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망과 함께 로마 제국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그의 아들 코모두스의 폭정으로 시작된 정치적 혼란은 193년 '다섯 황제의 해'를 거쳐 세베루스 왕조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세베루스 왕조는 아프리카 출신 황제들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제국을 통치한 시대였으며, 특히 카라칼라 칙령을 통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 시기는 동시에 군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격히 증대하면서 '군인 황제' 시대의 서막을 연 전환기이기도 했다.
코모두스의 폭정과 5현제 시대의 종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재위 180-192년)는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황제였다. 그는 철학과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검투사 경기와 사치스러운 오락에만 몰두했다. 코모두스는 자신을 헤르쿨레스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며 직접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 역할을 했는데, 이는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코모두스는 정치적으로도 무능했다. 그는 국정을 측근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오락에만 빠져있었다. 특히 클레안데르라는 해방노예가 실권을 잡고 관직을 매매하는 등 부패가 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과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일어났다.
코모두스의 통치 말기에는 로마 시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특히 192년 로마에 화재와 역병이 동시에 발생했을 때, 코모두스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같은 해 12월 31일, 코모두스는 궁정 내부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네르바에서 시작된 5현제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코모두스의 폭정은 양자 상속 제도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아무리 현명한 황제였다 하더라도, 자신의 친아들이 부적절한 인물임을 알면서도 혈연의 정에 이끌려 후계자로 만든 것은 큰 실수였다. 이는 이후 로마 제국이 다시 불안정한 시대로 접어드는 출발점이 되었다.
193년 '다섯 황제의 해'와 내전의 혼란
코모두스 암살 후 페르티낙스가 황제가 되었지만, 그는 재위 87일 만에 프라이토리안 근위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페르티낙스는 군기를 바로잡고 재정을 정상화하려 했지만, 근위대의 특권을 축소하려다가 반발을 샀다. 이는 군대의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페르티낙스 살해 후 프라이토리안 근위대는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쳤다. 이는 로마 제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 중 하나였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거액을 제시하여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통치는 66일에 불과했다. 이 사건은 황제권의 권위가 얼마나 실추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속주에서는 여러 총독들이 황제를 자칭했다. 브리타니아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시리아의 페스케니우스 니게르, 그리고 판노니아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각각 황제를 선언하며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는 69년 '네 황제의 해' 이후 다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었다.
세베루스는 가장 로마에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유리했다. 그는 신속하게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제거하고 로마를 장악했다. 이어서 동방의 니게르와 서방의 알비누스를 차례로 물리치며 제국을 통일했다.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의 로마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제국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다.
193년의 혼란은 로마 제국 정치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제 황제권의 기반은 원로원의 승인이나 전통적 정당성이 아니라 군대의 지지에 달려 있었다. 이는 이후 3세기 위기 시대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군사적 개혁과 전제정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년)는 아프리카 렙티스 마그나 출신으로, 로마 제국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였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인물이었으며, 무너진 제국의 질서를 군사력으로 재건했다. 세베루스의 통치는 로마 제국이 군주제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세베루스는 즉위 후 가장 먼저 군제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기존의 프라이토리안 근위대를 해체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단병들로 새로운 근위대를 조직했다. 또한 군인들의 급여를 대폭 인상하고 복무 조건을 개선했다. 이는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동시에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세베루스는 군인들에게 "동료들을 풍족하게 해주고, 다른 모든 것은 무시하라"고 조언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의 통치 철학을 잘 보여주는 말로, 군대의 지지만 있으면 다른 모든 계층의 반대는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세베루스는 원로원을 거의 무시했고, 원로원 의원 중 반대파를 대거 숙청했다.
법률 분야에서도 세베루스는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파피니아누스, 울피아누스 같은 뛰어난 법학자들을 등용하여 로마법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법무관(praefectus praetorio)의 권한을 강화하여 황제 직속의 사법 기구를 만들었다. 이는 전통적인 원로원 중심의 사법 체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베루스는 또한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였다. 특히 로마에서는 세베루스 개선문을 건설했고, 그의 고향 렙티스 마그나를 대대적으로 개발했다. 이런 건설 사업은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는 동시에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브리타니아 원정과 국경 확장 정책
세베루스는 208년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브리타니아 원정에 나섰다. 이는 북부 스코틀랜드의 칼레도니아족과 픽트족이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넘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세베루스는 아들들인 카라칼라와 게타를 데리고 대군을 이끌고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다.
