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29. 훈족 압박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 과정

SSSCH 2025. 5. 27.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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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년 동유럽 초원지대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로마 제국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훈족이 흑해 북안의 알란족과 동고트족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유럽 전체의 민족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거대한 파도는 곧 라인강과 도나우강 방어선을 무너뜨렸고, 결국 476년 서로마 제국의 종료로 이어지는 100년간의 격변을 촉발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한 지 800년, 제국이 수립된 지 500년 만에 서쪽 절반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훈족의 서진과 게르만족 대이동

훈족은 몽골계 유목민으로 추정되는데, 중국 사료에 나오는 흉노와 동일한 민족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뛰어난 기마술과 복합궁 사용법으로 무장한 채 서쪽으로 이동해왔다. 아틸라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미 훈족의 압박은 동유럽의 게르만족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375년 흑해 연안의 동고트 왕국이 훈족에게 정복당하자, 서고트족은 대규모로 도나우강을 건너 로마 영토로 들어왔다.

발렌스 황제는 서고트족의 정착을 허용했지만, 로마 관리들의 부패와 차별 대우로 갈등이 격화되었다. 378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가 전사하고 로마군이 궤멸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는 칸나에 전투 이후 가장 충격적인 패배였고, 더 이상 로마군이 야만족을 압도적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뒤를 이어 서고트족과 연합조약을 맺었지만, 이는 사실상 제국 내 독립적인 야만족 세력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으면서 제국은 동서로 영구 분할되었다.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를, 호노리우스가 서로마를 각각 통치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둘 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실질적 권력이 각각의 섭정들에게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서로마에서는 반달족 출신의 스틸리코가, 동로마에서는 루피누스가 실권을 장악했다. 이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 야만족들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알라리코의 로마 약탈과 충격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코는 로마 제국 내에서 자신의 민족을 위한 확실한 정착지와 지위를 확보하려 했다. 그는 처음에는 동로마와 서로마 사이를 오가며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쪽과 협력했지만, 양쪽 모두 약속을 지키지 않자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401년부터 그는 이탈리아 북부를 침입하기 시작했고, 스틸리코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압박을 가했다.

408년 스틸리코가 반역 혐의로 처형당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스틸리코는 비록 야만족 출신이었지만 로마 제국을 충실하게 섬겼고, 여러 차례 알라리코를 물리치며 이탈리아를 지켜냈다. 하지만 호노리우스와 그의 측근들은 스틸리코의 권력 증대를 견제하려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방패를 잃고 말았다. 스틸리코 제거 후 로마군 내의 야만족 용병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군사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410년 8월 24일, 마침내 알라리코가 로마 시를 점령했다. 이는 410년 전 갈리아의 브렌누스 이후 처음으로 외적이 로마를 함락시킨 사건이었다. 3일간 계속된 약탈에서 서고트족들은 막대한 금은보화와 예술품들을 가져갔지만, 알라리코가 기독교도였던 덕분에 교회는 비교적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영원한 도시' 로마의 함락은 제국 전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사건을 계기로 『신국론』을 저술한 것처럼, 당시 사람들은 로마의 몰락이 기독교 때문인지, 아니면 전통 신들을 버린 벌인지를 놓고 격렬하게 논쟁했다. 하지만 정작 알라리코는 로마를 약탈한 직후 남부 이탈리아로 이동하던 중 갑작스럽게 병사했고, 서고트족들은 그의 동생 아타울푸스의 지휘 하에 갈리아로 이동하여 훗날 서고트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반달족의 북아프리카 정복과 경제적 타격

서고트족이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로 이동한 후, 이번에는 반달족이 서로마 제국의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반달족은 원래 폴란드 지역에 살았는데, 훈족의 압박을 받아 406년 얼어붙은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침입했다. 이들은 갈리아를 가로질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까지 이동했고, 거기서 20년간 정착했다가 429년 가이세리크의 지휘 하에 북아프리카로 건너갔다.

북아프리카는 서로마 제국의 경제적 생명선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집트가 동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상황에서, 북아프리카의 곡물은 로마 시민들의 주식이었고, 이 지역의 올리브유와 와인은 제국 전역으로 수출되는 중요한 상품이었다. 또한 사하라 무역을 통해 들어오는 금과 상아, 노예들도 북아프리카를 거쳐 로마로 유입되었다.

439년 반달족이 카르타고를 점령하면서 상황은 절망적이 되었다. 카르타고는 한때 로마와 지중해 패권을 두고 경쟁했던 위대한 도시였는데, 이제 야만족의 근거지가 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반달족이 뛰어난 해상 세력으로 변모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카르타고의 조선 시설과 해양 기술을 흡수하여 강력한 함대를 건설했고, 지중해 전역에서 해적 활동을 벌였다.

