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 4월 29일 오스트리아군이 티치노 강을 건너 피에몬테를 침공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본격적인 무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1848-49년 제1차 독립전쟁의 쓰라린 패배를 설욕할 기회였다. 플롬비에르 협정에 따라 프랑스군이 합류한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지배를 뒤흔들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유럽 질서 전체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발발과 초기 전황
오스트리아의 침공 소식이 전해지자 나폴레옹 3세는 즉시 이탈리아 원정을 선언했다.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겠다"는 그의 포고문은 전 유럽을 놀라게 했다. 프랑스군 제1군단은 마르세유에서 제노바로, 제2군단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피에몬테로 향했다. 총 12만 명의 프랑스군이 이탈리아 땅을 밟았고, 이들은 6만 명의 피에몬테군과 합류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라데츠키 원수 시대의 명성을 잇는 줄리아이 백작이 지휘했다. 그는 11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프랑스-피에몬테 연합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기 체계의 차이였다.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미니에 소총은 사거리 600미터에서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던 반면, 오스트리아군의 구식 머스킷은 사거리가 200미터에 불과했다.
초기 작전에서 오스트리아군은 피에몬테의 수도 토리노를 향해 신속하게 진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예상보다 빠른 도착으로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연합군은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했고, 오스트리아군을 밀라노 방향으로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마젠타 전투와 밀라노 해방
1859년 6월 4일, 마젠타에서 벌어진 전투는 이 전쟁의 첫 번째 대규모 회전이었다. 마젠타는 밀라노 서쪽 2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지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곳을 점령하면 밀라노로 가는 길이 열리고, 오스트리아군의 보급선도 차단할 수 있었다.
줄리아이 백작은 마젠타에서 결정적인 저항을 시도했다. 그는 5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공격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맥마흔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 제2군단은 티치노 강을 도강한 후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강타했다.
전투의 핵심은 포병의 활용이었다. 프랑스군은 새로 도입한 라이플드 대포를 사용했는데, 이는 기존의 활강포에 비해 사거리와 정확도가 월등했다. 나폴레옹 3세는 직접 포병대를 지휘하며 오스트리아군 진지를 집중 포격했다. 이런 화력의 우위는 결정적이었다.
오후 6시경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줄리아이 백작은 후퇴를 명령했고, 마젠타는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 승리로 밀라노로 가는 길이 열렸고, 6월 8일 나폴레옹 3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환호하는 시민들의 환영 속에 밀라노에 입성했다.
밀라노 해방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롬바르디아의 중심지인 밀라노가 해방되면서,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반오스트리아 봉기가 확산되었다. 베르가모, 브레시아, 코모 등 롬바르디아 각지에서 오스트리아 관리들이 축출되고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솔페리노 전투와 적십자의 탄생
마젠타 패배 후 오스트리아군은 쿠아드릴라테로 요새군으로 후퇴했다. 이는 베로나, 페스키에라, 만토바, 레냐고를 연결하는 강력한 방어선이었다. 줄리아이 백작은 이곳에서 재정비를 마친 후 반격을 시도하기로 했다. 한편 연합군도 오스트리아군을 완전히 격파하기 위해 추격전을 펼쳤다.
1859년 6월 24일, 솔페리노 언덕에서 두 군대가 마주쳤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대규모 회전 중 하나였다. 연합군 15만 명과 오스트리아군 13만 명이 격돌했고, 전투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솔페리노 전투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무기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살상력의 증가였다. 라이플 소총과 강선포의 사용으로 사상자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하루 동안 4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전투 현장을 목격한 스위스인 앙리 뒤낭은 전쟁의 참혹함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부상병 치료에 자원봉사로 참여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솔페리노의 기억』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중립적인 의료 구호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 창설로 이어졌다. 전쟁의 참혹함이 인도주의적 국제기구 탄생의 계기가 된 것이다.
중부 이탈리아의 자발적 합류
솔페리노 대승으로 오스트리아군은 쿠아드릴라테로 안으로 완전히 후퇴했다. 롬바르디아는 사실상 해방되었고, 베네치아를 제외한 북부 이탈리아가 연합군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다.
토스카나에서는 대공 레오폴도 2세가 민중 봉기 앞에서 피렌체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베티노 리카솔리 남작이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리카솔리는 즉시 사르데냐-피에몬테와의 합병을 선언했다.
