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27.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테트라르키아 도입과 제국 재편

SSSCH 2025. 5. 27.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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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년 일리리아 출신의 군인 디오클레스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라는 이름을 채택했을 때, 로마 제국은 여전히 3세기 위기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평범해 보이는 군인 황제는 곧 로마 제국사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포괄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그의 21년 재위 기간 동안 이루어진 변화는 단순한 정치적 수습을 넘어서 제국 전체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이후 1000년 이상 지속될 비잔틴 제국의 토대를 마련했다.

4황제 체제의 창안과 권력 분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거대한 제국을 혼자서 통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현실이었다. 라인강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브리타니아에서 이집트까지 뻗어있는 방대한 영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위기들에 한 명의 황제가 모두 대응하기는 어려웠다. 286년 그는 막시미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면서 동서 분할 통치를 시작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방을, 막시미아누스는 서방을 담당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두 황제 체제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93년 더욱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한다. 바로 테트라르키아, 즉 4황제 체제다. 기존의 두 아우구스투스 밑에 각각 한 명씩의 카이사르를 임명하여 총 4명이 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시스템이었다. 동방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가, 서방에서는 막시미아누스와 콘스탄티우스가 각각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 역할을 맡았다.

이 제도의 핵심은 권력 승계의 안정화에 있었다. 20년 후 두 아우구스투스가 동시에 퇴위하면 카이사르들이 새로운 아우구스투스가 되고, 다시 새로운 카이사르들을 임명하는 순환 구조였다. 혈연이 아닌 능력과 충성도에 따른 승계 시스템으로, 3세기 내내 로마를 괴롭혔던 황제 난립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실제로 각 통치자는 자신의 담당 지역에 상주하면서 신속한 의사결정과 군사 작전이 가능해졌다.

도미나트 체제와 황제 신격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정치 제도뿐만 아니라 황제권의 성격 자체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300년간 유지되어온 프린키파트 체제, 즉 '제1시민'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완전히 포기하고 노골적인 전제군주제인 도미나트 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황제는 더 이상 시민들의 대표가 아니라 신에 의해 선택받은 절대적 지배자가 되었다.

이런 변화는 궁정 의례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황제를 알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무릎을 꿇고 황제의 옷자락에 입을 맞춰야 했다. 페르시아나 이집트에서 볼 수 있는 동방식 전제군주제의 의례를 그대로 도입한 것이다. 황제는 금실로 수놓은 자주색 옷을 입고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썼으며, 황제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조차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을 주피터의 아들이라 칭하며 '요비우스'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막시미아누스는 헤라클레스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헤르쿨리우스'라 불렸다. 이는 황제권을 신적 권위로 포장하여 도전할 수 없는 절대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원로원은 사실상 명예직으로 전락했고, 모든 실권은 황제 개인과 그의 측근들에게 집중되었다.

행정 구획의 대대적 개편

테트라르키아 체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존의 속주 제도를 완전히 개편했다. 기존의 대규모 속주들을 더 작은 단위로 분할하여 총독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중간 단위인 디오케세스를 도입했다. 전체 제국이 4개의 프라이펙투라 프라이토리오로 나뉘고, 그 아래에 12개의 디오케세스, 다시 그 아래에 약 100개의 속주가 배치되는 3단계 행정 체계가 완성되었다.

이탈리아의 경우 이제 특별한 지위를 잃고 일반적인 속주와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로마가 여전히 상징적 수도 역할을 했지만, 실질적인 정치적 중심은 각 테트라르크들의 거주지로 분산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를, 막시미아누스는 밀라노를, 갈레리우스는 시르미움을, 콘스탄티우스는 트리어를 각각 수도로 삼았다. 로마 중심의 지중해 제국에서 다극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군사와 민정의 분리도 더욱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속주 총독들은 민정에만 집중하고, 군사 지휘권은 별도의 둑스나 코메스에게 맡겨졌다. 이는 지방 총독들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중앙 관료제가 대폭 확대되어 각종 전문 부서들이 신설되었고, 관리들의 위계와 급여 체계도 체계화되었다.

가격 칙령과 경제 통제 정책

3세기 위기의 핵심 중 하나였던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1년 역사상 최초의 포괄적인 가격 통제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곡물부터 사치품까지, 일용품부터 서비스업까지 제국 전역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상품과 용역의 최고 가격을 법으로 정한 것이었다. 위반 시에는 사형까지 가능한 극형으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했다.

