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세기 초, 로마는 이탈리아 통일의 마지막 관문에 서 있었다. 삼니움족을 굴복시키고 중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로마 앞에는 이제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들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들과의 대결은 단순한 지역 갈등이 아니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온 헬레니즘 세계 최고의 명장 피루스가 등장하면서, 로마는 처음으로 지중해급 강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 전쟁은 로마가 단순한 이탈리아 지역 강국에서 지중해 세계의 주요 세력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타렌툼과 로마의 충돌
남이탈리아 최대의 그리스 도시 타렌툼은 기원전 8세기에 스파르타인들이 건설한 식민 도시였다. 천연 항구를 끼고 있는 이 도시는 지중해 동서를 잇는 중요한 해상 교역의 거점이었고, 마그나 그라이키아(대그리스) 지역에서 가장 번영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인구 3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였던 타렌툼은 스스로를 남이탈리아의 맹주라고 여겼고, 로마의 남진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갈등의 직접적 발단은 기원전 282년에 일어났다. 로마 함대가 타렌툼 만에 나타난 것이다. 로마는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 투리이의 요청으로 해적 소탕을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타렌툼 사람들은 이를 자신들의 영역에 대한 침입으로 받아들였다. 오랜 협정에 따르면 로마 함대는 라키니움 곶을 넘어 타렌툼 만으로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타렌툼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격렬했다. 타렌툼 함대가 출동해 로마 함선들을 공격했고, 로마 함대 사령관과 수많은 승무원들이 죽었다. 또한 투리이를 점령해 로마군 주둔부대를 축출하고 로마 시민들을 추방했다. 이는 명백한 전쟁 행위였다.
로마는 즉시 사절단을 타렌툼에 보내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타렌툼 시민들의 반응은 로마인들을 경악시켰다. 사절단이 연설하는 중에 취한 시민 하나가 로마 사절의 토가에 오물을 뿌린 것이다. 로마 사절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는 "이 더러워진 토가를 피로 씻어내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사실상 선전포고였다.
타렌툼 사람들은 로마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이들은 로마를 아직도 이탈리아의 시골 도시 정도로 여겼고, 자신들의 그리스 문명이 훨씬 우월하다고 믿었다. 또한 필요하면 그리스 본토에서 용병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타렌툼은 그리스 본토와 활발한 교류를 유지하고 있었고,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피루스의 등장과 배경
타렌툼이 도움을 요청한 상대는 에피루스의 왕 피루스였다. 에피루스는 그리스 북서부의 작은 왕국이었지만, 피루스는 당대 최고의 명장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먼 친척이기도 했고, 실제로 알렉산드로스와 비슷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피루스는 기원전 319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3세에 왕위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을 했고, 성년이 된 후 여러 차례 왕위를 되찾고 또 잃기를 반복했다. 이런 경험은 그를 뛰어난 군사 지도자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운 모험을 추구하는 성격으로도 만들었다.
피루스의 군사적 능력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전설적이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전술을 완벽하게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코끼리 부대라는 새로운 무기를 도입했다. 인도에서 온 전투 코끼리들은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기였고, 적군에게 공포감을 주는 강력한 심리전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피루스는 큰 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히 에피루스의 왕으로 만족하지 않고 서지중해 전체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들도 카르타고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고, 피루스는 이들을 구원한 후 시칠리아를 거점으로 더 큰 제국을 건설하려 했다. 타렌툼의 요청은 이런 그의 야망을 실현할 완벽한 기회였다.
피루스는 또한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이집트 등 헬레니즘 세계의 주요 강국들과 복잡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고, 필요에 따라 이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로마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피루스를 지원할 의향을 보였다.
제1차 이탈리아 원정과 헤라클레아 전투
기원전 280년, 피루스는 2만 5천 명의 정예 부대와 2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이 군대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였다. 마케도니아식 사리사 창을 든 팔랑크스 보병, 테살리아 기병, 그리고 무엇보다 전투 코끼리들은 로마가 한 번도 상대해본 적 없는 적이었다.
피루스의 첫 번째 목표는 로마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들과 기타 이탈리아 민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로마와 삼니움족 간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을 파악하고, 삼니움족과 다른 반로마 세력들을 규합하려 했다.
첫 번째 대규모 전투는 기원전 280년 헤라클레아에서 벌어졌다. 로마군은 집정관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지휘했고, 약 3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는 로마가 그동안 동원한 것 중 가장 큰 규모의 군대였다. 로마는 피루스를 과소평가하지 않고 최대한의 전력을 투입했다.
