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38. 공화정과 호국경 체제 - 찰스 1세 처형과 크롬웰의 독재 실험

SSSCH 2025. 5. 23. 00:03
반응형

1649년 1월 30일 런던 화이트홀 궁전 앞에서 찰스 1세의 목이 떨어졌다. 유럽 역사상 최초로 합법적 재판을 통해 국왕이 처형된 충격적 사건이었다. 이로써 영국은 천 년 넘게 이어온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하지만 왕 없는 국가 운영은 생각보다 복잡했고, 결국 올리버 크롬웰의 개인 독재인 호국경 체제로 귀결되었다. 11년간 지속된 이 정치 실험은 영국사에 독특한 장을 남겼다.

찰스 1세의 재판과 처형

1648년 12월 프라이드 숙청으로 온건파 의원들을 축출한 잔여 의회는 즉시 찰스 1세를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135명의 판사로 구성된 특별법정이 구성되었지만, 실제로 재판에 참여한 것은 68명에 불과했다. 많은 판사들이 왕을 재판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재판은 1649년 1월 20일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시작되었다. 찰스 1세는 법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며 변론을 거부했다. 그는 "국왕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존재로 신민의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존 브래드쇼 대법관은 "잉글랜드에서는 왕이라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며 재판을 강행했다.

기소 내용은 명확했다. 찰스 1세는 "폭군이며 살인자, 국가의 적"으로 규정되었다. 백성에 대한 전쟁을 일으키고, 외국 세력과 내통하며, 국가의 평화와 안전을 해쳤다는 것이 주요 혐의였다. 특히 2차 내전을 일으켜 불필요한 유혈사태를 야기한 점이 결정적 증거로 제시되었다.

1월 27일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59명의 판사가 사형 판결서에 서명했고, 올리버 크롬웰이 세 번째로 서명했다. 찰스 1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1월 30일 오후 2시 공개 처형되었다. 처형 순간 군중들 사이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전해진다.

공화정 선포와 초기 혼란

찰스 1세 처형 직후 의회는 왕정과 상원을 폐지하고 영국을 '커먼웰스(Commonwealth)'라 부르는 공화정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공화정의 구체적 형태에 대해서는 명확한 합의가 없었다. 잔여 의회가 최고 권력기관 역할을 했지만, 그 정통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외교적 고립이었다. 유럽의 모든 왕실이 찰스 1세의 처형을 규탄했고,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찰스 1세의 아들을 찰스 2세로 인정한다고 선언했고, 스페인과 네덜란드도 영국 공화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도 분열이 심했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를 왕으로 선포했고, 아일랜드는 가톨릭과 왕당파가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잉글랜드 내에서도 왕당파의 지하 활동이 계속되었고, 공화정 지지 세력 내부에서도 권력 분배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컸다. 내전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복구해야 했고,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왕당파 재산 몰수로 어느 정도 재원을 확보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크롬웰의 아일랜드 원정

공화정 최초의 대외 정책은 아일랜드 원정이었다. 1649년 8월 크롬웰이 2만 명의 뉴모델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아일랜드는 1641년 이래 가톨릭 연맹이 지배하고 있었고, 왕당파와 연합해 공화정에 맞서고 있었다.

크롬웰의 아일랜드 원정은 극도로 잔혹했다. 드로게다와 웩스퍼드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고, 이는 아일랜드인들에게 영원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크롬웰은 이를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라고 정당화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목적이 더 컸다.

아일랜드 정복은 단순한 군사 작전을 넘어 대규모 식민 정책이었다. 가톨릭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영국 군인들과 청교도 정착민들에게 분배했다. 아일랜드 가톨릭 인구의 상당수가 서부 산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이는 "지옥이나 코노트로(To Hell or to Connaught)"라는 말로 상징된다.

1650년 5월 크롬웰이 아일랜드에서 돌아올 때까지 저항은 거의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일랜드 인구의 15-20%가 사망하거나 추방되었고, 가톨릭 지주층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이 정책은 아일랜드 문제의 뿌리가 되어 수백 년간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정복과 연합

아일랜드를 평정한 후 다음 목표는 스코틀랜드였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공화정에 맞서고 있었다. 1650년 7월 크롬웰이 스코틀랜드 침공을 개시했다.

던바 전투(1650년 9월)에서 크롬웰은 스코틀랜드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 승리를 두고 크롬웰은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군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남진했다.

1651년 9월 3일 우스터 전투에서 공화정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찰스 2세는 간신히 프랑스로 망명했고, 스코틀랜드는 완전히 정복되었다. 크롬웰은 이를 "주님의 영광스러운 왕관 씌우는 자비"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정복 후 1654년 '통합령(Ordinance of Union)'이 발표되어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합병되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해산되고, 웨스트민스터 의회에 30명의 대표를 보내는 것으로 정치적 지위가 축소되었다. 이는 명목상 연합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복과 흡수였다.

