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결과로 이탈리아 반도가 재편되던 18세기 초, 남부 이탈리아는 또 다른 중대한 변화를 맞이했다. 오스트리아가 롬바르디아를 차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섬도 새로운 지배 세력의 손에 넘어갔다. 1734년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젊은 왕자 카를로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좌에 오르면서, 이 지역은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독립적인 왕국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카를로 7세로 즉위한 그는 이후 반세기에 걸쳐 남부 이탈리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카를로 7세의 즉위와 독립 왕국 수립
1734년 5월 10일, 18세의 카를로가 나폴리에 입성했을 때 시민들의 환영은 뜨거웠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통치자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라, 오랜 외국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이었다. 16세기 이후 나폴리 왕국은 줄곧 스페인의 부왕이 다스리는 속령이었고, 시칠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비로소 이 지역에 상주하는 독립적인 군주가 나타난 것이다.
카를로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파르마 공작의 딸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였다. 그의 즉위는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의 결과였다. 스페인이 오스트리아로부터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되찾는 대가로 롬바르디아를 포기한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유럽 정치의 산물이었지만, 카를로에게는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할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새로운 왕은 즉위 초기부터 이전 통치자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스페인 부왕들이 본국의 이익을 우선시했던 것과 달리, 카를로는 나폴리를 자신의 영구한 거주지로 삼았다. 그는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지역 귀족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이러한 자세는 남부 이탈리아 귀족들에게 큰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카를로의 첫 번째 과제는 왕국의 행정 체계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페인식 관료제를 유지하면서도 현지 실정에 맞게 개선해 나갔다. 특히 재정 관리 체계를 혁신해 국가 수입을 크게 늘렸고,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카세르타 궁전 건설과 왕실 위상 확립
카를로 7세의 야심찬 계획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카세르타 왕궁 건설이었다. 1752년 착공된 이 궁전은 베르사유 궁전에 버금가는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했다. 카를로는 단순히 거주 공간을 마련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르봉 왕조의 권위와 나폴리 왕국의 위상을 유럽 전체에 과시하려고 했다.
궁전 설계는 루이지 반비텔리가 맡았는데, 그는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을 절묘하게 결합한 걸작을 만들어냈다. 총 1,200개의 방을 가진 이 거대한 건축물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궁전 중 하나였다. 특히 중앙 계단과 왕좌의 간은 그 웅장함으로 유명했으며, 각국 사절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카세르타 궁전은 단순한 건축물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는 나폴리 왕국이 더 이상 스페인의 속령이 아니라 독립적인 주권 국가임을 선언하는 상징이었다. 또한 궁전 건설 과정에서 수많은 장인과 예술가들이 고용되었는데, 이는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궁전 주변에 조성된 정원도 주목할 만했다. 120헥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정원에는 분수와 조각상, 인공 폭포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정원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계몽주의적 자연 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카를로는 이를 통해 자신이 단순한 절대 군주가 아니라 계몽된 군주임을 보여주려고 했다.
산업 진흥과 경제 근대화 정책
카를로 7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나폴리 왕국의 산업 기반을 구축한 것이었다. 그는 즉위 초기부터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는 주로 농업에 의존하는 후진적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카를로는 이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다.
가장 대표적인 성과는 카포디몬테 도자기 공장의 설립이었다. 1743년 설립된 이 공장은 유럽 최고 수준의 도자기를 생산했다. 카를로는 독일 마이센과 프랑스 세브르 도자기에 맞서기 위해 최고의 기술자들을 스카우트했고, 독자적인 기법을 개발했다. 카포디몬테 도자기는 섬세한 조형미와 화려한 색채로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직물 산업 육성에도 큰 힘을 쏟았다. 산 레우초에 설립된 견직물 공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카를로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숙련 기술자들을 초빙해 최신 기법을 도입했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견직물은 품질이 뛰어나 왕실은 물론 유럽 각국 궁정에서도 사용되었다.
금속 공업 발전도 주목할 만했다. 몬지아노에 설립된 대포 주조 공장은 왕국의 군사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 공장은 단순히 무기 생산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금속 제품을 만들어냈다. 특히 정밀한 과학 기구 제작 기술은 당시 유럽에서도 인정받을 수준이었다.
농업 개혁과 토지 제도 개선
산업 발전과 함께 카를로 7세는 농업 부문의 개혁에도 착수했다. 남부 이탈리아의 주된 문제 중 하나는 비효율적인 대농장(라티푼디움) 제도였다. 소수의 대지주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실제 경영은 매우 조방적이어서 생산성이 낮았다.
카를로는 점진적이지만 지속적인 토지 개혁을 추진했다. 교회가 소유한 일부 토지를 세속화해 중소 농민들에게 분배했고, 새로운 작물 도입을 장려했다. 특히 감자와 옥수수 재배가 확산되면서 식량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이는 인구 증가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관개 시설 개선에도 많은 투자를 했다. 캄파니아 평원의 배수 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경작지를 크게 늘렸다. 또한 새로운 농업 기법을 보급하기 위해 농업 학교를 설립하고, 선진 농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8세기 중반 나폴리 왕국의 농업 생산성은 상당히 향상되었다.