전투 초기에는 양측이 팽팽하게 맞섰다. 로마의 마니플 전술과 그리스의 팔랑크스 전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로마군은 유연한 전술로 그리스 팔랑크스의 틈을 파고들려 했고, 피루스군은 밀집 대형의 위력으로 로마군을 압박했다. 한동안 승부를 가릴 수 없는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다.
전황을 바꾼 것은 전투 코끼리들이었다. 피루스가 적절한 시점에 코끼리 부대를 투입하자, 처음 코끼리를 본 로마군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로마의 말들도 코끼리 냄새에 놀라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로마군의 대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로마는 패배했다. 로마군은 7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피루스군은 4천 명의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피루스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충격을 받았다. 로마군의 전투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인들과 이런 식으로 한 번만 더 이기면 나는 완전히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피루스의 승리'라는 말이 나왔다. 승리했지만 손실이 너무 커서 실질적으로는 패배나 다름없는 상황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키네아스의 평화 교섭과 로마의 거부
헤라클레아 전투 후 피루스는 즉시 로마와의 평화 교섭을 시도했다. 그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뛰어난 외교관인 키네아스를 로마에 파견했다. 키네아스는 데모스테네스에 버금가는 웅변가로 유명했고, 피루스의 모든 외교적 임무를 담당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키네아스가 제시한 조건은 나름대로 관대한 것이었다. 로마가 타렌툼을 비롯한 남이탈리아 그리스 도시들의 독립을 인정하고, 포로로 잡힌 로마 병사들을 석방하며, 삼니움족 등 반로마 세력들과 화해한다면 피루스도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로마와 피루스 간에 우호 조약을 맺어 향후 협력 관계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로마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헤라클레아 패배의 충격이 컸기 때문에 평화 협상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피루스의 군사력은 분명히 강력했고, 계속 전쟁을 하면 더 큰 손실을 입을 수도 있었다. 또한 남이탈리아 그리스 도시들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한 원로가 일어나 반대 연설을 했다. 바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였다. 그는 12표법 제정 과정에서 독재를 시도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후손으로, 이미 나이가 많고 눈이 멀어 평소에는 원로원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중요한 순간에 그는 부축을 받고 원로원에 나와 장엄한 연설을 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가 적의 요구를 받아들여 평화를 구걸하는 것은 로마의 명예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진정한 평화는 승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패배를 인정하고 맺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굴복"이라고 역설했다. 그의 연설은 원로원을 감동시켰고, 결국 평화 제안은 거부되었다.
키네아스는 로마에서 며칠을 보내며 로마의 정치 체제와 시민들의 성격을 관찰했다. 그가 피루스에게 보고한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로마 원로원은 왕들의 집회 같았고, 로마인들의 수는 히드라의 머리와 같아서 하나를 자르면 둘이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이는 로마의 정치적 깊이와 인적 자원의 무한함을 간파한 탁월한 관찰이었다.
아우스쿨룸 전투와 피루스의 딜레마
평화 교섭이 실패로 끝나자 전쟁이 재개되었다. 기원전 279년, 로마는 더욱 대규모의 군대를 편성해 피루스에 맞섰다. 이번에는 두 집정관이 모두 출정했고, 총 4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했다. 로마는 헤라클레아 전투의 교훈을 바탕으로 코끼리 대응책도 마련했다.
두 번째 대전투는 아우스쿨룸에서 벌어졌다. 이번에는 로마가 더욱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했다. 로마군은 코끼리를 상대하기 위해 특별한 무기들을 준비했다. 불화살, 투척용 창, 그리고 코끼리를 놀라게 할 각종 소음 장치들이었다. 또한 험한 지형을 선택해 코끼리의 효과를 제한하려 했다.
전투는 이틀에 걸쳐 벌어졌고, 양측 모두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첫날은 대체로 교착 상태였고, 둘째 날에 피루스가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번 승리의 대가는 더욱 컸다. 피루스군은 6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특히 베테랑 장교들과 친위대 병사들의 손실이 심각했다.