파르마와 모데나 공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친오스트리아 공작들이 도망치고 임시 정부가 들어섰다. 심지어 교황령의 일부인 로마냐 지역(볼로냐, 페라라, 포를리)에서도 교황 정부가 축출되고 피에몬테 합병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런 변화는 플롬비에르 협정의 원래 계획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원래 계획에서는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한 에트루리아 왕국을 별도로 건설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탈리아 민족들은 분할이 아닌 통합을 원했고, 사르데냐-피에몬테를 중심으로 한 단일 왕국 건설을 지지했다.
빌라프랑카 휴전과 나폴레옹 3세의 변심
하지만 연합군의 승승장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제동이 걸렸다. 1859년 7월 11일, 나폴레옹 3세가 갑작스럽게 오스트리아와 휴전을 선언한 것이다. 빌라프랑카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카보우르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나폴레옹 3세의 결정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프로이센이 라인강 일대에서 4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며 프랑스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둘째, 러시아가 오스트리아 지지를 표명하면서 유럽 전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셋째, 프랑스 내부에서도 전쟁 지속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3세를 놀라게 한 것은 이탈리아 내부의 급진적 변화였다. 중부 이탈리아의 자발적 합병 요구는 원래 계획을 완전히 뒤바꾸는 것이었다. 만약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가 탄생할 것이고, 이는 프랑스의 이익에 반할 수도 있었다.
빌라프랑카 협정에 따르면 롬바르디아만 피에몬테에 할양하고,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가 계속 보유한다. 중부 이탈리아의 공작들은 복위되고, 이탈리아는 교황을 의장으로 하는 연방 체제로 재편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플롬비에르 협정보다도 훨씬 소극적인 내용이었다.
카보우르의 분노와 사임
빌라프랑카 협정 소식을 들은 카보우르는 격분했다. 그는 즉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찾아가 협정 거부를 요구했다. "폐하, 이 협정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프랑스의 속국이 될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명예와 독립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국왕은 현실적 판단을 내렸다. 프랑스의 지원 없이는 오스트리아와 맞설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협정 수용을 결정했고, 이에 항의하여 카보우르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카보우르의 사임은 이탈리아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통일 운동의 지도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와 보수 세력들이 반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위기는 이탈리아 민족주의를 더욱 단단하게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중부 이탈리아의 임시 정부들은 구공작 복위를 거부했다. 토스카나의 리카솔리는 "우리는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선언했고, 파르마와 모데나에서도 비슷한 입장을 표명했다. 민중들은 거리로 나와 통일 지지 시위를 벌였다.
중부 이탈리아 주민투표와 합병
1860년 초 정세가 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3세는 중부 이탈리아 문제를 주민투표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지만, 동시에 프랑스가 사보이와 니스 할양을 관철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1860년 3월 카보우르가 총리로 복귀했다. 그는 즉시 나폴레옹 3세와 비밀 협상을 벌였다. 중부 이탈리아 합병을 인정받는 대가로 사보이와 니스를 프랑스에 할양한다는 새로운 합의가 이루어졌다.
3월 11일과 12일, 토스카나와 에밀리아(파르마-모데나-로마냐 연합)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토스카나에서는 366,571표 대 14,925표로, 에밀리아에서는 426,006표 대 756표로 피에몬테 합병이 결정되었다. 투표율도 90%를 넘어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보여주었다.
이 결과는 유럽 전체를 놀라게 했다. 무력이 아닌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국가 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또한 이탈리아 통일이 외부의 강요가 아닌 민족 자신의 의지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분명히 보여주었다.
결론
1859년 제2차 독립전쟁은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약을 의미했다. 마젠타와 솔페리노에서의 군사적 승리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지배를 크게 약화시켰고, 롬바르디아 해방을 통해 통일의 구체적 성과를 거두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부 이탈리아의 자발적 합류였다. 이는 플롬비에르 협정의 원래 계획을 뛰어넘어 진정한 민족 통일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록 나폴레옹 3세의 갑작스러운 휴전으로 베네치아 해방은 연기되었지만, 전쟁의 성과는 분명했다.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는 두 배로 확장되었고, 인구도 500만 명에서 1,100만 명으로 늘어났다. 무엇보다 이탈리아 민족의 통일 의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였다.
동시에 이 전쟁은 근대 전쟁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었다. 라이플 소총과 강선포의 사용, 철도를 통한 신속한 병력 이동, 전신을 이용한 통신 등 산업혁명의 성과가 전쟁에 적용되었다. 솔페리노 전투에서 드러난 전쟁의 참혹함은 국제 인도법과 적십자 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1859년 전쟁은 이탈리아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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