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40. 명예혁명과 권리장전 - 제임스 2세 축출과 입헌군주제의 확립

SSSCH 2025. 5. 23. 00:05
반응형

1688년 11월 5일,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3세가 15,000명의 군대와 함께 토베이에 상륙했다. 이는 영국 역사상 마지막 성공적인 침공이었지만, 동시에 '무혈혁명'이라 불릴 만큼 평화로운 정권 교체였다. 가톨릭 복귀를 추진하던 제임스 2세를 축출하고 개신교 윌리엄과 메리를 왕위에 앉힌 명예혁명은 영국에 입헌군주제를 확립시켰다. 1689년 권리장전의 제정으로 왕권은 법적 제약을 받게 되었고, 의회 주권의 원칙이 확고해졌다.

제임스 2세의 즉위와 가톨릭 정책

1685년 2월 찰스 2세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 제임스가 제임스 2세로 즉위했다. 51세의 제임스는 1673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줄곧 종교적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1670년대 말 배제법안 파동으로 한때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찰스 2세의 지지로 왕위 계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임스 2세는 즉위 초기에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국교회를 보호하고 의회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685년 6월 몬머스 공작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몬머스는 찰스 2세의 서자로 개신교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몬머스 반란은 세지무어 전투에서 쉽게 진압되었지만, 제임스 2세는 이를 기회로 삼아 상비군을 크게 늘렸다. 또한 악명 높은 제프리스 판사를 서부 지역에 파견해 '피의 순회재판(Bloody Assizes)'을 실시했다. 약 300명이 처형되고 800명이 서인도 제도로 유배되는 잔혹한 보복이 이어졌다.

제임스 2세는 점차 가톨릭 복권 정책을 노골화했다. 가톨릭 신자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 가톨릭 교수들을 임명했다. 1687년과 1688년 두 차례에 걸쳐 '관용 선언(Declaration of Indulgence)'을 발표해 가톨릭과 비국교도들의 예배를 허용했다.

일곱 주교 사건과 정치적 위기

1688년 5월 제임스 2세는 성직자들에게 관용 선언을 교회에서 낭독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산크로프트를 비롯한 일곱 명의 주교가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왕의 명령이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2세는 일곱 주교를 런던탑에 수감하고 반역죄로 기소했다. 하지만 6월 30일 재판에서 주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무죄 선고가 나자 런던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고, 심지어 왕실 군대 막사에서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는 제임스 2세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었다.

일곱 주교 사건은 제임스 2세 정권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그동안 왕을 지지했던 토리당과 국교회마저 등을 돌렸다. 국교회 주교들이 감옥에 갇히는 상황에서 토리당의 전통적 왕권 지지 논리는 설득력을 잃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6월 10일 왕비 메리 오브 모데나가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를 낳은 것이었다. 가톨릭 왕자의 탄생으로 가톨릭 왕조의 세습이 현실화될 위험이 커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아기가 다른 아이와 바뀐 것이라는 '데워진 팬 음모론(Warming Pan Plot)'을 믿었다.

불멸의 일곱인과 윌리엄 초청

일곱 주교 무죄 판결이 나온 바로 그날, 일곱 명의 유력 정치인들이 비밀리에 윌리엄 3세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불멸의 일곱인(Immortal Seven)'이라 불리는데, 댄비 백작, 데번셔 백작, 슈루즈베리 백작, 러셀 백작, 시드니 백작, 컴프턴 주교, 그리고 헨리 시드니였다.

이 서한에서 그들은 윌리엄에게 영국 침공을 요청했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제임스 2세에 반대하고 있으며, 윌리엄이 오면 큰 저항 없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제임스 왕자의 출생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3세는 이미 영국 침공을 검토하고 있었다.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유럽 패권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이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제임스 2세가 루이 14세와 손을 잡고 가톨릭 동맹을 결성한다면 네덜란드의 안전이 위태로워질 것이었다.

윌리엄은 신중하게 준비했다. 우선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으로부터 지지를 확보했다. 놀랍게도 가톨릭 교황 인노켄시오 11세조차 루이 14세를 견제하기 위해 윌리엄을 지지했다. 또한 영국 내 협력자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상륙 작전을 계획했다.

윌리엄의 상륙과 제임스의 도주

1688년 11월 1일 윌리엄의 침공 함대가 네덜란드를 출발했다. 총 463척의 선박에 15,000명의 군대와 5,000명의 선원이 승선했다. 함대 규모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보다 더 컸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국을 파괴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는 것이었다.

