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체계는 워낙 방대하여 한 번에 모두 살펴보기 어렵다. 지난 시간에 그의 생애와 주요 저작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보았다면, 이번에는 그의 철학 중에서도 핵심적인 두 영역—신 존재 증명과 인식론—에 초점을 맞추어 더 깊이 탐구해보려 한다. 그의 '5가지 길(Five Ways)'로 알려진 신 존재 증명은 단순히 신학적 주장을 넘어 그의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핵심을 보여주며, 그의 인식론은 감각 경험과 추상 지식의 관계에 대한 독창적 관점을 제시한다. 아퀴나스의 이 두 이론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철학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룬다.
신 존재 증명의 배경과 의의
신 존재 증명의 필요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1부 2문 1항에서 먼저 신 존재 증명의 필요성에 대해 논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self-evident) 것인가?" 이에 대해 그는 흥미로운 구분을 제시한다.
어떤 명제는 '그 자체로는(in itself)' 자명하지만 '우리에게는(to us)' 자명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는 자명하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은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의 본질을 직접 알지 못하므로, 이 명제는 우리에게 자명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신 존재 증명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신의 본질을 직접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effects)인 피조물로부터 원인(cause)인 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증명 방법의 특징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에는 몇 가지 중요한 방법론적 특징이 있다:
- 후험적(a posteriori) 접근법: 아퀴나스는 경험적 세계, 즉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물로부터 출발하여 신의 존재를 추론한다. 이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과 같은 '선험적(a priori)' 접근법과 대조된다.
- 인과적 논증: 그의 증명은 기본적으로 인과 관계에 기초한다. 세계의 질서와 특성들은 그것의 원인인 신에게로 소급된다.
-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의 요소: 아퀴나스는 신이 '무엇인지'보다 '무엇이 아닌지'를 중심으로 논한다. 그의 증명은 신의 본질을 직접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이 존재해야 함을 보여줄 뿐이다.
- 유비적(analogical) 언어: 그는 신에 대해 말할 때 유비적 언어를 사용한다. 즉, 인간의 경험에서 도출된 개념들이 신에게 적용될 때는 유사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특징들은 모두 아퀴나스의 기본적인 인식론적 입장—모든 지식은 감각 경험에서 시작된다—과 연결된다. 그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성을 통해 신에 대한 제한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5가지 길: 신 존재 증명의 다섯 가지 방법
이제 아퀴나스가 『신학대전』 1부 2문 3항에서 제시하는 유명한 '5가지 길(quinque viae)'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 증명들은 단순한 신학적 주장을 넘어 그의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의 핵심 원리들을 보여준다.
1. 운동의 길(via motus)
첫 번째 증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움직이지 않는 첫 번째 움직이게 하는 자(Unmoved First Mover)' 개념에 기초한다. 아퀴나스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 세계에는 운동(변화)이 있다.
- 운동하는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운동된다.
- 움직이게 하는 원인들의 무한 소급은 불가능하다.
- 따라서,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첫 번째 움직이게 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신이다.
이 논증에서 '운동(motus)'은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잠재태에서 현실태로의 모든 변화를 의미한다. 핵심은 자기 자신을 운동시키는 것은 없다는 원리다. 모든 변화는 이미 현실태에 있는 다른 존재에 의해 일어난다.
이 논증의 깊은 형이상학적 의미는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 '순수 현실태(actus purus)'인 신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신만이 어떤 잠재태도 없는 순수한 현실태이기 때문에, 모든 변화의 궁극적 원천이 된다.
2. 작용인의 길(via causalitatis)
두 번째 증명은 작용인(efficient cause)의 계열에 초점을 맞춘다:
- 세계에는 작용인의 질서가 있다.
-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의 작용인이 될 수 없다(그렇다면 자신의 존재에 선행해야 하므로).
- 작용인들의 무한 소급은 불가능하다.
- 따라서, 다른 원인에 의해 야기되지 않는 첫 번째 작용인이 있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신이다.
