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41. 하노버 왕조의 시작과 조지 1세 - 독일계 왕실의 영국 통치와 내각책임제의 발전

SSSCH 2025. 5. 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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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 앤 여왕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영국 왕실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1701년 왕위계승법에 따라 독일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드비히가 조지 1세로 즉위하면서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었고, 이는 영국 정치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다.

왕위계승법과 하노버 가문의 등장

앤 여왕이 17명의 자녀를 낳았음에도 모두 요절하자 영국 의회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가장 가까운 혈족은 가톨릭 신앙을 가진 제임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구왕 제임스 2세의 아들)였지만, 의회는 절대로 가톨릭 군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688년 명예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개신교 신앙을 지키려는 의지가 확고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회가 주목한 인물이 바로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드비히였다. 그는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의 후손으로 왕위계승 서열 50위 정도에 불과했지만, 개신교도 중에서는 가장 가까운 혈족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로서 유럽 대륙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노버는 독일 북부의 비교적 작은 영토였지만,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황제 선출권을 가진 중요한 제후국이었다. 게오르크 루드비히는 이미 50대 중반의 노련한 정치가로, 유럽 각국과의 복잡한 외교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루이 14세의 팽창주의에 맞서 반프랑스 동맹을 구축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그의 정치적 성향은 영국 의회의 마음에 들었다.

조지 1세의 즉위와 초기 통치의 어려움

1714년 8월 1일 조지 1세로 즉위한 게오르크 루드비히는 처음부터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언어 장벽이었다. 그는 영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고, 주로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이는 영국 귀족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크게 제약했다.

더욱이 조지 1세는 영국의 정치 관습과 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영국은 여러 영토 중 하나일 뿐이었고, 하노버 본토에 대한 애착이 훨씬 강했다. 실제로 그는 재위 기간 동안 하노버에서 보낸 시간이 영국에서 보낸 시간보다 길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1715년 자코바이트 반란이 일어난다. 구왕 제임스 2세의 아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비록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조지 1세에게는 자신의 왕위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영국 국민들 상당수가 아직 독일계 왕실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종교적 갈등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조지 1세는 루터교도였는데, 이는 영국 국교회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비록 둘 다 개신교 계열이지만, 교리와 의식에서 차이점이 존재했다. 영국 내 강경한 국교도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왕의 종교적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동군연합의 복잡성과 외교 정책

조지 1세의 즉위로 영국과 하노버는 동군연합 관계가 되었지만, 이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한다. 두 지역의 이해관계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외교 정책에서 이런 갈등이 두드러졌다.

하노버는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서 독일 내 정치에 깊이 관여해야 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 프로이센과의 경쟁, 그리고 프랑스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 하노버의 핵심 과제였다. 반면 영국은 해양 제국으로서 식민지 확장과 해상 무역로 확보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이런 차이는 구체적인 정책 결정에서 갈등을 빚었다. 예를 들어 1718년 사중동맹(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결성 과정에서 조지 1세는 하노버의 이익을 우선시하려 했고, 이에 대해 영국 의회와 내각에서 상당한 반발이 일어났다. 영국 정치인들은 자국의 이익이 독일의 한 소공국 때문에 희생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여파도 복잡한 외교적 과제를 남겼다. 1713년 위트레히트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유럽의 세력 균형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조지 1세는 프랑스의 재기를 견제하면서도 스페인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했고, 동시에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는 러시아와 프로이센에도 대응해야 했다.

의회 정치의 성숙과 당파성의 심화

조지 1세 시대에는 휘그당과 토리당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다. 왕위계승 과정에서 휘그당이 하노버 가문을 적극 지지했던 반면, 토리당 일부는 자코바이트와 연계되어 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때문에 조지 1세는 집권 초기 휘그당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로버트 월폴, 찰스 타운센드, 스탠호프 경 등 휘그당의 주요 인물들이 내각의 핵심을 구성했다. 이들은 조지 1세의 언어적 한계와 영국 정치에 대한 이해 부족을 오히려 기회로 활용했다. 왕이 세부적인 정책 결정에 개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내각의 자율성과 권한이 자연스럽게 확대된 것이다.