목축업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양모 생산을 늘리기 위해 스페인에서 우수한 품종의 양을 들여왔다. 아브루초 지역의 목축업은 이 시기에 크게 발전했고, 생산된 양모는 직물 공업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발굴의 문화적 의미
카를로 7세 시대의 가장 흥미진진한 사건 중 하나는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발굴이었다. 1738년 헤르쿨라네움에서 시작된 발굴 작업은 1748년 폼페이로 확대되었다. 이는 단순한 고고학적 발견을 넘어서 유럽 전체의 문화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발굴 작업은 처음에는 우연히 시작되었다. 카를로가 카세르타 궁전 건설을 위해 대리석을 구하던 중 고대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왕은 곧 이것의 엄청난 가치를 깨달았다. 그는 당시 유럽 최고의 고고학자들을 초빙해 체계적인 발굴을 진행했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고대 로마 문명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특히 완벽하게 보존된 프레스코화와 조각상들은 18세기 유럽의 신고전주의 예술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를로는 이들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포르티치에 박물관을 설립했는데, 이는 유럽 최초의 고고학 박물관 중 하나였다.
발굴된 유물들은 나폴리 왕국의 문화적 위상을 크게 높였다. 유럽 각국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이들 유물을 보기 위해 나폴리를 찾았고, 이는 이른바 '그랜드 투어'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괴테, 빙켈만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나폴리를 방문해 고대 문명의 경이로움을 체험했다.
이러한 문화적 성취는 카를로 7세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이 단순히 경제적으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이 시기 나폴리는 로마, 파리와 함께 유럽의 주요 문화 도시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교육 제도 개혁과 계몽주의 수용
카를로 7세는 왕국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 제도 개선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위 초기부터 교육 개혁에 착수해 기존의 낙후된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다. 이는 당시 유럽에 확산되고 있던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이기도 했다.
1735년 설립된 나폴리 대학교 개혁은 그 출발점이었다. 카를로는 중세적인 스콜라 철학 중심의 교육과정을 폐지하고,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는 새로운 체계를 도입했다. 특히 의학, 법학, 수학, 자연과학 분야의 교육을 대폭 강화했다. 이를 위해 유럽 각지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했다.
초중등교육 분야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기존에는 주로 교회가 담당하던 교육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교육과정에는 라틴어와 신학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 수학, 지리, 역사 등이 포함되었다. 이는 실용적 지식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교육 이념의 반영이었다.
여성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754년 설립된 산 마르첼리노 수녀원 부설 학교는 귀족 여성들을 위한 최초의 정규 교육 기관이었다. 여기서는 문학, 음악, 회화 등의 교양 과목뿐만 아니라 수학과 자연과학도 가르쳤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시도였다.
종교 정책과 교회와의 관계
카를로 7세의 종교 정책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혁신적이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동시에 계몽주의적 사고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세속적 권력을 견제하려고 했다. 이는 당시 유럽의 다른 계몽 군주들과 유사한 접근법이었다.
1741년 체결된 콘코르다토는 교황청과 나폴리 왕국 간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했다. 이 협정을 통해 카를로는 주교 임명권을 확보했고, 교회 재산에 대한 과세권도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톨릭을 국교로 인정하고 교회의 종교적 권위를 존중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교회 재산의 일부 세속화도 추진했다. 특히 사회적 기능을 하지 않는 수도원들의 재산을 몰수해 교육과 자선 사업에 활용했다. 이는 요제프 2세의 정책과 유사했지만, 카를로는 더욱 점진적이고 신중하게 접근했다. 그 결과 교회의 강력한 반발 없이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종교 재판소의 권한도 제한했다. 민사 사건에 대한 교회 법원의 관할권을 축소하고, 세속 법원의 권한을 강화했다. 이는 근대적 사법 제도 확립의 중요한 단계였다. 또한 출판 검열권도 국가가 직접 행사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통해 계몽주의 서적들이 더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과 나폴리 떠남
1759년 카를로의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이복형인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6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이는 카를로에게는 영광이었지만, 나폴리 왕국에게는 큰 손실이었다. 25년간 왕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군주를 잃게 된 것이다.
카를로는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에 왕국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조치들을 취했다. 그는 셋째 아들 페르디난도를 나폴리 왕으로 남겨두었고, 유능한 대신들로 구성된 섭정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자신이 추진해온 개혁 정책들이 지속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했다.
카를로가 스페인으로 떠날 때 나폴리 시민들의 아쉬움은 컸다. 그는 단순히 외국에서 온 군주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폴리를 사랑하고 이 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치세는 나폴리 왕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중 하나였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가 된 후에도 그는 나폴리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다. 아들 페르디난도 4세의 통치를 지원했고, 나폴리와 스페인 간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18세기 후반 유럽 정치에서 부르봉 가문의 영향력을 크게 높였다.
결론
카를로 7세의 25년 통치는 나폴리 왕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오랜 외국 지배에 시달린 남부 이탈리아에 독립적인 정체성을 부여했고, 경제적 근대화와 문화적 발전을 동시에 이루어냈다. 카세르타 궁전의 웅장함은 왕국의 위상을 상징했고, 산업 진흥 정책은 경제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었다.
특히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발굴은 나폴리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고고학적 발견을 넘어서 18세기 유럽의 지적, 예술적 지형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카를로의 계몽주의적 정책들은 교육, 종교, 행정 등 사회 전반에 근대적 변화를 가져왔다.
카를로 7세가 이룬 성취는 이후 남부 이탈리아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비록 그 자신은 스페인으로 떠났지만, 그가 심어놓은 근대화의 씨앗들은 계속 자라나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의 통치는 외국 지배 하에서도 지역적 정체성과 독립성을 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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