11월 5일(구력) 윌리엄 함대는 데본셔 토베이에 상륙했다. 이 날짜는 1605년 화약 음모 사건과 같은 날로, 개신교도들에게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윌리엄은 '영국의 자유와 개신교를 수호하기 위해' 왔다고 선언했다.

제임스 2세는 처음에는 무력 저항을 시도했다. 약 25,000명의 군대를 소집해 윌리엄을 맞으려 했다. 하지만 군대 내에서도 이탈이 시작되었다. 제임스의 사위이자 덴마크 왕자인 조지가 먼저 윌리엄 편으로 넘어갔고, 핵심 장군들도 차례로 배신했다.

11월 23일 제임스의 둘째 딸 앤 공주마저 아버지를 버리고 윌리엄을 지지했다. 앤의 배신은 제임스에게 결정적 타격이었다. 그는 "하나님도 나를 버렸다. 내 딸들마저 나를 버렸다"며 절망했다고 전해진다.

12월 11일 제임스 2세는 아들과 함께 프랑스로 도주했다. 도주 과정에서 그는 왕새(왕권의 상징)를 템스 강에 던져버렸다. 이는 왕권을 포기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윌리엄은 12월 18일 런던에 입성했고, 제임스 2세의 3년 통치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컨벤션 의회와 왕위 계승

제임스 2세가 도주한 후 영국은 일시적인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윌리엄은 즉시 왕위를 선언하지 않고 '컨벤션 의회'를 소집했다. 이 의회는 합법적인 왕의 소집 없이 모인 의회였지만, 비상상황에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다고 여겨졌다.

1689년 1월 컨벤션 의회가 개회되자 왕위 계승 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토리당 일부는 제임스 2세가 여전히 합법적 왕이며 단지 섭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의견은 메리만 여왕으로 즉위시키고 윌리엄은 부왕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윌리엄은 이런 제안들을 거부했다. 그는 단순한 부왕이나 섭정이 아닌 정당한 왕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결국 2월 13일 의회는 윌리엄과 메리를 공동 왕으로 선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다만 실질적 통치권은 윌리엄이 행사하기로 했다.

왕위 계승의 법적 근거는 미묘했다. 의회는 제임스 2세가 '왕권을 포기(abdicated)'했다고 선언했다. 퇴위(abdication)라는 표현으로 폐위(deposition)라는 직접적 표현을 피한 것이다. 이는 왕권신수설과의 타협적 표현이었다.

권리장전의 제정과 내용

1689년 12월 16일 의회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정식 법률로 제정했다. 이는 이미 2월에 윌리엄과 메리가 수락한 '권리선언(Declaration of Rights)'을 법제화한 것이었다. 권리장전은 영국 헌정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권리장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왕은 의회 동의 없이 법을 중지시키거나 면제할 수 없다. 둘째, 평시에 상비군을 유지하려면 의회 승인이 필요하다. 셋째, 의회 선거는 자유로워야 하고, 의회에서의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넷째, 과도한 보석금이나 잔혹한 형벌은 금지된다. 다섯째, 배심원은 공정하게 선정되어야 한다. 여섯째, 의회는 자주 소집되어야 한다. 일곱째, 가톨릭 신자나 가톨릭과 결혼한 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다.

이런 조항들은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에 대한 직접적 반박이었다. 특히 의회 동의 없는 법 중지권 금지는 관용 선언의 불법성을 확인한 것이었다. 상비군 조항은 군사력을 이용한 전제정치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권리장전은 개인의 자유권보다는 의회의 권한과 왕권의 제약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미국 독립선언서나 프랑스 인권선언과는 다른 성격이었다. 영국 권리장전은 왕과 의회 사이의 권력 균형을 규정한 헌법적 문서였다.

입헌군주제의 확립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으로 영국에는 진정한 의미의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다. 왕은 더 이상 절대적 권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법의 제약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법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법 아래 있는 왕'이 된 것이다.

입헌군주제의 핵심은 왕권의 법적 제약이었다. 왕은 의회가 제정한 법을 임의로 중단하거나 면제할 수 없었다. 새로운 법을 만들거나 세금을 부과하려면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군대 운용과 사법부 독립도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의회 주권의 원칙도 확고해졌다. 의회는 더 이상 왕의 자문기구가 아니라 국가의 최고 입법기관이 되었다. 왕위 계승마저 의회가 결정할 수 있다는 선례가 확립되었다. 이는 왕권신수설의 완전한 부정을 의미했다.

