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63. 가리발디의 천인대 원정과 시칠리아·나폴리 왕국 정복을 통한 남부 이탈리아 해방

SSSCH 2025. 6. 1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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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5월 5일 밤, 제노바 항구에서 두 척의 낡은 증기선이 조용히 출항했다. 붉은 셔츠를 입은 1,089명의 자원병들이 탄 이 배들은 시칠리아를 향해 나아갔다. 이들의 지휘관은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전설적 인물 주세페 가리발디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 모험적인 원정은 불과 6개월 만에 남부 이탈리아 전체를 뒤바꾸고 이탈리아 통일을 현실로 만드는 기적을 일으켰다. 천인대의 모험은 19세기 가장 극적인 해방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시칠리아 봉기와 원정 결정

1860년 4월 4일,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반부르봉 봉기가 일어났다. 프란체스코 크리스피와 로몰로 카르파 등이 주도한 이 봉기는 시칠리아의 자치권 회복과 이탈리아 통일 참여를 목표로 했다. 하지만 부르봉 왕조의 군대가 신속하게 진압에 나서면서 봉기 세력은 산악 지대로 후퇴해야 했다.

봉기 소식이 북부 이탈리아에 전해지자, 각지의 민족주의자들이 지원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마치니의 공화주의자들과 가리발디의 추종자들이었다. 이들은 시칠리아 원정을 통해 남부 해방을 시도하자고 제안했다.

가리발디는 처음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1849년 로마 공화국 방어전에서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고, 무모한 모험이 가져올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칠리아 혁명가들의 간절한 요청과 북부에서 몰려든 자원병들의 열정에 마음이 움직였다. 결정적인 계기는 로사리노 파일로라는 시칠리아 혁명가가 직접 찾아와 "시칠리아 민중이 해방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호소한 것이었다.

1860년 5월 초, 가리발디는 마침내 원정을 결심했다. 그는 제노바 근처 퀘스토 마을에 자원병들을 집결시켰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몰려든 청년들은 대부분 20-30대였고, 학생, 변호사, 의사, 수공업자 등 중산층 출신이 많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었다.

천인대의 구성과 출항

가리발디의 부대는 정확히 1,089명이었기 때문에 '천인대(I Mille)'라고 불렸다. 이들 중 150명이 제노바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토스카나, 로마냐 등 이탈리아 각지에서 온 자원병들이었다. 외국인도 있었는데, 헝가리 독립운동가 몇 명과 영국인 기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대의 편성은 매우 간단했다. 가리발디가 총사령관이고, 그 아래 니노 빅시오, 지아코모 메디치, 스테파노 틸키 등이 대대장을 맡았다. 이들은 모두 1848-49년 혁명이나 1859년 전쟁에서 가리발디와 함께 싸운 베테랑들이었다. 무기는 매우 부족했다. 소총 1,000정 정도와 약간의 탄약, 그리고 낡은 대포 몇 문이 전부였다.

가장 큰 문제는 배였다. 가리발디는 사르데냐 증기선회사 소유의 '피에몬테'호와 '롬바르도'호를 징발했다. 이 배들은 화물선으로 군함이 아니었고, 속도도 느렸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월 5일 밤 11시, 두 배는 제노바 항을 떠나 남쪽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출항 과정에서 가리발디는 큰 결단을 내려야 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원정을 승인하지 않았고, 카보우르는 오히려 반대 입장이었다. 만약 원정이 실패한다면 가리발디와 천인대는 반역자로 처벌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리발디는 "이탈리아를 위해서라면 모든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마르살라 상륙과 첫 승리

5월 11일 새벽, 천인대는 시칠리아 서쪽 끝 마르살라 항구에 상륙했다. 마르살라는 영국 상인들이 와인 무역을 하는 작은 항구였는데, 우연히 영국 군함 두 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는 천인대에게 행운이었다. 부르봉 해군이 영국 군함을 공격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륙 직후 가리발디는 시칠리아 민중들에게 호명을 발표했다. "시칠리아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을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 이탈리아 통일의 깃발 아래 함께 싸우자!"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마르살라 주민들은 대부분 무관심했고, 일부는 오히려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시칠리아 농민들은 수세기 동안 외침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또 다른 침입자로 여겼던 것이다.