455년 반달족은 바다를 건너 로마를 직접 공격했다.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은 2주간 로마를 철저히 약탈했는데, 이는 알라리코의 약탈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완전한 것이었다. 이들은 황궁의 보물들과 성전의 장식품들, 심지어 카피톨리노 언덕의 신전 지붕 금판까지 모두 떼어갔다. 또한 황후와 공주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굴욕까지 안겨주었다.

아틸라의 위협과 카탈라우눔 평원 전투

한편 동유럽에서는 훈족이 아틸라의 지휘 하에 공전의 강성함을 보이고 있었다. 아틸라는 440년대부터 동로마 제국을 지속적으로 침입하여 막대한 조공을 뜯어냈고, 450년경부터는 서방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호노리우스의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의 딸인 호노리아로부터 구혼 편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요구했다.

451년 아틸라는 50만 명으로 추정되는 대군을 이끌고 갈리아로 침입했다. 이 연합군에는 훈족뿐만 아니라 게피드족, 루기족, 스키리족 등 다양한 게르만 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틸라는 '신의 채찍'이라고 불리며 가는 곳마다 도시들을 파괴했는데, 특히 메츠와 랭스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파리도 포위되었지만 성 즈느비에브의 기적적인 설득으로 겨우 화를 면했다고 전해진다.

서로마의 마지막 명장 아에티우스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기적적인 대연합을 성사시켰다. 서고트족, 프랑크족, 부르군드족, 알란족 등 기존에는 로마의 적이었던 야만족들까지 설득하여 훈족에 맞서는 대연맹을 구성한 것이다. 451년 6월 샬롱 근처의 카탈라우눔 평원에서 벌어진 대결은 고대 유럽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사실상 무승부로 끝났지만, 아틸라가 더 이상 갈리아 침공을 포기하고 후퇴했다는 점에서 연합군의 전략적 승리로 평가된다. 서고트 왕 테오도리크 1세가 전사하는 등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훈족의 서진이 저지되면서 서유럽은 일단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틸라는 이듬해 이탈리아를 직접 침공했고, 로마가 함락 위기에 처하자 레오 1세 교황이 직접 아틸라를 만나 협상을 벌여 겨우 철수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 황제들의 무력함과 야만족 용병 의존

5세기 중반 이후 서로마 황제들은 사실상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실권은 마기스테르 밀리툼(최고군사령관) 직책을 가진 야만족 장군들에게 넘어갔다. 스틸리코 이후 리키메르, 군도바드, 오레스테스 등이 차례로 이 자리를 차지하며 황제를 마음대로 옹립하고 폐위시켰다. 황제들은 평균 재위 기간이 4-5년에 불과했고,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로마군의 완전한 와해였다. 전통적인 로마 시민군은 이미 3세기부터 야만족 용병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는데, 5세기에는 아예 로마인 병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이른바 포이데라티(연합군)라고 불리는 야만족 부족들이 로마군의 주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로마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자신들의 부족 이익을 우선시했다.

경제적으로도 제국은 파탄 상태였다. 북아프리카를 상실하면서 세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의 상당 부분도 야만족 왕국들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이탈리아조차 안전하지 않아 상업 활동이 위축되었고, 도시들이 쇠퇴하면서 세금을 낼 수 있는 인구 자체가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야만족 용병들에게 지급할 급료와 보급품을 조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육과 문화 수준도 급격히 떨어졌다. 학교들이 문을 닫고 도서관들이 방치되면서, 라틴 문학과 법학 전통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일부 수도원과 교회에서 고전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전반적인 지적 수준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락했다.

오도아케르의 폐제와 서로마 제국의 종료

476년 9월 4일, 스키리족 출신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라벤나에서 마지막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흥미롭게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로마의 창건자와 초대 황제의 이름을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10세가 채 안 된 어린아이였다. 그의 아버지 오레스테스가 실권을 쥐고 있었지만, 야만족 용병들의 급료와 토지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오도아케르는 황제를 폐위시킨 후 제위를 차지하는 대신, 동로마 황제 제노에게 서방 제국의 황제 휘장을 보내며 자신은 이탈리아의 왕으로 만족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는 매우 영리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명목상으로는 로마 제국의 통일을 인정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이탈리아의 독립적 지배자가 된 것이다. 제노 황제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오도아케르의 통치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그는 로마의 법과 행정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고, 원로원과 지방 관료들의 기득권도 존중했다. 또한 가톨릭 교회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종교적 갈등을 피했다. 하지만 493년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에게 패배하여 살해당하면서 그의 왕국은 막을 내렸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폐위는 상징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종료를 의미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서로마 제국은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476년의 사건은 그저 이런 현실을 공식화한 것에 불과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 제국의 몰락은 긴 과정이었고,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통합된 문명권이 해체되고, 대신 여러 개의 야만족 왕국들이 등장하면서 유럽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로마의 유산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법, 언어, 종교, 행정 제도 등에서 로마의 영향은 계속 이어졌고, 동로마 제국은 또 다른 1000년의 역사를 써나가게 된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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