와 분류
아퀴나스는 덕(virtue)을 "선한 행위를 하게 하고 그 소유자를 선하게 만드는 인간 정신의 좋은 질적 상태(habitus)"라고 정의한다. 덕은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 아니라, 인간의 성격과 성향을 형성하는 지속적인 상태다.
아퀴나스는 덕을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한다:
- 획득된 덕(acquired virtues): 인간이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자연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는 덕. 이는 다시 지성적 덕과 도덕적 덕으로 나뉜다.
- 지성적 덕(intellectual virtues):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을 완성하는 덕. 예: 지혜(sapientia), 학식(scientia), 이해(intellectus), 기술(art), 실천적 지혜(prudentia)
- 도덕적 덕(moral virtues): 의지와 감정을 이성에 따라 조절하는 덕. 예: 정의(justice), 용기(fortitude), 절제(temperance)
- 주입된 덕(infused virtues): 신의 은총에 의해 주어지는 덕. 자연적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초자연적 목적(신과의 합일)을 위해 필요하다.
- 신학적 덕(theological virtues): 신앙(faith), 희망(hope), 사랑(charity)
- 주입된 도덕적 덕: 획득된 도덕적 덕에 대응하지만, 초자연적 목적을 위해 은총에 의해 주어지는 덕
획득된 덕들은 자연적 행복(eudaimonia)을 위한 것이고, 주입된 덕들은 초자연적 행복(beatitudo)을 위한 것이다. 두 종류의 덕은 서로 보완적이며,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아퀴나스의 원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기본 덕(주요 덕)
아퀴나스는 여러 덕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일곱 가지 덕을 강조한다. 이들은 '주요 덕(principal virtues)' 또는 '기본 덕(cardinal virtues)'이라 불린다:
- 실천적 지혜(prudentia): 특정 상황에서 무엇이 선한지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 모든 도덕적 덕의 기초가 된다.
- 정의(justitia):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는 덕.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올바름을 추구한다.
- 용기(fortitudo): 위험과 어려움 앞에서도 선을 추구하는 덕. 두려움을 극복하고 인내하게 한다.
- 절제(temperantia):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이성에 따라 조절하는 덕.
- 신앙(fides): 신에 의해 계시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덕.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진리에 대한 동의다.
- 희망(spes): 신의 도움으로 영원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
- 사랑(caritas): 신을 자신과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덕. 모든 덕의 형상이자 목적이다.
처음 네 가지는 기본 덕(또는 추기 덕, cardinal virtues)으로, 그리스-로마 철학 전통에서 왔다. 마지막 세 가지는 신학적 덕(theological virtues)으로, 기독교 전통에서 왔다.
실천적 지혜의 중심성
아퀴나스는 특히 실천적 지혜(prudentia)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실천적 지혜는 지성적 덕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덕의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구체적 상황에서 무엇이 선한지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이다.
실천적 지혜는 세 가지 행위를 포함한다:
- 숙고(deliberatio): 가능한 행동 방안들을 검토한다.
- 판단(judicium): 어떤 행동이 최선인지 판단한다.
- 명령(imperium): 판단에 따라 의지에 행동을 명령한다.
실천적 지혜 없이는 다른 도덕적 덕들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용기가 없는 실천적 지혜는 단순한 영리함(astutia)에 불과하고, 실천적 지혜가 없는 용기는 무모함(temeritas)에 불과하다.
중용의 원리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도덕적 덕이 '두 악덕 사이의 중용(golden mean)'이라는 원리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단순한 양적 중간이 아니라 '이성에 따른 중용(mean of reason)'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용기는 무모함(과도)과 비겁함(결핍) 사이의 중용이다. 그러나 그 중용점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고, 개인의 상황과 능력에 따라 다르며, 실천적 지혜를 통해 판단된다.
또한 아퀴나스는 일부 덕(예: 정의)에서는 중용이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며, 신학적 덕들은 중용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본다. 신에 대한 신앙, 희망, 사랑은 '너무 많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행위의 도덕성: 아퀴나스의 행위 이론
아퀴나스는 인간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데 있어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한다:
- 대상(object): 행위 자체의 본질적 성격.
- 의도(intention): 행위자의 목적.
- 상황(circumstances): 행위가 이루어지는 맥락적 조건들.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이 세 요소 모두 선해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악하다면 행위 전체가 악해진다.