이 논증은 첫 번째 논증과 유사해 보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 번째 논증이 변화의 원리에 초점을 맞춘다면, 두 번째 논증은 존재의 원인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퀴나스가 말하는 작용인들의 계열이 단순히 시간적 계열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정돈된(essentially ordered)' 원인들의 계열을 말하는데, 이는 현재 시점에서도 각 원인이 그것의 원인에 의존하는 계열이다. 예를 들어, 막대기가 돌을 움직이는 경우, 돌의 운동은 막대기에 의존하고, 막대기의 운동은 손에 의존하며, 손의 운동은 의지에 의존한다. 이러한 의존 관계의 계열은 궁극적으로 어떤 첫 번째 원인에 도달해야 한다.
3. 우연성과 필연성의 길(via contingentiae)
세 번째 증명은 존재의 우연성(contingency)에 초점을 맞춘다:
- 세계에는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우연적 존재자들이 있다.
- 모든 우연적 존재자는 어떤 시점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 만약 모든 것이 우연적이라면, 어떤 시점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일단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면, 아무것도 존재하게 될 수 없다(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으므로).
- 그러나 우리는 지금 존재자들이 있음을 안다.
- 따라서, 필연적인 존재자가 있어야 하며, 이 필연적 존재자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 이것이 바로 신이다.
이 논증은 우연적 존재자와 필연적 존재자의 구분에 기초한다. 우연적 존재자(contingent being)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자로, 그 존재의 이유가 자신 안에 있지 않다. 반면 필연적 존재자(necessary being)는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자로, 그 존재의 이유가 자신 안에 있다.
아퀴나스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우연적이라면, 논리적으로 어떤 시점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지금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 그는 최소한 하나의 필연적 존재자가 있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4. 완전성의 정도에 의한 길(via gradibus)
네 번째 증명은 완전성의 정도에 초점을 맞춘다:
- 세계에는 선, 진리, 고귀함 등의 정도 차이가 있다.
- 상대적인 정도는 어떤 최대치에 의해 측정된다.
- 각 종류의 최대치는 그 종류의 것들의 원인이다.
- 따라서, 모든 존재와 선과 완전성의 최대치인 존재가 있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신이다.
이 논증은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형상과 참여의 개념에 기초한다. 아퀴나스는 '더 좋고', '더 참되고', '더 고귀한' 정도들이 객관적 실재라고 본다. 이러한 정도의 차이는 최고의 기준이 있음을 암시하며, 이 최고 기준은 단순히 이념적 기준이 아니라 최고도의 실재, 즉 신이다.
이 논증의 핵심은 신이 단지 '가장 좋은 존재'가 아니라, 모든 선의 원천이자 원인이라는 점이다. 피조물의 선함은 신의 선함에 '참여(participation)'하는 것이다.
5. 목적론적 길(via finalitatis)
다섯 번째 증명은 자연의 목적성(finality)에 초점을 맞춘다:
- 자연에는 목적을 향한 질서가 있다.
- 지성이 없는 사물들도 일정한 방식으로 목적을 향해 행동한다.
- 지성이 없는 것은 우연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목적을 향해 행동하려면 지성적 존재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 따라서, 모든 자연적 사물을 목적으로 인도하는 지성적 존재가 있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신이다.
이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teleology)에 기초한다. 아퀴나스는 자연 세계에서 목적성의 증거를 발견한다. 예를 들어, 식물은 빛을 향해 자라고, 동물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복잡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 이러한 목적 지향적 행동은 지성이 없는 존재에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이러한 목적성이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의 질서와 규칙성은 이를 설계한 지성적 존재를 암시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5가지 길의 종합적 의미
이 다섯 가지 증명은 개별적으로도 중요하지만, 함께 보면 더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그것들은 모두 인과적 추론을 사용하지만, 각기 다른 종류의 인과성(운동, 작용, 우연성, 정도,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이 증명들은 단순히 창조주로서의 신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ipsum esse subsistens), 순수 현실태(actus purus), 필연적 존재(necessary being), 최고선(summum bonum), 지성적 설계자(intelligent designer)로서의 신을 보여준다.