피루스는 이제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두 번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군대는 갈수록 약해지고 있었다. 반면 로마는 패배할 때마다 더 강한 군대로 돌아왔다. 로마의 동맹 체계가 거의 흔들리지 않고 있었고, 새로운 병력 충원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피루스는 자신이 로마의 진정한 힘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리스 본토의 상황이었다. 피루스가 이탈리아에 머물러 있는 동안 마케도니아와 갈리아족들이 에피루스를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들도 카르타고의 공격에 시달리며 피루스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피루스는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대응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시칠리아 원정과 전략적 분산
아우스쿨룸 전투 후 피루스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시칠리아로 가서 카르타고와 싸우기로 한 것이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들이 카르타고의 침입에 맞서 도움을 요청했고, 피루스는 이를 새로운 기회로 보았다. 시칠리아를 정복하면 더 큰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고,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서지중해 전체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기원전 278년, 피루스는 군대의 일부를 남이탈리아에 남겨두고 나머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건너갔다. 시칠리아에서 피루스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카르타고군을 연달아 격파했고, 시칠리아 대부분을 해방시켰다. 한때는 카르타고의 마지막 거점인 릴리바이움 포위에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시칠리아에서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냈다. 피루스는 시칠리아의 왕이 되려 했고, 이는 그를 도와준 그리스 도시들의 반발을 샀다. 이들은 해방자를 원했지 새로운 독재자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피루스의 통치 방식이 점점 전제적이 되어가면서 시칠리아 내부에서도 저항이 일어났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탈리아 본토의 상황이었다. 피루스가 시칠리아에 있는 동안 로마는 공세를 재개했다. 로마군은 피루스가 남겨둔 부대들을 각개격파하기 시작했고, 타렌툼도 포위 공격을 받게 되었다. 피루스의 이탈리아 내 거점들이 하나씩 무너져가고 있었다.
결국 피루스는 시칠리아에서의 성공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했다. 기원전 276년, 그는 "오 시칠리아여, 나는 너를 로마인들과 카르타고인들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전장으로 남겨두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시칠리아를 떠났다. 이 예언은 후에 포에니 전쟁에서 현실이 되었다.
베네벤툼 전투와 피루스의 최종 패배
이탈리아로 돌아온 피루스는 심각하게 약화된 상황이었다. 시칠리아에서 상당한 병력을 잃었고, 이탈리아에 남겨둔 부대들도 로마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더욱이 그리스 본토에서는 갈리아족의 침입으로 에피루스가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어 빨리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결전은 기원전 275년 베네벤툼에서 벌어졌다. 이번에는 로마가 더욱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치렀다. 로마군은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의 지휘 아래 약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피루스는 2만 명 남짓한 병력으로 맞섰다.
베네벤툼 전투에서 로마는 드디어 피루스를 상대로 명확한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군은 이제 코끼리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법을 터득했고, 그리스 팔랑크스의 약점도 파악했다. 특히 로마군은 피루스의 코끼리들을 역이용하는 데 성공했다. 불화살과 큰 소음으로 코끼리들을 놀라게 해서 오히려 피루스 자신의 군대를 짓밟게 만든 것이다.
패배한 피루스는 더 이상 이탈리아에 머물 수 없었다. 그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에피루스로 돌아갔다. 떠나면서 그는 타렌툼에 주둔군을 남겨두었지만, 이는 로마의 최종 승리를 늦출 뿐이었다. 기원전 272년, 로마는 마침내 타렌툼을 점령했고, 이로써 피루스 전쟁은 완전히 끝났다.
피루스는 에피루스로 돌아간 후에도 모험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케도니아와 스파르타에서 다시 전쟁을 벌였지만, 기원전 272년 아르고스 공성전에서 한 여인이 던진 기와에 맞아 죽었다. 위대한 명장의 허무한 최후였다.
로마의 이탈리아 통일 완성
피루스 전쟁의 승리로 로마는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일했다. 타렌툼을 비롯한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모두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북쪽의 갈리아족만을 제외하면 이탈리아는 완전히 로마의 것이 되었다. 이는 로마 건국 이래 약 250년 만에 달성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로마의 이탈리아 통일은 다른 제국들의 정복과는 성격이 달랐다. 로마는 정복한 도시들을 파괴하지 않고 자신의 동맹 체계에 편입시켰다. 타렌툼 같은 경우에도 심한 처벌을 받았지만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다. 로마는 이 도시의 문화적 가치와 경제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보존했다.
특히 그리스 문화에 대한 로마의 태도는 주목할 만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예술, 철학, 문학의 우수성을 인정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피루스 전쟁을 통해 로마인들은 헬레니즘 문명과 본격적으로 접촉했고, 이는 로마 문화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군사적으로도 로마는 큰 발전을 이뤘다. 피루스라는 당대 최고의 명장과 3차례 맞서 싸우면서 로마군은 한층 정교하고 강력한 군대가 되었다. 특히 다양한 적과 다양한 전술에 대응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런 경험은 후에 카르타고와의 대전쟁에서 결정적 자산이 되었다.