칙령에는 1000개가 넘는 품목의 가격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밀 1모디우스는 100데나리, 포도주 1섹스타리우스는 30데나리, 소고기 1리브라는 12데나리로 정해졌다. 심지어 이발사나 목욕탕 이용료, 변호사 수임료까지도 법정 가격이 있었다. 임금 역시 마찬가지로 농부의 일당은 25데나리, 목수는 50데나리, 벽화가는 150데나리로 정해졌다.

하지만 이런 인위적인 가격 통제는 예상대로 실패했다. 공식 가격으로는 구매할 수 없게 된 상인들이 암시장으로 몰려들었고, 결과적으로 합법적인 상거래가 위축되었다. 특히 제국의 각 지역마다 다른 경제 여건을 무시한 획일적인 가격 책정은 현실과 맞지 않았다. 몇 년 후 이 칙령은 사실상 폐기되었지만, 국가가 경제에 직접 개입하려는 시도 자체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화폐 개혁도 병행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금화의 품질을 개선하고 새로운 은화를 발행하여 화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려 했다. 또한 세금 징수를 현물 위주로 전환하여 화폐 가치 하락의 영향을 최소화하려 했다. 아니노나라고 불리는 현물세 시스템이 확립되어, 농민들은 곡물과 가축을, 수공업자들은 완성품을 세금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기독교 대박해와 종교 정책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의 말기에 벌어진 기독교 대박해는 로마 제국사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잔혹한 종교 탄압 중 하나였다. 303년부터 시작된 이 박해는 단순한 종교적 편견을 넘어서 제국 통합의 정치적 목적이 강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전통적인 로마의 신들에 대한 숭배를 통해 제국의 정신적 통일을 도모하려 했고, 기독교를 이런 통합에 방해가 되는 이질적 요소로 간주했다.

박해는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기독교 성직자들의 체포와 교회 건물 파괴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성경과 전례용품의 압수, 기독교도들의 공직 추방이 이어졌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로마의 전통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강요했고, 거부하는 자들은 고문과 처형으로 다스렸다. 특히 갈레리우스가 담당하던 동방 지역에서 박해가 더욱 혹독했다.

하지만 이런 박해는 오히려 기독교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이끌었고, 은밀한 종교 활동은 더욱 조직화되었다. 또한 제국 전역에 이미 깊숙이 뿌리를 내린 기독교를 완전히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311년 갈레리우스가 관용령을 발표하면서 박해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고, 2년 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는 완전히 합법화되었다.

퇴위와 스플리트 궁전에서의 말년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역사상 유례없는 결정을 내린다. 바로 자발적인 퇴위였다. 그는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동시에 황제직을 내려놓고 각각의 카이사르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를 새로운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했다. 이는 테트라르키아 체제의 순환 원리를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으로,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퇴위 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달마티아의 살로나 근처에 거대한 궁전을 건설하고 은거했다. 현재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에 위치한 이 궁전은 요새와 별장의 기능을 겸비한 독특한 건축물로, 약 3만 평방미터의 넓이에 200여 개의 방을 가진 거대한 복합 건물이었다. 그는 여기서 채소밭을 가꾸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흥미롭게도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막시미아누스는 복위를 종용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내가 기른 양배추를 보면 왜 황제 자리를 포기했는지 이해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퇴위 이후 테트라르키아 체제는 곧 붕괴되었고,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 리키니우스 등이 권력을 두고 다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제국 구조 변화의 역사적 의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로마 제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의 개혁 이후 로마 제국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국가가 되었다. 공화정의 전통과 시민적 가치는 완전히 사라지고, 동방적 전제군주제와 관료적 중앙집권 체제가 자리 잡았다. 이는 후에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경제적으로도 화폐 경제에서 현물 경제로의 회귀가 가속화되었다. 자급자족적인 대농장과 수공업 작업장이 경제의 기본 단위가 되었고, 이는 후에 중세 유럽의 장원제로 발전하는 맹아를 보여준다. 도시의 상업 활동은 위축되고 농촌 중심의 경제 구조가 강화되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박해가 실패로 끝나면서 오히려 기독교의 최종 승리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추구했던 전통 종교를 통한 제국 통합이라는 목표는 역설적으로 기독교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통합으로 대체되었다. 그의 후계자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한 것은 이런 현실을 인정한 결과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3세기 위기를 수습하고 제국의 생명을 200년 더 연장시켰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개혁은 고전적 의미의 로마 제국의 종료를 의미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창조한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막을 내리고, 새로운 형태의 제국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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