하지만 영국의 입헌군주제는 점진적이고 타협적 성격을 가졌다. 왕실은 폐지되지 않았고, 귀족제도도 유지되었다. 혁명적 변화보다는 전통과 혁신의 조화를 추구했다. 이는 영국 정치문화의 특징이 되었다.

관용법과 종교 정책

1689년 의회는 '관용법(Toleration Act)'을 제정해 종교 정책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법은 삼위일체를 믿는 개신교 비국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다. 다만 공직 진출은 여전히 제한되었다.

관용법은 완전한 종교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가톨릭과 유니테리언은 여전히 배제되었고, 비국교도들도 대학 진학과 공직 진출에서 차별받았다. 하지만 종교적 관용의 원칙이 법적으로 확립된 것은 중요한 진전이었다.

국교회는 여전히 특권적 지위를 유지했지만, 종교적 독점은 끝났다. 장로교, 침례교, 퀘이커 등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영국 사회의 종교적 다원성을 공식 인정한 것이었다.

윌리엄 3세 개인은 더욱 관용적이었다. 그는 칼뱅주의 교육을 받았지만 교파적 편견이 적었다. 네덜란드에서의 경험을 통해 종교적 관용이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파 정치의 발전

명예혁명 후 휘그당과 토리당의 당파 정치가 본격화되었다. 휘그당은 혁명을 적극 지지했고, 강력한 반프랑스 정책을 주장했다. 토리당은 혁명을 수용했지만 전통적 질서를 중시했고, 대외 정책에서는 상대적으로 온건했다.

휘그당은 존 로크의 정치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로크의 『통치론』은 명예혁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했다. 사회계약설과 저항권 이론은 휘그당의 핵심 이념이 되었다. 또한 상업과 무역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토리당은 전통적 왕권과 국교회를 지지했지만, 권리장전의 틀 안에서 활동했다. 지주층의 이익을 대변했고, 농업을 중시하는 정책을 선호했다. 하지만 제임스 2세에 대한 충성 문제로 내부 분열을 겪기도 했다.

양당제의 발달은 영국 정치의 특징이 되었다.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 야당의 존재 인정, 정치적 반대의 합법화 등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이는 대륙의 절대왕정 국가들과 구별되는 영국의 독특한 정치 발전이었다.

9년 전쟁과 대외 정책

명예혁명 직후 영국은 루이 14세의 프랑스와 9년 전쟁(1688-1697)에 돌입했다. 루이 14세가 제임스 2세를 지지하고 윌리엄 3세의 정통성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유럽 전체를 휩쓴 대규모 전쟁이었다.

영국은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에 가입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에 맞섰다. 윌리엄 3세는 직접 대륙 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했고, 영국 해군은 제해권 확보에 주력했다.

1690년 보인 강 전투에서 윌리엄은 아일랜드에 상륙한 제임스 2세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로써 제임스 2세의 복위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일랜드는 다시 영국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갔다.

해상에서는 1692년 라 호그 해전에서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이 승리로 영국은 해상 패권을 확고히 했다. 또한 식민지에서도 프랑스와 경쟁했는데, 북미와 서인도 제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경제 발전과 금융 혁명

명예혁명 후 영국 경제는 급속히 발전했다. 정치적 안정과 재산권 보장으로 투자가 활성화되었고, 상업과 무역이 확장되었다. 특히 금융업의 발달이 눈부셨다.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었다. 이는 정부의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한 것이었지만, 근대 중앙은행의 효시가 되었다. 은행권 발행과 정부 채권 인수를 통해 화폐 제도가 안정되었다.

국채 제도도 발달했다.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을 개인이 매입할 수 있게 되어 공공 재정과 민간 자본이 연결되었다. 이는 '금융 혁명'이라 불릴 만한 변화였다. 네덜란드에서 배운 금융 기법들이 영국에 도입되었다.

주식회사와 보험업도 발달했다. 동인도회사의 주식 거래가 활발해졌고, 해상보험과 화재보험이 등장했다.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보험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런 금융 혁신은 상업 활동을 크게 촉진했다.

스코틀랜드 문제와 연합 논의

명예혁명은 스코틀랜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 의회도 제임스 2세(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7세)를 폐위하고 윌리엄과 메리를 왕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권리장전은 잉글랜드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1689년 글렌코 학살 사건은 윌리엄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정부군이 맥도널드 클랜을 기습 공격해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인들의 반영 감정을 자극했다.