의회에서의 정당 정치도 더욱 체계화되었다. 휘그당은 상업 자본가, 비국교도, 도시 중간계층의 지지를 받으며 자유무역과 종교 관용을 표방했다. 반면 토리당은 지주 계급, 국교도, 농촌 지역의 지지를 기반으로 전통적 가치와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파 간 갈등이 너무 심해지면서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특히 1715년 자코바이트 반란 진압 과정에서 토리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고, 이는 정치적 보복의 성격이 강했다. 많은 토리당 정치인들이 공직에서 배제되거나 반역 혐의로 기소되었다.

내각책임제의 발전과 총리직의 등장

조지 1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내각책임제의 발전이었다. 왕이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영국 정치에 익숙하지 않다는 현실적 제약이 오히려 새로운 정치 시스템의 발전을 촉진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영국 왕은 추밀원 회의를 주재하며 직접 정책을 결정했다. 하지만 조지 1세는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 때문에 이런 방식의 통치가 어려웠다. 대신 소수의 핵심 각료들로 구성된 내각이 실질적인 정책 결정 기구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내각 내 서열과 역할 분담이 중요해졌다.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이 점차 내각의 실질적 책임자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총리직(Prime Minister)의 기원이 되었다. 비록 아직 공식적인 총리직은 없었지만, 로버트 월폴이 사실상 최초의 총리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내각 회의도 점차 독립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왕이 참석하지 않는 내각 회의가 정례화되었고, 내각 구성원들끼리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 이는 영국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였다. 왕권에서 의회와 내각으로 실질적 권력이 이양되는 과정이 가속화된 것이다.

또한 내각의 집단책임제 원칙도 이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내각 구성원들은 개별적으로 왕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각 전체가 의회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는 시스템이 점차 확립되었다. 이는 현대 의원내각제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이다.

경제 정책과 금융 시스템의 발전

조지 1세 시대에는 영국의 금융 시스템이 크게 발전한다. 1694년 설립된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고, 국채 발행을 통한 정부 재정 조달 시스템이 안정화되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으로 누적된 막대한 전쟁 부채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영국 정부는 다양한 금융 혁신을 통해 이 문제에 대응했다. 장기 국채 발행, 복권 결합 채권, 그리고 연금 시스템 도입 등이 그 예이다.

1720년에는 유명한 '남해 거품(South Sea Bubble)' 사건이 발생한다. 남해회사가 정부 부채를 인수하는 대가로 독점 무역권을 얻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대한 과도한 투기가 일어났다. 주가가 폭등했다가 급락하면서 수많은 투자자들이 파산했고, 정치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위기는 역설적으로 영국 금융 시스템의 성숙에 기여했다. 로버트 월폴의 적절한 위기 관리와 금융 규제 강화로 시장이 안정되었고, 영란은행의 중앙은행 역할이 더욱 확고해졌다. 또한 주식회사법 정비와 투기 억제 정책을 통해 건전한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무역 정책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중상주의적 보호무역 정책이 여전히 주류였지만, 점차 자유무역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특히 식민지와의 무역에서 영국의 제조업 우위를 바탕으로 한 상호 보완적 관계가 강화되었다.

사회 변화와 문화적 발전

조지 1세 시대에는 영국 사회의 계층 구조에도 미묘한 변화가 나타난다. 전통적인 토지 귀족 외에 상업과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지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들은 교육받은 중간계층으로서 정치적 발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런던은 이미 유럽 최대의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고,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 역할을 확고히 했다. 코피하우스(coffeehouse) 문화가 절정을 이루면서 지식인들의 토론 공간이 확산되었다.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해상보험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는 훗날 로이드 보험 시장의 기원이 되었다.