중요한 점은 이 증명들이 신의 '본질'이 아니라 '존재'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신의 본질은 인간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what)'보다는 '무엇이 아닌지(what not)'를 더 잘 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적 접근이다.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비판과 응답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은 역사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대표적인 비판과 가능한 응답을 살펴보자.
무한 소급의 문제
아퀴나스는 원인들의 무한 소급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왜 그런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아퀴나스가 말하는 무한 소급 불가능성은 시간적 계열이 아닌 '본질적으로 정돈된(essentially ordered)' 원인들의 계열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정돈된 원인들의 계열에서는 각 원인이 동시에 자신의 원인에 의존하므로, 무한 소급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신 개념의 도입 문제
또 다른 비판은 아퀴나스의 증명이 첫 번째 원인, 필연적 존재자 등을 증명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전통적인 유신론의 신과 동일하다고 볼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퀴나스는 이 증명들이 신의 모든 속성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첫 번째 원인, 필연적 존재자 등의 개념을 더 발전시키면 전통적인 유신론의 신 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신학대전』의 다음 섹션들에서 신의 단순성, 완전성, 선함, 무한성 등의 속성을 논증한다.
인과 원리의 문제
현대 철학에서는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는 인과 원리 자체가 보편적으로 성립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양자 물리학은 미시 세계에서 비인과적 사건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에 대해 토마스주의자들은 아퀴나스의 인과 원리가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결정론적 인과관계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아퀴나스의 인과 원리는 더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의존성을 말하는 것으로, 양자 불확정성과 같은 현상도 이러한 형이상학적 의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증명과의 관계
일부 학자들은 아퀴나스의 세 번째 길(필연적 존재자)이 사실상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명시적으로 존재론적 증명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토마스주의자들은 두 증명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강조한다. 안셀무스의 증명은 신 개념에서 신의 존재로 나아가는 선험적(a priori) 접근법인 반면, 아퀴나스의 증명은 경험적 세계에서 신의 존재로 나아가는 후험적(a posteriori) 접근법이다. 또한 아퀴나스의 필연적 존재자는 개념적 필연성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자족성을 의미한다.
인식론: 경험에서 추상으로
이제 아퀴나스의 인식론을 살펴보자. 그의 인식론은 그의 신 존재 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가 신 존재 증명에서 경험적 세계에서 출발하는 이유는 바로 그의 인식론적 입장 때문이다.
감각 경험의 우선성
아퀴나스의 인식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의 기본 원칙은 "지성 안에 있는 것은 먼저 감각 안에 있었다(Nihil est in intellectu quod non prius fuerit in sensu)"이다. 모든 지식은 감각 경험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설(theory of recollection)'과 '신적 조명설(divine illumination)'을 거부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 어떤 선천적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감각 경험을 통해 모든 지식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아퀴나스의 인간학과도 일치한다. 그에게 인간은 영혼(형상)과 육체(질료)의 복합체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 획득 과정도 이 복합적 본성을 반영해야 한다. 영혼은 육체, 특히 감각 기관을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추상화 과정
그러나 아퀴나스는 단순한 경험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감각 경험만으로는 진정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본다. 감각은 개별적이고 물질적인 대상만을 포착하지만, 진정한 지식은 보편적이고 비물질적인 형상을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각 경험에서 지적 지식으로의 이행은 '추상화(abstractio)'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과정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 감각(sensatio): 감각 기관이 외부 대상의 감각적 형상을 받아들인다.
- 상상(imaginatio): 감각 자료로부터 '상상상(phantasm)'이라 불리는 내적 이미지가 형성된다.
- 추상(abstractio): 지성이 상상상으로부터 보편적 개념이나 형상을 추상해낸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단계인 추상화다. 아퀴나스는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지성의 두 가지 작용을 구분한다:
- 능동 지성(intellectus agens): 상상상으로부터 지성적 형상을 추상해내는 활동적 능력.