1695-1700년 다리엔 계획의 실패는 스코틀랜드 경제에 치명타를 주었다. 스코틀랜드가 중앙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지만 실패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는 잉글랜드와의 연합 논의를 가속화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서로 다른 왕위 계승법을 제정해 갈등이 심화되었다. 스코틀랜드는 1704년 안전법을 통해 독자적인 외교권을 주장했다. 이는 연합왕국의 분열 위기를 초래했다.

아일랜드 정복과 형법

아일랜드에서는 1690년 보인 강 전투 이후 개신교 지배가 확고해졌다. 1691년 리머릭 조약으로 가톨릭 지주들에게 관용이 약속되었지만, 곧 파기되었다. 대신 가혹한 형법(Penal Laws)이 제정되었다.

형법은 가톨릭도들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권리를 박탈했다. 토지 소유, 공직 진출, 교육, 무기 소지 등이 모두 금지되었다. 또한 개신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상속권도 제한되었다. 이는 가톨릭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아일랜드에 대한 식민 지배 체제였다.

결과적으로 아일랜드 토지의 대부분이 개신교 지주들의 손에 넘어갔다. 1703년경 가톨릭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의 14%에 불과했다. 이는 17세기 초 60%에서 급격히 감소한 것이었다. 아일랜드는 완전히 식민지화되었다.

철학적 혁명과 존 로크

명예혁명은 정치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존 로크의 『통치론』(1689)은 혁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한 기념비적 저작이었다. 로크는 정부의 권력이 피치자의 동의에서 나온다는 사회계약설을 주장했다.

로크에 따르면 정부의 목적은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만약 정부가 이 목적을 배반하면 국민은 저항할 권리가 있다. 이는 제임스 2세에 대한 저항을 완벽하게 정당화했다.

『인간 오성론』(1690)에서 로크는 인간의 지식이 경험에서 나온다는 경험론을 주장했다. 선천적 관념을 부정하고 '백지상태(tabula rasa)' 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계몽주의 사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관용에 관한 서한』(1689)에서는 종교적 관용을 옹호했다. 정부는 영혼의 구원에 개입할 수 없으며, 종교는 개인의 양심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들은 18세기 계몽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문화와 사회의 변화

명예혁명 후 영국 사회는 더욱 개방적이고 역동적이 되었다. 정치적 자유의 확대와 함께 언론의 자유도 신장되었다. 1695년 사전 검열제가 폐지되어 출판의 자유가 크게 확대되었다.

커피하우스 문화가 절정에 달했다. 런던에만 3,000개가 넘는 커피하우스가 있었고, 이곳에서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토론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로이드는 보험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조나단은 주식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런 공간들은 근대적 공론장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문과 정치 팸플릿의 발행도 크게 늘어났다. 1702년 영국 최초의 일간지 『데일리 쿠런트』가 창간되었고, 정치적 쟁점들이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여론 정치의 시작을 의미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도 변화가 있었다. 메리 2세가 공동 통치자로 인정받은 것은 여성의 정치적 능력을 보여준 사례였다. 또한 여성 작가들이 늘어나고,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해외 무역과 식민지 확장

명예혁명 후 영국의 해외 무역은 급속히 성장했다. 정치적 안정과 해군력 강화로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동인도회사의 인도 무역이 확대되었고,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교역도 증가했다.

설탕과 담배가 주요 수입품이었다. 서인도 제도의 설탕 플랜테이션은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의 담배도 인기 상품이었다. 이런 플랜테이션 경제는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직결되어 있었다.

삼각무역이 본격화되었다. 영국에서 제조품을 아프리카로 수출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아메리카로 수송하며, 아메리카에서 원료를 영국으로 가져오는 체계였다. 이는 영국 상업 자본주의의 핵심이었다.

북미 식민지도 확장되었다. 1664년 네덜란드로부터 뉴욕을 빼앗은 후 대서양 연안의 식민지들이 연결되었다. 1681년 윌리엄 펜이 펜실베이니아를 건설했고, 1732년에는 조지아가 마지막 식민지로 설립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명예혁명 시기에도 과학 발전은 계속되었다. 뉴턴이 1687년 『프린키피아』를 출간한 이후 영국은 유럽 과학계의 중심이 되었다. 왕립학회는 유럽 각국의 과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에드먼드 핼리는 뉴턴의 이론을 바탕으로 혜성의 궤도를 계산했다. 1705년 그는 76년 주기로 나타나는 혜성의 존재를 예측했는데, 이는 1758년 실제로 확인되어 '핼리 혜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는 뉴턴 역학의 정확성을 증명한 쾌거였다.