첫 번째 시험은 5월 15일 칼라타피미 전투였다. 가리발디는 팔레르모로 진군하던 중 부르봉군과 마주쳤다. 라넘 장군이 지휘하는 부르봉군은 3,000명의 정규군이었고, 가리발디는 1,000명의 자원병과 몇 백 명의 시칠리아 농민 지원군이 전부였다.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가리발디는 과감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 언덕을 넘으면 팔레르모다!"라고 외치며 가리발디는 선두에서 돌격했다. 붉은 셔츠 부대의 용맹함과 시칠리아 농민들의 지형 지식이 결합되어 부르봉군을 격파했다. 칼라타피미 승리는 천인대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시칠리아 민중들도 이들이 진짜 해방군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팔레르모 공성전과 시칠리아 해방

칼라타피미 승리 후 가리발디의 부대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시칠리아 각지에서 농민들이 합류했고, 팔레르모에 도착할 때는 3,000명이 넘는 부대가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무기도 제대로 없었지만, 조국 해방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팔레르모는 시칠리아의 수도이자 부르봉 왕조의 요새였다. 페르디난도 란차 디 브롤로 장군이 2만 명의 병력으로 방어하고 있었고, 강력한 요새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3,000명의 비정규군이 2만 명의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가리발디는 기상천외한 전술을 구사했다. 5월 27일 새벽, 그는 소수 정예로 팔레르모 시내에 잠입했다.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시가지 곳곳에서 동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팔레르모냐 죽음이냐(Palermo o morte)!"라는 구호 아래 시민들이 봉기에 참여했다.

부르봉군은 예상치 못한 시가전에 당황했다. 좁은 골목에서는 정규군의 장점이 무용지물이었다. 시민들은 지붕에서 돌과 기와를 던지며 저항했고, 바리케이드를 쌓아 부르봉군의 이동을 막았다. 3일간의 격전 끝에 부르봉군은 항복을 선언했다.

6월 6일, 팔레르모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부르봉군은 요새 몇 곳만 유지하고 나머지 지역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가리발디는 시칠리아 임시 독재관으로 선출되었고, 시칠리아 전체가 사실상 해방되었다.

나폴리 왕국 침공과 볼투르노 강 전투

시칠리아 해방 후 가리발디는 더 큰 목표를 세웠다. 바로 나폴리 왕국 본토 침공이었다. 8월 20일, 가리발디는 메시나 해협을 건너 칼라브리아에 상륙했다. 이때 그의 부대는 1만5천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나폴리 왕국의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유리했다. 프란체스코 2세는 겨우 23세의 젊은 왕이었고,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다. 더욱이 부르봉 왕조의 전제정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가리발디가 북상하자 나폴리군은 거의 저항하지 않고 후퇴했다.

9월 7일, 가리발디는 환호하는 시민들의 환영 속에 나폴리에 입성했다. 프란체스코 2세는 미리 가에타 요새로 도피했고, 나폴리 왕국의 수도가 해방되었다. 가리발디는 나폴리에서도 임시 독재관이 되었고, 남부 이탈리아 전체가 그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진짜 시험은 이제부터였다. 프란체스코 2세는 가에타에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5만 명의 부르봉군이 볼투르노 강 일대에 집결했다. 10월 1일, 볼투르노 강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는 가리발디 원정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부르봉군은 정규군다운 조직적인 공격을 펼쳤고, 가리발디군은 한때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가리발디의 뛰어난 지휘력과 붉은 셔츠 부대의 용맹함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하루 종일 계속된 전투 끝에 부르봉군이 후퇴했고, 가리발디의 최종 승리가 확정되었다.

