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끝나고 유트레히트 조약이 체결된 1713년, 이탈리아 반도는 다시 한 번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특히 북부 이탈리아의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롬바르디아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는데, 이전까지 스페인의 속령으로 머물며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던 롬바르디아가 오스트리아의 계몽주의적 개혁 정책 하에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롬바르디아 접수
1714년 라슈타트 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확정된 오스트리아의 롬바르디아 지배는 단순한 영토 이양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롤바르디아 평원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비옥한 농업 지역이자 상공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또한 알프스를 넘나드는 교역로의 요충지로서 경제적 가치가 매우 높았다.
오스트리아는 처음부터 이 지역을 단순한 수탈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 본토와 연결하는 중요한 교두보로 인식했으며, 이 지역의 경제적 발전이 곧 제국 전체의 번영으로 이어진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시대에 추진된 대대적인 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초기 오스트리아 통치는 기존 스페인 시대의 관료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밀라노 총독부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이제 빈의 중앙 정부와 직접 연결되는 행정 체계로 재편되었다. 이는 스페인 시대의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관료제에 비해 상당한 개선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혁 정신
1740년 오스트리아 대공위에 오른 마리아 테레지아는 즉위 초기부터 제국 전체의 근본적인 개혁 필요성을 절감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7년전쟁을 겪으면서 기존 체제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재정 문제와 행정 효율성 부족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롬바르디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혁 실험장 역할을 했다.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본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항이 적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경제적 기반도 탄탄해 개혁의 성과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9년부터 본격적인 토지 조사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는 근대적인 지적 제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테레지아나 지적 조사(Catasto Teresiano)로 불리는 이 사업은 단순한 토지 측량을 넘어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토지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고, 실제 생산성을 기준으로 과세 체계를 개편한 것이다. 이전까지 귀족과 교회가 누려온 각종 면세 특권도 대폭 축소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농민들에게는 상당한 부담 경감을, 국가에게는 안정적인 세수 확보를 가져다주었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교육 제도 개혁에도 힘을 쏟았다. 1774년 반포된 교육령은 초등교육을 의무화하고, 국가가 직접 교육 과정을 관리하도록 했다. 밀라노에는 새로운 대학이 설립되었고, 법학과 의학 교육이 크게 발전했다. 이러한 교육 정책은 롬바르디아 지역의 지적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이후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는 토대가 되었다.
요제프 2세의 급진적 개혁
1780년 황제가 된 요제프 2세는 어머니보다 훨씬 급진적인 개혁가였다. 계몽주의 철학에 깊이 심취한 그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제국을 근대화하려고 했다. 롬바르디아는 그의 개혁 의지가 가장 강하게 투영된 지역 중 하나였다.
요제프 2세의 가장 대담한 개혁 중 하나는 1781년 발표된 농노해방령이었다. 이는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에 적용된 조치였지만, 롬바르디아에서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이 지역의 농업 생산성이 높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자유로운 이동과 경제 활동이 전체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종교 정책에서도 요제프 2세는 파격적인 변화를 추진했다. 1781년 관용령을 통해 가톨릭 이외의 종교를 공식 인정했고, 수도원 해산 정책을 통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수도원들을 폐쇄했다. 롬바르디아에서만 약 165개의 수도원이 해산되었고, 그 재산은 국가가 몰수해 교육과 의료 사업에 활용했다.
이러한 정책은 가톨릭 교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도 창출했다. 수도원 토지가 시장에 나오면서 새로운 지주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보다 효율적인 농업 경영을 추구했다. 또한 교회의 독점적 지위가 약화되면서 세속 교육과 과학 연구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경제적 성과와 사회 변화
합스부르크의 개혁은 롬바르디아 경제에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부문에서는 새로운 작물 도입과 경작법 개선으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특히 옥수수와 감자 재배가 확산되면서 인구 증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식량 기반이 마련되었다.