지중해 강국으로의 도약
피루스 전쟁의 승리는 로마가 단순한 이탈리아 지역 강국에서 지중해급 강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로마는 7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거대한 군사력을 보유했고,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의 명성은 지중해 전역에 알려졌다. 헬레니즘 세계 최고의 명장을 물리친 로마는 이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나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와도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피루스 전쟁 후 여러 헬레니즘 국가들이 로마에 사절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다.
경제적으로도 로마는 새로운 차원에 진입했다. 남이탈리아의 비옥한 농토와 발달한 상업 도시들을 흡수한 로마는 지중해 경제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특히 타렌툼 같은 항구 도시들을 통해 로마는 동지중해 무역에도 적극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성장은 다른 강국들, 특히 카르타고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서지중해의 패자였던 카르타고는 로마가 시칠리아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피루스가 시칠리아에서 활동할 때 로마와 카르타고는 일시적으로 협력했지만, 피루스가 물러난 후 양국 간의 갈등은 불가피해 보였다.
로마 사회의 변화와 발전
피루스 전쟁은 로마 사회에도 깊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스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로마인들의 시야가 크게 넓어졌다. 그리스의 철학, 문학, 예술이 로마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는 로마 문화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로마의 귀족들은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리스식 교육을 받으려 했다.
군사적으로도 로마는 한층 성숙해졌다. 피루스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적과 맞서 싸우면서 로마군은 전술적, 전략적 경험을 크게 쌓았다. 특히 다양한 형태의 적에 대응하는 유연성을 기를 수 있었고, 이는 후에 더 큰 전쟁들에서 결정적 자산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외교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동맹을 관리하고 적을 분열시키는 고등 외교술을 터득했다. 또한 헬레니즘 세계와의 본격적인 외교 관계를 통해 로마는 지중해 정치의 중요한 플레이어로 부상했다.
피루스 전쟁의 역사적 교훈
피루스 전쟁이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피루스의 승리'라는 개념이다. 아무리 전술적 승리를 거두어도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만 소모한다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패배라는 뜻이다. 피루스는 개별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 자체에서는 패배했다.
반면 로마는 개별 전투에서 패하더라도 절대 굴복하지 않는 끈질긴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정신력이 로마가 후에 한니발의 침입이나 다른 위기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일시적 패배를 최종적 승리를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또한 이 전쟁은 로마의 동맹 체계가 얼마나 견고한지 보여주었다. 피루스가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동맹들은 대부분 충성을 유지했다. 이는 로마의 통치가 단순한 강압이 아니라 상호 이익에 기반한 것임을 증명했다.
지중해 패권을 향한 발판
피루스 전쟁의 승리로 로마는 마침내 지중해 세계의 주요 강국 반열에 올랐다. 이제 로마는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국이 되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완전한 통일은 로마에게 거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했고, 이는 향후 세계 정복의 기반이 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로마가 단순한 군사 강국이 아니라 문명의 통합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스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로마만의 독특한 특성을 유지했고, 다양한 민족들을 하나의 정치 체계 안에 통합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이런 특성이 로마가 단순한 정복 제국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문명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결론
피루스 전쟁은 로마 역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이탈리아의 지역 강국에서 지중해의 주요 세력으로 도약했다. 헬레니즘 세계 최고의 명장을 물리친 것은 로마의 군사적 우수성을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의 불굴의 의지와 뛰어난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피루스라는 걸출한 적과의 대결을 통해 로마는 한층 성숙한 국가가 되었다. 군사적으로는 더욱 강해졌고, 외교적으로는 더욱 교묘해졌으며, 문화적으로는 더욱 개방적이 되었다. 이 모든 경험이 축적되어 로마는 곧 시작될 카르타고와의 대결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피루스의 승리'라는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단기적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장기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 일시적 패배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것, 그리고 다양성을 통합하여 더 큰 힘을 만들어내는 것 - 이 모든 것이 피루스 전쟁이 후세에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된 로마의 꿈이 이제 지중해 전체를 무대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History > Europ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탈리아 역사 12. 제2차 포에니 전쟁과 한니발의 침공 - 칸나에 참패에서 자마 승리까지 (0) | 2025.05.26 |
---|---|
이탈리아 역사 11. 제1차 포에니 전쟁과 해군 강국으로의 변모 - 코르부스 전술과 지중해 패권 경쟁 (0) | 2025.05.26 |
이탈리아 역사 9. 라틴 동맹과 삼니움 전쟁, 이탈리아 반도 패권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 (1) | 2025.05.26 |
이탈리아 역사 8. 평민-귀족 갈등과 12표법 제정, 로마 법치주의의 기원 (0) | 2025.05.26 |
이탈리아 역사 7. 로마 공화정 수립과 브루투스·콜라티누스의 왕정 타도 혁명 (0) | 2025.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