농민 반응과 남부 사회의 복잡성

가리발디의 남부 원정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는 농민들의 반응이었다.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농민들은 수세기 동안 봉건적 착취에 시달려 왔다. 이들은 처음에 가리발디를 해방자로 환영했지만, 곧 실망하게 되었다.

농민들이 기대한 것은 토지 재분배였다. 이들은 대지주들의 라티푼디움을 해체하고 자신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가리발디와 북부에서 온 자유주의자들은 사유재산권을 존중했다. 토지 개혁 대신 점진적인 사회 발전을 추구했다.

이런 차이는 곧 갈등으로 이어졌다. 시칠리아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 폭동이 일어났고, 브론테 등에서는 대지주들이 살해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가리발디는 질서 유지를 위해 때로는 강경 조치를 취해야 했고, 이는 그의 고민을 더욱 깊게 했다.

남부 사회의 복잡성은 종교 문제에서도 드러났다. 가톨릭 교회는 부르봉 왕조를 지지했고, 가리발디의 자유주의를 경계했다. 특히 수도원 재산 몰수와 종교 교육 개혁은 성직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농촌 지역의 신심 깊은 농민들 중 일부는 교회의 영향을 받아 가리발디에 반대하기도 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의 만남

가리발디의 성공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정부에게 기쁨과 우려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카보우르는 가리발디가 로마까지 진군하여 교황과 충돌할 것을 우려했다. 이는 가톨릭 국가들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수 있었다. 또한 가리발디가 공화주의자들과 연대하여 왕정에 도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직접 나섰다. 국왕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교황령 일부를 점령한 후 나폴리로 향했다. 10월 26일, 테아노에서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가리발디는 말에서 내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다가가 "이탈리아 왕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이 만남은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가장 상징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 북부의 왕정과 남부의 민중 해방군이 만나 하나가 된 것이다. 가리발디는 정치적 야심을 버리고 왕에게 남부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나는 이탈리아 통일만을 원할 뿐입니다"라는 그의 말은 진정한 애국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주민투표와 왕국 통합

1860년 10월 21일, 시칠리아와 나폴리에서 이탈리아 왕국 가입을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시칠리아에서는 432,053표 대 667표로, 나폴리에서는 1,302,064표 대 10,312표로 통합이 결정되었다. 이는 민주적 절차를 통한 국가 통일의 또 다른 사례였다.

주민투표의 압도적 지지는 가리발디 원정의 역사적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남부 이탈리아 민중들이 진정으로 이탈리아 통일을 원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비록 일부 지역에서 반대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통일에 대한 열망이 훨씬 강했다.

11월 7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공식적으로 나폴리에 입성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는 알프스에서 시칠리아까지 확장되었다. 인구도 2,200만 명으로 늘어나 유럽의 주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결론

가리발디의 천인대 원정은 19세기 가장 극적인 해방 전쟁 중 하나였다. 1,000명의 자원병이 10만 명의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남부 이탈리아 전체를 해방시킨 것은 군사사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였다. 이는 무기나 숫자의 우위가 아닌 대의와 열정의 힘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원정의 성공 요인은 여러 가지였다. 가리발디의 뛰어난 지도력과 카리스마, 붉은 셔츠 부대의 용맹함, 시칠리아와 남부 민중들의 지지, 그리고 부르봉 왕조의 부패와 무능이 결합된 결과였다. 특히 민중 봉기와 정규군의 결합은 혁명 전쟁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하지만 원정은 남부 사회의 복잡한 문제도 드러냈다. 농민들의 토지 요구, 종교적 갈등, 지역적 편견 등은 통일 이후에도 계속된 과제가 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통일이 단순히 정치적 통합을 넘어 사회적·문화적 통합이라는 더 큰 도전을 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가리발디의 천인대 원정은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웅적인 서사시로 남아 있으며, 민족 해방 투쟁의 불멸의 모범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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