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30. 동고트 왕국과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 전쟁

SSSCH 2025. 5. 27.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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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년 라벤나에서 오도아케르가 동고트족 왕 테오도리크에게 살해당하면서, 이탈리아는 새로운 통치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테오도리크는 단순한 야만족 군벌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10년간 교육받은 문명화된 통치자였다. 그는 로마의 문화와 제도를 존중하면서도 게르만족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왕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6세기 중반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야심찬 재정복 계획이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는 다시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20년간 계속된 고트 전쟁은 이탈리아를 폐허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비잔틴 문화의 찬란한 유산도 남겼다.

테오도리크의 현명한 통치와 문화적 번영

테오도리크 대왕은 동고트 왕국의 창건자이자 6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통치자 중 하나였다. 그는 461년경 판노니아에서 태어나 8세 때 인질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져 10년간 그리스-로마 교육을 받았다. 이런 경험 덕분에 그는 야만족과 로마인의 두 세계를 모두 이해할 수 있었고, 이는 후에 그의 뛰어난 통치력의 바탕이 되었다. 478년 동고트족의 왕이 된 후, 그는 동로마 황제 제노의 요청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오도아케르를 제거했다.

테오도리크의 통치 철학은 '로마인에게는 로마의 법을, 고트족에게는 고트족의 법을'이라는 이원적 체제였다. 로마인들은 기존의 법과 관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고, 원로원과 집정관 같은 전통적 제도도 계속되었다. 반면 고트족들은 자신들의 부족법에 따라 생활했고, 주로 군사와 행정의 핵심 직책을 담당했다. 이런 분업 체제는 양측 모두에게 만족을 주었고, 30년간의 평화를 가능하게 했다.

경제적으로도 테오도리크 시대는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오랜 전쟁으로 파괴된 도로와 수로, 공공건물들이 대대적으로 복구되었다. 특히 라벤나는 동고트 왕국의 수도로서 화려하게 단장되었는데, 테오도리크 영묘와 산 비탈레 성당의 전신 등이 이 시기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또한 지중해 무역이 다시 활성화되면서 이탈리아 도시들이 활기를 되찾았다.

문화적으로는 로마의 전통과 게르만의 새로운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카시오도루스, 보에티우스, 심마쿠스 같은 로마 귀족 출신 학자들이 왕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들은 고전 문화의 보존과 전수에 크게 기여했다.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나 카시오도루스의 『고트족사』 같은 작품들은 이 시기의 지적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종교 갈등과 아리우스파 문제

하지만 동고트 왕국에는 근본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종교 문제였다. 고트족들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였던 반면, 이탈리아의 로마인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테오도리크는 처음에는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쳐 이 문제를 우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동로마 제국에서 시작되었다. 519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누스 1세가 아리우스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테오도리크는 이를 자신의 왕국에 대한 간접적 압박으로 받아들였다. 더욱이 이탈리아 내 가톨릭 귀족들이 동로마와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정보가 입수되면서 의심이 깊어졌다. 결국 523년 테오도리크는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보에티우스를 반역 혐의로 처형하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보에티우스의 처형은 동고트 왕국의 정치적 균형을 깨뜨린 결정적 사건이었다. 로마 귀족들은 더 이상 테오도리크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동로마 제국과의 연대 의식이 강화되었다. 526년 테오도리크가 죽자 그의 딸 아말라순타가 어린 손자 아탈라리크를 대신해 섭정이 되었지만, 정치적 기반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534년 아탈라리크가 18세에 요절하자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아말라순타는 사촌 테오다투스와 결혼하여 공동통치를 시작했지만, 테오다투스는 곧 그녀를 살해하고 단독 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건은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이탈리아 침공의 완벽한 명분을 제공했다. 동로마 황제의 조카딸이자 동맹국의 여왕이 살해당한 것을 복수한다는 대의명분이 생긴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 야망과 벨리사리우스 원정

527년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잃어버린 서방 영토를 되찾아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거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이미 반달족의 북아프리카 왕국을 멸망시켜 이 지역을 수복한 경험이 있었고, 이제 이탈리아가 다음 목표였다. 535년 그는 자신의 최고 장군 벨리사리우스에게 이탈리아 원정을 명령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당대 최고의 명장 중 하나로, 북아프리카 재정복에서 이미 그 능력을 입증한 바 있었다. 그는 비교적 소수의 정예군을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시칠리아의 고트족 총독은 거의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는데, 이는 테오다투스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의 지지 때문이기도 했다. 536년 벨리사리우스는 본토로 건너가 나폴리를 포위했다.

나폴리 공성전은 벨리사리우스의 뛰어난 전술적 재능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도시의 견고한 성벽 때문에 정면 공격이 어려웠지만, 그는 고대 로마 시대의 수도관을 이용해 소수 정예 부대를 성 안으로 침투시켜 성문을 열게 하는 기발한 작전을 구사했다. 나폴리가 함락되자 고트족들 사이에서는 테오다투스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고, 결국 그는 폐위되고 비티게스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었다.

536년 12월 9일, 벨리사리우스는 거의 무혈로 로마에 입성했다. 고트족 수비대는 미리 철수했고, 로마 시민들은 '해방군'을 환영했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비티게스는 라벤나에서 대군을 결집한 후 537년 3월부터 로마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1년 2개월간 계속된 로마 공성전은 고트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다.