언론의 자유도 점차 확대되었다. 1695년 출판허가법이 폐지된 이후 신문과 팸플릿이 급속히 늘어났다. 정치적 논쟁이 활발해지면서 여론 형성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발표된 것도 이 시기(1719년)였다.

종교 관용 정책도 서서히 확대되었다. 1689년 관용법 이후 비국교도들의 권리가 점차 인정받았고, 조지 1세 자신이 루터교도라는 점도 종교적 다원주의 확산에 기여했다. 하지만 가톨릭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심각했고, 이는 아일랜드 문제와 맞물려 지속적인 갈등 요소로 남았다.

교육 분야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여전히 국교도만 입학할 수 있었지만,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교와 글래스고 대학교는 더 개방적인 정책을 취했다. 또한 실용적 지식과 과학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왕립학회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문제

조지 1세는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이기도 했다. 1707년 연합법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공식적으로 통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갈등 요소가 남아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독일계 왕실에 대한 반감이 특히 강했다. 스튜어트 왕조에 대한 향수와 함께 장로교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가 자코바이트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1715년 반란은 주로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에서 일어났고, 클랜(clan) 제도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사회 구조가 저항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경제적으로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었다. 1695-1700년의 대기근과 다리엔 식민지 사업 실패로 스코틀랜드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연합 이후에도 경제적 격차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이는 정치적 불만으로 이어졌다.

아일랜드 문제는 더욱 복잡했다. 가톨릭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아일랜드에서 개신교 소수가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독점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형벌법(Penal Laws)으로 가톨릭의 권리가 심각하게 제약받았고, 토지 소유권에서도 차별이 심했다.

더욱이 아일랜드 의회는 영국 의회에 종속된 상태였고, 아일랜드의 무역도 영국의 이익에 종속되었다. 모직물 수출 금지법 등으로 아일랜드의 경제 발전이 인위적으로 억제되었다. 이런 구조적 모순은 훗날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유럽 외교와 세력 균형

조지 1세의 외교 정책은 유럽 대륙에서의 세력 균형 유지에 중점을 두었다. 하노버 선제후로서의 지위와 영국 왕으로서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것이 핵심 과제였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1715년 사망하면서 유럽의 정치 지형이 크게 변했다. 루이 15세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고, 필리프 오를레앙 공작이 섭정을 맡았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공세적 팽창주의는 일시적으로 주춤했고, 조지 1세는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북방 대전(1700-1721)도 중요한 외교적 변수였다. 스웨덴의 칼 12세와 러시아의 피터 대제 간의 패권 경쟁이 발트해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영국은 발트해 무역로 확보를 위해 이 전쟁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조지 1세는 하노버의 영토 확장 기회도 노렸다.

1718년 사중동맹 결성은 조지 1세 외교의 대표적 성과였다.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가 연합하여 스페인의 이탈리아 개입을 저지하고 유럽의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하노버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지중해 정책에서도 영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섬을 확보함으로써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했고, 이는 레반트 무역과 인도 항로 확보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조지 1세는 이런 해양 제국적 이익과 대륙의 하노버 이익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결론

조지 1세의 즉위는 영국 정치사에서 분수령 역할을 한다. 독일계 왕실의 등장이라는 우연한 사건이 영국 정치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라는 현실적 제약이 오히려 의회 정치와 내각책임제 발전의 촉진제가 되었다.

하노버 왕조 초기의 정치적 실험들은 18세기 영국이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하는 토대가 되었다. 안정적인 정치 시스템과 발달된 금융 제도, 그리고 효율적인 행정 체계가 결합되면서 영국만의 독특한 발전 모델이 형성되었다. 이는 훗날 산업혁명과 대영제국 건설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변화였다.

비록 조지 1세 개인은 영국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의회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의 발전은 유럽 다른 국가들이 따라올 수 없는 영국만의 독특한 장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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