이러한 입장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공리주의적 관점과 대조된다. 아퀴나스에게는 선한 의도로도 본질적으로 악한 행위(예: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를 정당화할 수 없다.
이중 결과의 원리
아퀴나스는 하나의 행위가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경우를 다루는 '이중 결과의 원리(principle of double effect)'를 발전시켰다. 이 원리에 따르면, 다음 조건이 충족될 때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행위가 허용된다:
- 행위 자체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적어도 중립적이어야 한다.
- 행위자는 선한 결과만을 직접 의도해야 한다.
- 부정적 결과는 선한 결과의 수단이 아니라 부수적 효과여야 한다.
- 선한 결과는 부정적 결과에 비해 충분히 중요해야 한다.
이 원리는 의학 윤리, 전쟁 윤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죽어가는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통증 완화제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환자의 죽음을 앞당길 수 있더라도, 위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허용될 수 있다.
양심의 역할
아퀴나스는 양심(conscientia)을 "이성의 실천적 판단"으로 정의한다. 양심은 추상적 도덕 원칙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는 이성의 작용이다.
그는 양심의 판단을 따라야 할 의무를 강조한다. 심지어 잘못된 양심(erroneous conscience)의 판단도 따라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잘못된 양심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양심의 주관성과 객관적 도덕 질서 사이의 균형을 보여준다. 개인의 양심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양심은 객관적 도덕 질서를 인식하는 방향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자연법 윤리학의 현대적 적용과 도전
아퀴나스의 자연법 이론은 서양 윤리학과 법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도 그의 이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되고 해석되고 있다.
현대 자연법 이론의 발전
20세기 이후 자연법 이론은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 신토마스주의적 자연법 이론: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 이브 시몽(Yves Simon) 등이 아퀴나스의 자연법 이론을 현대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에 적용했다.
- 새로운 자연법 이론(New Natural Law Theory): 저먼 그리세즈(Germain Grisez), 존 피니스(John Finnis), 로버트 조지(Robert P. George) 등이 발전시킨 이론으로, 인간의 기본적 선(basic goods)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아퀴나스의 자연법 이론을 현대 분석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재해석한다.
- 비종교적 자연법 이론: 론 풀러(Lon Fuller), 존 롤스(John Rawls) 등이 신에 대한 언급 없이 실천 이성과 인간 본성에 기초한 자연법 개념을 발전시켰다.
현대적 적용과 도전
아퀴나스의 자연법 이론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윤리적, 법적 문제에 적용되고 있다:
- 생명윤리: 낙태, 안락사, 생식기술 등에 관한 논쟁에서 자연법 윤리학은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 특히 가톨릭 생명윤리학은 아퀴나스의 자연법 이론에 크게 의존한다.
- 인권 담론: 인간의 본성적 존엄성과 기본권에 대한 현대적 이해는 자연법 전통과 연결된다. 세계인권선언의 기초에도 자연법적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 정의로운 전쟁 이론: 전쟁의 정당성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just war theory)은 아퀴나스의 윤리학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 환경 윤리: 일부 학자들은 아퀴나스의 자연법 전통을 환경 윤리에 적용하려 시도한다. 피조물에 대한 청지기 의식과 자연의 내재적 목적성을 강조하는 생태학적 윤리의 기초로 자연법 사상을 재해석한다. 특히 교황 프란치스코의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는 아퀴나스의 사상을 환경 윤리에 적용한 좋은 예다.
- 경제 윤리: 자연법 전통은 경제 활동의 윤리적 차원을 강조한다. 사유재산권의 인정과 동시에 그 사회적 기능의 강조, 정당한 임금, 공정 거래 등에 관한 가톨릭 사회교리는 아퀴나스의 자연법 전통에 기반한다.
그러나 아퀴나스의 자연법 이론이 현대 사회에서 적용되는 데에는 여러 도전도 존재한다:
- 도덕적 상대주의와의 충돌: 현대 사회의 도덕적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보편적 도덕 원칙을 주장하는 자연법 이론과 충돌한다. 다양한 문화와 사회에서 서로 다른 도덕적 실천과 믿음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보편적 자연법을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 자연주의적 오류 비판: 데이비드 흄(David Hume) 이후 많은 철학자들은 '존재(is)'에서 '당위(ought)'를 도출하는 것이 논리적 오류라고 비판한다. 자연법 이론이 인간 본성의 사실적 이해에서 규범적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이러한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의 변화: 진화론, 유전학, 신경과학 등 현대 과학의 발전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아퀴나스가 전제한 인간 본성 이해와 충돌할 수 있다.