- 가능 지성(intellectus possibilis): 추상된 형상을 받아들여 실제 이해를 형성하는 수동적 능력.
능동 지성은 상상상에서 개별적이고 물질적인 조건들을 제거하고, 보편적인 본질이나 형상만을 추출한다. 가능 지성은 이렇게 추상된 형상을 받아들여 실제 개념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러 사과를 보고 '사과'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먼저 우리는 감각을 통해 개별 사과들의 감각적 특성(색, 모양, 맛 등)을 포착한다.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이러한 감각 자료에서 내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능동 지성이 이 이미지에서 개별적 특성들(이 사과의 특정한 색, 크기 등)을 제거하고 '사과임(appleness)'이라는 보편적 본질을 추상해낸다. 이것이 바로 '사과' 개념이다.
지식의 객관성
아퀴나스의 인식론에서 중요한 특징은 지식의 객관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지식은 외부 실재와 정신의 일치(adaequatio intellectus et rei)다. 이는 진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인간 지성이 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지식의 주관적 측면도 인정한다. 지식은 언제나 인식 주체의 방식(modus cognoscenti)에 따라 인식된다. 아퀴나스의 유명한 표현으로, "인식된 것은 인식하는 자의 방식에 따라 인식된다(Quidquid recipitur ad modum recipientis recipitur)."
이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식 능력에 맞게 실재를 인식할 수 있지만, 실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특히 신과 같은 초월적 실재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넘어선다.
신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
아퀴나스는 인간이 신에 대한 제한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지식은 항상 불완전하고 유비적(analogical)이다.
인간은 세 가지 방식으로 신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 인과적 방식(via causalitatis): 피조물(결과)로부터 창조주(원인)의 존재와 속성을 추론한다.
- 부정적 방식(via negationis): 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통해 신을 이해한다.
- 탁월함의 방식(via eminentiae): 피조물의 완전성을 무한하게 고양시켜 신을 이해한다.
신에 대한 지식은 언제나 유비적이다. 예를 들어, "신은 선하다"라고 말할 때, 이 '선함'은 인간의 선함과 완전히 같은 의미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유사성에 기초한 유비적 의미다.
이러한 유비적 지식의 가능성은 아퀴나스가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에 완전히 빠지지 않고, 신에 대한 긍정적 담론의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인식론과 신 존재 증명의 연결
아퀴나스의 인식론과 신 존재 증명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감각 경험 중심 인식론은 신 존재 증명에서 경험적 세계에서 출발하는 후험적 접근법의 기초가 된다.
또한 그의 추상화 이론은 신 존재 증명에서 사용되는 인과적 추론의 인식론적 기초가 된다. 능동 지성이 감각 자료에서 보편적 형상을 추상해내듯이, 신 존재 증명에서는 감각 세계의 특성(운동, 인과성, 우연성 등)에서 그 형이상학적 원인을 추상적으로 추론한다.
이러한 연결은 아퀴나스 철학의 일관성을 보여준다. 그의 인식론에서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시작하지만 추상을 통해 감각을 초월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신학에서 신에 대한 지식은 피조물에서 시작하지만 인과적 추론을 통해 피조물을 초월한다.
지식의 한계와 계시의 역할
그러나 아퀴나스는 인간 이성의 한계도 분명히 인식했다. 그는 인간 지식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 철학적 지식(philosophical knowledge): 자연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식. 신의 존재, 일부 속성, 자연법 등이 이에 해당한다.
- 신학적 지식(theological knowledge):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지식. 삼위일체, 성육신, 원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구분은 『대이교도대전』의 기본 구조에 반영되어 있다. 첫 세 권은 주로 자연 이성으로 접근 가능한 진리를 다루고, 마지막 권은 계시에 의존하는 진리를 다룬다.
아퀴나스에게 계시는 두 가지 이유로 필요하다:
- 철학적 지식도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소수의 사람만이 장시간의 학습 끝에 많은 오류를 거쳐 얻을 수 있다. 계시는 이러한 진리를 더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제공한다.