상공업 발전도 주목할 만했다.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견직물 산업은 유럽 전체에서 명성을 얻었고, 베르가모와 브레시아 지역의 철강업도 크게 성장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길드 제도를 완화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장려했는데, 이는 기존의 보수적인 상인들에게는 위협이었지만 새로운 기업가들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교통 인프라 개선도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알프스 고개를 연결하는 도로가 대폭 확장되었고, 운하 시설도 개선되어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연결하는 교역로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롬바르디아를 단순한 농업 지역에서 유럽의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사회 구조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인 귀족 계층의 영향력은 줄어든 반면, 상공업에 종사하는 새로운 부르주아 계층이 부상했다. 이들은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 나갔고, 기존의 신분제 사회에 균열을 가져왔다. 또한 교육 기회가 확대되면서 지식인 계층도 크게 증가했다.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
오스트리아의 개혁 정책은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도 가져왔다. 교육 발전과 경제 성장으로 인해 롬바르디아 지역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면서, 계몽주의 사상이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밀라노의 지식인들은 볼테르, 디드로, 루소 등의 저작을 탐독했고, 이들의 사상을 이탈리아 현실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1764)은 유럽 전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베카리아는 고문과 사형제를 비판하며 인도주의적 형법 개혁을 주장했는데, 이는 요제프 2세의 개혁 정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베카리아의 사상은 단순히 법학 분야를 넘어서 전반적인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밀라노에서 발행된 『일 카페』(Il Caffè)라는 잡지는 계몽주의 사상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잡지는 경제학, 정치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실었는데, 특히 자유주의적 경제 사상과 사회 개혁론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러한 지적 활동은 이후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개혁의 한계와 저항
하지만 요제프 2세의 급진적 개혁은 여러 계층의 저항에 부딪혔다. 가톨릭 교회는 종교 정책에 강하게 반발했고, 전통적인 귀족들은 특권 박탈에 불만을 표했다. 농민들조차도 일부 개혁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는데, 특히 독일어 사용 강제와 같은 문화적 동화 정책에는 강한 저항을 보였다.
요제프 2세는 제국의 통일성을 강화하기 위해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강요했는데, 이는 롬바르디아 지역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어와 라틴어에 익숙한 지역민들에게 독일어 강제는 문화적 억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지역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과도하게 급진적인 개혁 속도도 문제가 되었다. 요제프 2세는 10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수백 년간 유지되어 온 제도들을 한꺼번에 바꾸려고 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개혁의 효과가 충분히 정착되기 전에 반발만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1790년 요제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인 레오폴드 2세는 일부 개혁을 후퇴시켜야 했다. 특히 종교 정책과 언어 정책에서는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다. 하지만 토지 개혁과 농노 해방, 교육 제도 개선 등 핵심적인 개혁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나폴레옹 시대를 향한 전환점
18세기 말 롬바르디아는 합스부르크의 개혁을 통해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경제적으로는 더욱 발전했고, 사회적으로는 더욱 개방적이 되었으며, 지적으로는 계몽주의 사상이 깊이 뿌리내렸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나폴레옹 시대에 이 지역이 프랑스의 혁명적 이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었다.
특히 새롭게 성장한 부르주아 계층과 계몽주의에 영향받은 지식인들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와 평등 이념에 크게 매료되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의 개혁이 가져다준 변화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를 원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796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때 프랑스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합스부르크 시대에 형성된 효율적인 행정 체계와 근대적인 법 제도는 이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왕국을 건설할 때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개혁 성과를 적극 활용하면서 동시에 프랑스식 제도를 접목시켜 나갔다.
결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롬바르디아 통치는 이탈리아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의 계몽주의적 개혁은 이 지역을 중세적 정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근대 사회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 토지 제도 개혁, 교육 발전, 종교 관용, 경제 자유화 등의 정책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롬바르디아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위로부터의 강제적 개혁에 그치지 않고, 지역 사회 내부의 역동성을 자극했다. 새로운 사회 계층의 등장,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 경제적 근대화 등은 모두 이후 이탈리아가 근대 국민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데 필수적인 기반이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개혁은 비록 외국의 지배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이탈리아인들의 근대적 의식을 깨우는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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