- 세속화된 사회에서의 적용: 신에 대한 언급 없이 자연법 이론을 현대 세속 사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응하여 일부 학자들은 신학적 전제 없이도 자연법 이론의 핵심 통찰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자연법 이론에 대한 현대적 옹호
현대 자연법 이론가들은 위의 도전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한 대응: 자연법 이론가들은 문화적 다양성이 보편적 도덕 원칙의 존재와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문화적 다양성은 주로 자연법의 삼차적 원리들의 적용에서 나타나며, 일차적, 이차적 원리들은 상당한 보편성을 가진다고 본다.
- 자연주의적 오류 비판에 대한 대응: 새로운 자연법 이론가들은 그들의 이론이 단순히 사실에서 규범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목적과 선(good)에 대한 실천 이성의 기본적 파악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존 피니스는 기본적 선(basic goods)이 자명하게 파악되며, 이것은 사실적 진술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 인간 본성 이해의 변화에 대한 대응: 현대 자연법 이론가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고려하면서도, 인간의 이성적, 사회적, 도덕적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인간의 생물학적 측면과 이성적, 영적 측면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 세속화된 맥락에서의 적용: 존 피니스, 로버트 조지 등은 신학적 전제 없이도 자연법 이론의 핵심 통찰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의 기본적 선과 실천 이성의 요구를 중심으로 자연법 이론을 재구성한다.
덕 윤리학의 현대적 부활과 아퀴나스
20세기 후반 이후 서양 윤리학에서는 의무론과 공리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대안으로 덕 윤리학(virtue ethics)이 부활했다. 이 흐름 속에서 아퀴나스의 덕 윤리학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현대 덕 윤리학과 아퀴나스
현대 덕 윤리학은 1958년 엘리자베스 앤스콤(Elizabeth Anscombe)의 논문 「현대 도덕 철학(Modern Moral Philosophy)」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앤스콤은 현대 도덕 철학이 '법 개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신이라는 '법 제정자' 없이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안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덕 윤리학으로의 복귀를 제안했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필리파 풋(Philippa Foot), 로잘린드 허스트하우스(Rosalind Hursthouse) 등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제안을 발전시켜 현대 덕 윤리학을 체계화했다. 이들 중 특히 매킨타이어는 그의 저서 『덕의 상실(After Virtue)』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덕 윤리학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대 덕 윤리학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아퀴나스의 윤리학과 연결된다:
- 행위자 중심성: 무엇이 옳은 행위인가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 덕과 인격의 중요성: 올바른 행위는 올바른 인격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고 본다.
- 실천적 지혜의 강조: 도덕적 판단은 규칙의 기계적 적용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는 실천적 지혜를 요구한다고 본다.
- 공동체와 전통의 역할: 덕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 공동체와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퀴나스 덕 윤리학의 현대적 적용
아퀴나스의 덕 윤리학은 다양한 현대적 맥락에서 적용되고 있다:
- 전문직 윤리: 의료, 법률, 비즈니스 등 전문직 윤리에서 덕 윤리학적 접근이 주목받고 있다. 전문가에게 필요한 덕(예: 의사의 공감, 변호사의 정의감)의 함양을 강조한다.
- 교육 철학: 인격 교육(character education)은 아퀴나스의 덕 윤리학에서 중요한 통찰을 얻는다. 지식 전달뿐 아니라 덕의 함양을 교육의 중요한 목표로 본다.
- 심리학과의 대화: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과 같은 현대 심리학 분야는 덕과 인격 강점을 연구하며, 아퀴나스의 덕 윤리학과 공통점을 가진다.
- 사회 비판과 대안: 매킨타이어와 같은 철학자들은 아퀴나스의 덕 윤리학을 현대 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의 기초로 활용한다.
아퀴나스 윤리학의 비판과 응답
아퀴나스의 윤리학은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주요 비판과 가능한 응답을 살펴보자.
자연법 이론에 대한 비판
- 자연주의적 오류: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 본성의 사실적 측면에서 도덕적 규범을 도출하는 것이 논리적 오류라는 비판이다.