- 인간의 궁극적 목적(신과의 합일)에 관한 진리는 자연 이성을 완전히 초월한다. 이러한 진리는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로운 관계를 보여준다. 이성은 신앙에 봉사하지만, 또한 신앙은 이성을 초월한다. 이것이 바로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라는 아퀴나스의 유명한 원칙의 의미다.
실재론과 인식론: 보편 개념의 문제
인식론과 관련하여 중세 철학의 핵심 논쟁 중 하나는 보편자(universals)의 존재론적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이 문제에서 '온건 실재론(moderate realism)'의 입장을 취했다.
보편 개념의 삼중 존재
아퀴나스는 보편 개념이 세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 사물 이전(ante rem): 신의 마음 속에 있는 원형적 이념으로서
- 사물 안에(in re): 개별 사물의 본질로서 (이것은 항상 개별화되어 있다)
- 사물 이후(post rem): 인간 정신이 추상을 통해 형성한 개념으로서
이 관점은 플라톤적 실재론(보편자가 개별 사물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과 유명론(보편자는 단지 이름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을 모두 피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보편자는 실재하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사물 안에 구체화되어 있다.
추상과 분리의 구분
아퀴나스는 '추상(abstractio)'과 '분리(separatio)'라는 두 가지 정신 작용을 구분한다:
- 추상: 실제로는 분리되지 않는 것을 개념적으로 분리하는 것. 예를 들어, 원의 둥근 모양을 원의 물질에서 개념적으로 분리하는 것.
- 분리: 실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을 개념적으로 분리하는 것. 예를 들어, 인간을 특정 장소에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
이 구분은 그의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학은 추상을 통해 양(quantity)을 물질에서 분리하지만, 형이상학은 분리를 통해 존재(being)를 특정 종류의 존재자에서 분리한다.
유비적 개념: 초월적 개념의 인식
아퀴나스의 인식론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 것은 '존재(ens)', '하나(unum)', '선(bonum)', '참(verum)' 같은 '초월적 개념(transcendentals)'의 인식이다. 이들은 모든 범주(categories)를 초월하는 개념들이다.
이러한 초월적 개념들은 일반적인 추상화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다. 그것들은 유비적 개념(analogical concepts)으로, 다양한 사물들에 동일한 의미가 아닌 유사한 의미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존재'는 실체와 우연성, 신과 피조물에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 유비적 의미로 적용된다. 이러한 유비적 개념을 통해 아퀴나스는 위계적 존재론(hierarchical ontology)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일상 경험에서 형이상학적 진리로: 아퀴나스 인식론의 사례
아퀴나스의 인식론적 접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인 예를 통해 살펴보자. 그의 '운동의 길(via motus)'을 통한 신 존재 증명을 인식론적 관점에서 분석해보자.
감각 경험에서 출발
'운동의 길'은 "세계에는 운동(변화)이 있다"는 감각적 관찰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매일 사물들이 변화하는 것을 본다. 물이 따뜻해지고, 식물이 자라고, 계절이 바뀐다. 이는 직접적인 감각 경험이다.
추상적 원리의 파악
다음 단계에서 아퀴나스는 "운동하는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운동된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적용한다. 이 원리는 직접적인 감각 경험이 아니라, 감각 경험에 대한 이성적 반성을 통해 파악된다.
이 원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potentiality)와 현실태(actuality) 개념에 기초한다. 운동은 잠재태에서 현실태로의 이행이다. 그런데 잠재태에 있는 것은 스스로 현실태로 이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현실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것(이미 현실태에 있는 것)이 이 이행을 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추상적 원리는 능동 지성이 감각 경험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출하는 예다.
무한 소급의 불가능성 인식
세 번째 단계에서 아퀴나스는 "움직이게 하는 원인들의 무한 소급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더 높은 수준의 추상적 사고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만약 움직이게 하는 원인들의 무한한 계열이 있다면, 첫 번째 원인 없이 중간 원인들만 있게 된다. 그러나 중간 원인은 오직 첫 번째 원인으로부터 움직이게 하는 힘을 받을 때만 다른 것을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첫 번째 원인 없이는 어떤 운동도 있을 수 없다.