브리타니아 원정은 매우 치열했다. 로마군은 스코틀랜드 고지대의 험준한 지형과 게릴라 전술에 고전했고, 혹독한 기후와 보급의 어려움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세베루스의 끈질긴 노력으로 칼레도니아족은 결국 항복했고, 로마는 스코틀랜드 일부 지역을 새로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211년 에보라쿰(현재의 요크)에서 병사했다. 그의 죽음으로 브리타니아 원정은 중단되었고, 새로 정복한 지역도 곧 포기되었다. 이는 로마 제국의 확장이 이미 한계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세베루스의 임종 때 남긴 유언은 유명하다. 그는 아들들에게 "화합하라, 군인들을 풍족하게 하라,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경멸하라"고 말했다. 이는 그의 통치 철학을 요약한 말이었지만, 동시에 로마 제국이 군사 국가로 변해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브리타니아 원정 과정에서 세베루스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보수하고 강화했다. 또한 성벽 주변에 새로운 요새들을 건설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브리타니아는 이후 100년 이상 비교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라칼라와 게타의 형제 갈등
세베루스가 죽자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사이가 나빴고, 공동 통치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카라칼라(재위 211-217년)는 형으로서 주도권을 잡으려 했고, 게타는 이에 맞서 저항했다.
형제 간의 갈등은 궁정을 둘로 나누었다. 각자 자신만의 지지 세력을 형성했고, 로마는 사실상 두 개의 정부가 공존하는 기이한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율적인 국정 운영은 불가능했고, 제국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결국 212년 카라칼라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가 중재하는 화해 회담에서 게타를 암살했다. 이는 형이 동생을 죽인 패륜적 사건이었지만, 카라칼라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게타를 반역자로 몰아세웠다. 또한 게타의 지지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게타의 죽음 후 카라칼라는 동생의 기록을 모두 말소하려 했다. 이는 '다므나티오 메모리아에(기억의 말살)'라고 불리는 로마의 전통적 처벌이었다. 게타의 이름은 모든 공문서와 비문에서 지워졌고, 그의 조각상들도 파괴되었다. 하지만 일부는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형제 갈등은 세베루스 왕조의 근본적 문제를 드러냈다. 세베루스는 두 아들 모두를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써 안정적 승계를 보장하려 했지만, 오히려 권력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로마 제국에서 공동 통치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카라칼라 칙령과 로마 시민권의 대확장
212년 카라칼라는 로마 제국사상 가장 중요한 법령 중 하나인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혁명적 조치였다. 이로써 약 3천만 명이 새로 로마 시민이 되었고, 로마 제국은 명실상부한 시민 국가가 되었다.
카라칼라 칙령의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모든 신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세수 증대가 주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 시민만 납부하는 상속세와 해방세의 납세자가 대폭 늘어나면서 국가 수입이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이 칙령의 역사적 의미는 경제적 동기를 넘어선다. 이는 로마 제국이 단순한 정복 국가에서 진정한 통합 국가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이제 갈리아인이나 시리아인, 이집트인도 모두 동등한 로마 시민이 되었다. 이는 고대 세계에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파격적 조치였다.
카라칼라 칙령은 또한 법률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제 로마법이 제국 전체에 단일하게 적용되게 되었고, 이는 법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크게 높였다.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집대성되는 로마법의 토대가 이때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민권의 대확산은 역설적으로 로마 시민권의 가치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이전에는 로마 시민권이 특별한 특권이었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자유민이 가지게 되면서 그 독점성을 잃었다. 이는 로마 정체성의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카라칼라의 폭정과 암살
카라칼라는 시민권 확대라는 진보적 정책을 펼쳤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잔인하고 의심 많은 성격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숭배하여 자신을 그의 재현이라고 주장했고,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모방한 부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거대한 공중목욕탕인 카라칼라 욕장을 건설하여 자신의 위업을 과시했다.
하지만 카라칼라의 통치는 점차 폭압적이 되어갔다. 그는 사소한 이유로도 사람들을 처형했고, 특히 동생 게타의 지지자들에 대한 숙청은 매우 잔혹했다. 또한 그는 군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급여를 50%나 인상했는데, 이는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217년 카라칼라는 파르티아 원정 중에 암살당했다. 그를 죽인 것은 프라이토리안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였다. 마크리누스는 자신이 카라칼라에 의해 처형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선제공격을 한 것이었다. 이는 프라이토리안 근위대장이 황제를 직접 암살한 첫 번째 사례였다.
카라칼라의 죽음으로 세베루스 왕조의 남성 혈통은 끊어졌다. 하지만 세베루스의 처 율리아 돔나와 그녀의 여동생 율리아 마에사가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들 '시리아 여인들'은 로마 정치에서 여성의 역할을 크게 확대시켰다.
카라칼라 욕장은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이 거대한 건물은 고대 로마 건축의 걸작 중 하나로, 1600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었다. 복잡한 난방 시설과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이 욕장은 로마 시민들의 사교와 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크리누스의 짧은 통치와 몰락
카라칼라를 암살한 마크리누스(재위 217-218년)는 기사 계급 출신으로는 최초로 황제가 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세베루스 가문과 혈연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정당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시리아 군단들은 세베루스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마크리누스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마크리누스는 재정 절약을 위해 군인들의 급여와 특권을 삭감하려 했다. 이는 경제적으로는 필요한 조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치명적 실수였다. 카라칼라가 군인들을 후대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마크리누스의 긴축 정책은 군대의 불만을 샀다.