의학 분야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1798년 에드워드 제너가 종두법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천연두가 큰 위협이었지만, 점차 의학 지식이 축적되었다. 해부학과 생리학 연구가 발달했고, 의학 교육도 체계화되었다.

기술 발전도 눈에 띄었다. 증기기관의 초기 형태들이 개발되어 광산의 배수에 사용되었다. 철강 기술이 향상되고, 시계 제작 기술도 정밀해졌다. 이런 기술 발전은 후에 산업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사회 구조의 변화

명예혁명 후 영국 사회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인 토지 귀족 외에 상업과 금융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부유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자수성가한 신사(self-made gentlemen)'라고 불렸다.

중간계층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변호사, 의사, 성직자, 교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늘어났고, 이들이 새로운 소비층을 형성했다. 교육에 대한 수요도 증가해서 사립학교와 아카데미가 확산되었다.

도시화도 가속화되었다. 런던의 인구는 1700년경 57만 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브리스틀, 노리치, 요크 등 지방 도시들도 성장했다. 도시에서는 새로운 생활양식과 문화가 형성되었다.

농촌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인클로저(토지 울타리 정책)가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공동체 농업이 해체되었다. 대신 상업적 농업이 발달했고,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소농들은 토지를 잃고 도시로 이주해야 했다.

예술과 문학의 발전

명예혁명 시기는 영국 문학사에서 '고전주의 시대'로 불린다. 존 드라이든이 1700년 사망한 후 알렉산더 포프가 시단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포프의 『머리털 강탈』(1712)과 『우신예찬』(1728)은 풍자 문학의 걸작이었다.

산문 문학도 발달했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719)는 영국 소설의 출발점 중 하나로 여겨진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는 신랄한 사회 비판을 담은 풍자 소설이었다.

연극계에서는 복고 희극의 전통이 이어졌다. 윌리엄 콩그리브, 조지 파커 등이 활약했고, 1728년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는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오페라를 패러디한 발라드 오페라의 효시였다.

회화에서는 고드프리 넬러가 궁정 화가로 활동했다. 그의 초상화들은 당시 귀족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건축에서는 크리스토퍼 렌의 바로크 양식이 계속 영향을 미쳤고, 니콜라스 호크스무어와 존 밴브러 같은 제자들이 활약했다.

종교와 도덕성의 변화

명예혁명 후 종교계에도 변화가 있었다. 관용법으로 비국교도들의 활동이 합법화되면서 종교적 다원성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국교회는 여전히 지배적 지위를 유지했다.

국교회 내부에서는 '고교회파(High Church)'와 '저교회파(Low Church)'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 고교회파는 전통적 의례와 주교제를 중시했고, 저교회파는 단순한 예배와 개인적 신앙을 강조했다. 이는 토리당과 휘그당의 당파 갈등과도 연결되었다.

18세기 초부터는 이신론(Deism)이 지식인들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기적이나 계시를 부정했다. 대신 이성과 자연법칙을 통해 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도덕성 개혁 운동도 일어났다. '도덕성 개혁을 위한 협회(Society for the Reformation of Manners)'가 설립되어 공공 도덕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술 소비 줄이기, 신성모독 금지, 안식일 준수 등이 주요 목표였다.

결론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으로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다. 절대왕정의 위험을 피하고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것은 영국 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성취였다. 왕권과 의회권의 균형, 법치주의의 확립, 개인 권리의 보장 등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명예혁명은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재산권 보장과 정치적 안정으로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했다. 금융 혁명, 해외 무역 확장, 식민지 개발 등으로 영국은 유럽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이는 후에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토대였다.

사회 문화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종교적 관용의 확산, 언론의 자유, 과학적 사고의 발달, 시민사회의 성장 등은 영국을 근대적 사회로 변화시켰다. 커피하우스에서의 공론장 형성, 정당 정치의 발달, 여론의 중요성 증대 등은 민주주의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명예혁명의 한계도 분명했다. 사회적 평등은 실현되지 않았고, 재산 소유자 중심의 제한적 민주주의에 머물렀다. 여성, 노동자, 식민지 주민들은 여전히 정치적 권리에서 배제되었다. 또한 아일랜드에 대한 억압적 지배와 노예무역의 확대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럼에도 명예혁명은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다. 평화적 정권 교체, 입헌주의 확립, 권력 분립의 실현 등은 후에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에 영감을 주었다. 존 로크의 정치철학은 계몽주의 사상의 기초가 되었고, 근대 민주주의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명예혁명은 영국만의 사건이 아니라 인류 정치사의 이정표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