이는 이미 상당한 추상화 단계를 요구하는 형이상학적 통찰이다.
신의 존재로의 도달
마지막 단계에서 아퀴나스는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첫 번째 움직이게 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라고 결론짓는다.
여기서 그는 '첫 번째 움직이게 하는 자'와 '신'을 동일시한다. 이는 철학적 추론과 신학적 해석의 결합으로, 높은 수준의 지적 통합을 보여준다.
이 전체 과정은 감각 경험에서 시작하여 추상화를 통해 형이상학적 원리를 파악하고, 논리적 추론을 통해 감각을 초월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아퀴나스의 인식론적 방법을 잘 보여준다.
아퀴나스 인식론의 현대적 의의
아퀴나스의 인식론은 13세기에 형성되었지만, 현대 철학에도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감각주의와 이성주의의 종합
아퀴나스의 인식론은 감각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험주의(empiricism)와 추상적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성주의(rationalism)를 종합한다. 이는 근대 철학에서 흄과 칸트가 시도한 종합과 유사한 면이 있다.
현대 인식론에서도 감각 경험과 개념적 구조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아퀴나스의 추상화 이론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과학철학과의 관련성
아퀴나스의 인식론은 현대 과학철학과도 관련이 있다. 특히 그의 추상화 이론은 과학적 이론이 어떻게 관찰 가능한 현상으로부터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전자, 중력장 등)에 대한 지식을 얻는지 설명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다.
과학적 실재론과 관련된 논쟁에서, 아퀴나스의 온건 실재론은 극단적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의 중도적 입장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종교적 인식론에의 기여
현대 종교철학에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 종교적 지식의 가능성은 여전히 중요한 주제다. 아퀴나스의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과 계시 신학(revealed theology)의 구분, 유비적 언어 이론 등은 이러한 논의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
특히 그의 유비적 언어 이론은 종교적 언어의 의미와 인지적 내용에 관한 현대 논의(비트겐슈타인, 플랜팅가 등)와 연결될 수 있다.
마음의 철학에 대한 함의
현대 마음의 철학(philosophy of mind)에서 심신 문제는 여전히 핵심적 주제다. 아퀴나스의 영혼-육체 관계에 대한 질료-형상론적 이해는 현대의 환원주의적 유물론과 이원론의 대안으로 고려될 수 있다.
특히 그의 인식론에서 감각적 인식과 지적 인식의 연속성과 차이에 대한 설명은 현대 의식 이론에도 시사점을 준다.
결론: 신앙과 이성, 경험과 추상의 조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과 인식론은 그의 철학적 체계의 핵심 요소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5가지 길'은 단순한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그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이 실제로 적용된 사례다.
아퀴나스의 인식론은 감각 경험의 우선성을 인정하면서도, 추상화를 통한 감각 초월적 지식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이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이해와 일치한다. 신앙은 이성에 모순되지 않으며, 이성은 신앙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만, 동시에 신앙은 이성을 초월한다.
이러한 균형 잡힌 접근법은 극단으로 치우치기 쉬운 현대 사상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아퀴나스는 경험주의와 이성주의, 물질주의와 이상주의, 회의주의와 독단주의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제시한다.
그의 인식론과 신 존재 증명은 단순히 역사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그의 감각 경험에서 형이상학적 진리로 나아가는 방법론은 현대 철학이 직면한 많은 이분법(경험/이성, 분석/종합, 과학/종교 등)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아퀴나스에게 철학은 궁극적으로 지혜(sapientia)의 추구다. 그리고 이 지혜는 감각 경험에 뿌리를 두면서도 그것을 초월하여, 모든 존재의 궁극적 원인인 신에 대한 이해로 나아간다. 이러한 통합적 지혜의 추구는 분과학문으로 파편화된 현대 지식 체계에 중요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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