고트 전쟁의 참상과 이탈리아의 황폐화

로마 공성전 동안 벨리사리우스는 뛰어난 방어 지휘를 보여주었다. 그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보강하고, 곳곳에 방어탑을 설치했으며, 테베레 강의 다리들을 통제하여 고트군의 보급을 차단했다. 또한 로마 시민들을 전투에 동원하여 인력 부족을 해결했다. 특히 538년 3월 하드리아누스 묘(현재의 산탄젤로 성) 전투에서는 고트군의 결정적 공격을 막아내며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전쟁의 진정한 피해자는 일반 주민들이었다. 로마 공성전 기간 동안 도시 인구의 상당수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이탈리아 전역이 전장터가 되면서 농업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고트군과 비잔틴군 모두 현지 조달에 의존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곡식과 가축이 약탈당했고, 많은 농장들이 버려졌다.

540년 비티게스가 라벤나에서 항복하면서 1차 고트 전쟁이 끝나는 듯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비티게스를 포로로 잡고 왕국의 보물을 몰수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가 벨리사리우스를 페르시아 전선으로 급히 소환하면서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다. 이탈리아에 남은 비잔틴군은 소수였고, 새로 임명된 총독들은 벨리사리우스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541년 고트족들이 토틸라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면서 2차 고트 전쟁이 시작되었다. 토틸라는 매우 유능한 지도자로, 이탈리아의 사회적 모순을 교묘히 이용했다. 그는 노예들을 해방시켜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켰고,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약속하며 지지를 얻었다. 또한 아리우스파뿐만 아니라 가톨릭도 포용하는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쳐 민심을 얻었다.

546년 토틸라는 로마를 재점령했다. 이때 그는 로마 시민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성벽을 일부 파괴하여 도시를 사실상 폐허로 만들었다. 한때 1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로마가 거의 빈 도시가 된 것이다. 이는 상징적으로 고전 고대의 종료를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나르세스의 최종 승리와 비잔틴 지배 확립

552년 유스티니아누스는 환관 출신의 뛰어난 행정가이자 장군인 나르세스를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나르세스는 벨리사리우스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과 자금을 지원받았고, 체계적인 재정복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먼저 북부 이탈리아의 요충지들을 확보한 후, 토틸라의 주력을 결전으로 유인했다.

552년 7월 아펜니노 산맥의 타기나에 평원에서 벌어진 최종 결전에서 토틸라가 전사하고 고트군이 궤멸되면서 고트 왕국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마지막 고트 왕 테이아도 553년 베수비우스 산 기슭의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으면서, 동고트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나르세스는 이후 15년간 이탈리아 총독으로 재임하며 전후 복구에 힘썼다. 파괴된 도시들이 재건되었고, 농업이 점진적으로 회복되었으며, 행정 체계가 정비되었다. 특히 라벤나는 비잔틴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산 비탈레 성당과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의 모자이크들은 이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비잔틴 예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20년간의 전쟁으로 입은 상처는 너무 깊었다. 인구가 격감했고, 도시들이 쇠락했으며, 경제가 파탄났다. 로마는 한때 5만 명 이하로 인구가 줄어들었고, 밀라노나 제노바 같은 도시들도 예전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지중해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전락했고, 이런 쇠퇴는 수백 년간 계속되었다.

라벤나 모자이크와 비잔틴 예술의 꽃

고트 전쟁의 파괴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라벤나에서는 인류 문화사에 길이 남을 예술적 성취가 이루어졌다. 특히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는 비잔틴 예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48년경 완성된 이 모자이크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모자이크는 황제가 성찬용 황금 그릇을 들고 신하들과 함께 행진하는 모습을 그렸다. 황제는 후광을 두르고 있어 그의 신성함을 강조하며, 주변 인물들의 시선이 모두 황제에게 집중되도록 구성되었다. 색채는 금색과 자주색을 주조로 하여 황제의 위엄을 극대화했다.

테오도라 황후의 모자이크는 더욱 화려하다. 황후는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옷자락에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는 장면이 수놓아져 있다. 이는 황후를 성모 마리아와 연결시키는 종교적 상징이다. 주변의 궁녀들도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진 채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의 모자이크들도 장관이다. 특히 남벽의 26명 순교자 행렬과 북벽의 22명 성녀 행렬은 비잔틴 예술의 특징인 평면성과 정신성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인물들은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금색 배경 위에서 천상의 존재들처럼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모자이크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비잔틴 제국의 정치적 이념을 시각화한 것이었다. 황제와 황후의 신성함, 교회와 국가의 연대, 동방적 전제군주제의 웅장함이 예술 작품을 통해 표현된 것이다. 라벤나의 모자이크들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관광객들을 매혹시키며, 비잔틴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은 군사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이탈리아는 고대의 번영을 완전히 잃었고, 인구와 경제력이 급격히 쇠퇴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마의 고전 문화와 기독교 문명, 그리고 동방의 비잔틴 문화가 만나 새로운 종합을 이루어냈다. 라벤나의 모자이크들은 바로 이런 문화적 융합의 결정체였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분열과 파괴의 시대였지만, 문화사적으로는 새로운 중세 문명의 토대가 놓인 중요한 전환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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