- 응답: 현대 자연법 이론가들은 인간 본성에 관한 사실적 진술에서 직접적으로 규범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 선(basic goods)과 실천 이성의 원리가 자명하게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퀴나스의 '본성' 개념은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목적론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목적론적 자연관의 문제: 아퀴나스의 자연법 이론은 목적론적 자연관에 기초하는데, 이는 현대 과학의 기계론적 자연관과 충돌한다는 비판이다.
- 응답: 목적론이 과학의 방법론으로는 부적절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존재론적으로 부정될 필요는 없다. 또한 생물학과 생태학에서 목적론적 설명이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 영구적이고 불변하는 인간 본성 가정의 문제: 아퀴나스는 인간 본성이 보편적이고 불변한다고 전제하는데, 이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따른 인간 이해의 다양성을 간과한다는 비판이다.
- 응답: 인간 본성의 구체적 표현은 문화와 역사에 따라 다양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인간의 경향성과 필요는 보편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아퀴나스의 자연법 이론은 일차적, 이차적, 삼차적 원리의 구분을 통해 보편성과 특수성의 균형을 추구한다.
덕 윤리학에 대한 비판
- 행위 지침의 불명확성: 덕 윤리학은 구체적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 응답: 아퀴나스의 덕 윤리학은 실천적 지혜를 통해 구체적 상황에서 올바른 행동을 식별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자연법 이론은 덕 윤리학을 보완하여 보다 구체적인 행위 지침을 제공한다.
- 문화적 상대성: 덕의 이해와 평가는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르므로, 보편적 덕 윤리학이 가능한가라는 비판이다.
- 응답: 덕의 구체적 표현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인 인간 덕(예: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은 문화를 초월하여 인정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아퀴나스는 덕의 본질이 '이성에 따른 중용'이라는 보편적 원리에 있다고 본다.
- 엘리트주의: 덕 윤리학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환경과 교육을 받은 특권층에 유리하며, 사회적 약자의 현실을 간과한다는 비판이다.
- 응답: 아퀴나스는 모든 인간이 덕을 발달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또한 그의 정의 개념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를 포함한다. 덕의 함양을 위한 사회적 조건의 개선은 정의로운 사회 구조를 요구한다.
결론: 아퀴나스 윤리학의 현대적 의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학, 특히 그의 자연법 이론과 덕 윤리학은 중세를 넘어 현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윤리적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윤리 체계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현대적 의의를 가진다:
- 통합적 접근: 아퀴나스의 윤리학은 자연법과 덕 윤리, 형이상학과 실천 철학, 이론과 실천을 통합한다. 이러한 통합적 접근은 현대 윤리학의 파편화된 경향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 인간 존엄성의 기초: 아퀴나스의 인간 본성과 인간 선에 대한 이해는 인간 존엄성과 인권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다.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이성과 자유를 가진 존재로서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
- 공동선의 강조: 아퀴나스의 윤리학은 개인의 선과 공동체의 선이 상호 의존적임을 강조한다. 이는 극단적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모두 피하는 균형 잡힌 사회 윤리의 기초가 된다.
- 자연과 은총의 조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아퀴나스의 원칙은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 초자연적 덕과 자연적 덕의 조화로운 관계를 제시한다.
- 실천적 지혜의 강조: 아퀴나스는 구체적 상황에서의 올바른 판단을 위한 실천적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규칙 적용이나 결과 계산을 넘어서는 도덕적 사고의 복잡성을 인정한다.
아퀴나스의 윤리학은 시대를 초월한 통찰을 제공하면서도, 현대의 윤리적 도전에 응답할 수 있는 유연성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자연법은 보편적 도덕 원칙의 근거를 제공하고, 덕 윤리학은 도덕적 인격의 형성과 공동체적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통합적 윤리 비전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복잡한 윤리적 문제들—생명윤리, 환경 윤리, 사회 정의, 전쟁과 평화 등—에 대응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자원이 된다.
아퀴나스가 남긴 윤리적 유산은 그의 시대를 넘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지혜의 원천이다. 자연과 이성, 덕과 법, 개인과 공동체, 현세와 영원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는 그의 통합적 비전은, 이분법과 극단으로 치우치기 쉬운 현대 윤리적 담론에 중요한 균형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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