한편 율리아 마에사는 손자 엘라가발루스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녀는 엘라가발루스가 카라칼라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며 세베루스 가문의 정통성을 내세웠다. 또한 군인들에게 카라칼라 시대로의 복귀를 약속하며 지지를 얻었다.
218년 시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은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마크리누스는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패배했으며, 로마로 도망치던 중 살해당했다. 그의 통치는 14개월에 불과했지만, 이는 군대의 지지 없이는 황제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마크리누스의 몰락은 세베루스 왕조의 복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때부터 실질적 권력은 율리아 마에사와 율리아 소아에미아스 등 시리아 출신 여성들이 장악했다. 이는 로마 제국사에서 매우 독특한 현상이었다.
엘라가발루스의 종교적 혁신과 사회적 충격
엘라가발루스(재위 218-222년)는 겨우 14세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그의 본명은 바실리아누스였지만, 시리아 에메사의 태양신 엘라가발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엘라가바루스라고 불렸다. 그는 로마에 동방 종교를 들여와 전통적인 로마 종교에 도전했다.
엘라가발루스는 자신이 섬기던 태양신을 로마의 최고신으로 만들려 했다. 에메사에서 가져온 검은 운석을 신체(神體)로 하여 로마에 거대한 신전을 건설했다. 또한 모든 로마의 신들이 이 태양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엘라가발루스의 개인적 행동이었다. 그는 시리아식 복장을 하고 다녔고, 화장을 하며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또한 남성과 결혼하는 등 당시 로마 사회의 도덕 관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이런 행동들은 보수적인 로마인들의 분노를 샀다.
엘라가발루스는 또한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종교 의식과 개인적 쾌락에만 몰두했다. 실제 정치는 할머니 율리아 마에사와 어머니 율리아 소아에미아스가 주도했다. 하지만 이들도 엘라가발루스의 기행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결국 율리아 마에사는 다른 손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후계자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알렉산데르는 엘라가발루스와 달리 로마식 교육을 받았고, 보다 전통적인 모습을 보였다. 222년 프라이토리안 근위대가 엘라가발루스를 살해하고 알렉산데르를 황제로 추대했다.
엘라가발루스의 짧은 통치는 로마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과 종교적 관용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로마는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로마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때는 거부 반응을 보였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재위 222-235년)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엘라가발루스와 달리 로마 전통을 존중했고, 원로원과의 협력을 중시했다. 특히 그는 뛰어난 법학자들을 등용하여 울피아누스를 수석 법무관으로 임명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에는 법률 개혁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울피아누스의 지도 하에 로마법이 더욱 체계화되었고, 특히 민법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이 시기의 법률 개혁은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통치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그는 너무 어렸고, 실권은 어머니 율리아 마마에아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의 불만이 점차 커져갔다. 특히 게르마니아와 페르시아에서의 군사적 실패는 황제의 권위를 크게 손상시켰다.
230년대에는 새롭게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가 로마의 동방 영토를 위협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직접 동방으로 출정했지만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서 게르마니아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자 다시 북방으로 이동해야 했다.
235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율리아 마마에아는 게르마니아에서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로써 세베루스 왕조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동시에 이는 '군인 황제'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과 함께 로마 제국은 전례 없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235년부터 284년까지 약 50년간 20명 이상의 황제가 등장했다가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시기를 '3세기 위기' 또는 '군인 황제 시대'라고 부른다.
결론
세베루스 왕조와 초기 군인 황제 시대는 로마 제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은 전통적인 원리정체제에서 군사적 전제정치로 본격적으로 변화했다. 특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확립한 군대 중심의 통치 체제는 이후 로마 제국 정치의 기본 틀이 되었다.
카라칼라 칙령을 통한 시민권의 전면 확대는 로마 제국을 진정한 의미의 통합 국가로 만들었다. 이는 고대 세계에서는 전례 없는 포용적 정책이었으며, 제국 내 다양한 민족들이 하나의 법 체계 아래에서 평등한 시민으로 살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로마 시민권의 독점적 가치를 희석시키기도 했다.
종교적 측면에서 이 시대는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엘라가발루스의 동방 종교 도입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는 로마 제국 내에서 종교적 다원주의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본 사례였다. 이런 시도들은 후에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으로 이어지는 종교적 변화의 전조였다.
군사적으로는 이 시기부터 로마군의 야만족 의존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병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게르만족 등 외부 민족을 대거 군대에 편입시킨 것은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성격 변화를 가져왔다.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3세기 위기는 로마 제국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전면적 혼란이었다.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위기, 사회적 혼란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제국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위기를 통해 로마 제국은 또 다른 변화와 적응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결국 세베루스 왕조 시대는 로마 제국이 고전적 원리정체제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후기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대의 변화들, 특히 군대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와 시민권 확대, 그리고 종교적 다원화는 모두 후기 로마 제국의 특징을 예고하는 중요한 징조들이었다. 비록 이 시대가 혼란과 갈등으로 점철되었지만, 로마 제국의 적응력과 포용력을 보여준 의미 있는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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