네덜란드 전쟁과 해상 패권 경쟁

대내적 안정을 확보한 공화정은 대외 정책에서도 적극성을 보였다. 1651년 항해법(Navigation Act)을 제정해 영국 무역을 보호하려 했다. 이 법은 영국으로 수입되는 상품은 반드시 영국 선박이나 생산국 선박으로만 운송하도록 규정했다.

항해법은 중계무역으로 번영하던 네덜란드에게 치명적 타격이었다. 결국 1652년 제1차 영네 전쟁이 발발했다. 이는 공화정 시대 최대 규모의 대외 전쟁이었고, 해상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네덜란드가 우세했다. 미히엘 데 뤼이터와 마르턴 트롬프 같은 명장들이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는 경험과 기술면에서 앞섰다. 하지만 로버트 블레이크가 지휘하는 영국 함대가 점차 반격을 시작했다.

1653년 가바드 샌즈 해전과 셰베닝겐 해전에서 영국이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전쟁이 종료되었다. 165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네덜란드가 항해법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이는 영국이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는 전환점이었다.

의회 해산과 크롬웰의 독재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잔여 의회는 선거를 통한 새로운 의회 구성을 미루고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의원들 사이에는 부패와 파벌 싸움이 만연했고, 국정 운영 능력은 떨어졌다.

1653년 4월 20일 크롬웰은 결국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시켰다. "주님의 이름으로 나가라, 우리는 너희들을 충분히 참았다"는 그의 말은 유명해졌다. 의회 해산은 법적 근거가 없는 쿠데타였지만, 군부와 청교도들의 지지를 받았다.

잔여 의회 해산 후 크롬웰은 '베어본 의회(Barebone's Parliament)'라 불리는 지명 의회를 구성했다. 140명의 의원이 각 지역 청교도 교회의 추천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성인들의 의회"를 지향한 종교적 실험이었다.

하지만 베어본 의회도 실패했다. 급진적 종교 개혁을 추진하려는 세력과 온건파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고, 결국 1653년 12월 스스로 해산을 선언했다. 이로써 의회 정치 실험은 막을 내리고 크롬웰의 개인 독재가 시작되었다.

호국경 체제의 수립

1653년 12월 16일 크롬웰은 '호국경(Lord Protector)'에 취임했다.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이라는 성문 헌법에 따라 새로운 정치 체제가 출범한 것이다. 호국경은 왕은 아니지만 왕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지위였다.

통치장전은 영국 최초의 성문 헌법이었다. 호국경의 권한과 의회의 역할, 선거 제도 등을 상세히 규정했다. 호국경은 행정권과 군사권을 가지고, 의회는 입법권을 담당했다. 또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되 가톨릭과 성공회는 제외한다고 명시했다.

새로운 선거 제도도 도입되었다. 기존의 부패한 선거구를 폐지하고 인구에 비례해 의석을 재분배했다. 선거권도 부동산 200파운드 이상 소유자로 확대되어 중간계층의 정치 참여가 늘어났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제도였다.

하지만 호국경 체제는 본질적으로 군사 독재였다. 크롬웰의 권력 기반은 뉴모델 군대였고, 모든 정책은 군부의 지지를 전제로 했다. 의회가 군부에 반대하는 결정을 내리면 언제든 무력으로 해산될 수 있었다.

크롬웰의 국정 운영

호국경이 된 크롬웰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대외적으로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자메이카를 획득했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던커크를 확보했다. 내정에서는 도덕성 회복과 사회 개혁에 주력했다.

청교도적 도덕 정책이 강화되었다. 술집 영업이 제한되고, 도박과 춤이 금지되었으며, 크리스마스 축제도 금지되었다. 일요일에는 모든 오락 활동이 중단되고 교회 출석이 의무화되었다. 이런 정책은 "즐거운 잉글랜드(Merry England)"의 전통을 억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긍정적 개혁도 많았다. 법원 제도가 개선되고, 감옥 환경이 개선되었으며, 교육이 확산되었다. 또한 종교적 관용 정책으로 다양한 개신교 종파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심지어 1656년에는 에드워드 1세 이래 금지되었던 유대인의 영국 거주도 허용했다.

경제적으로도 성과가 있었다. 왕당파 재산 몰수와 교회 토지 매각으로 토지 소유 구조가 변화했고, 상업과 무역이 발달했다. 런던의 인구가 급증했고, 식민지 무역도 확대되었다.

의회와의 갈등

호국경 체제에서도 의회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654년 선출된 제1차 호국경 의회는 크롬웰의 권한을 제약하려 했다. 특히 군사비 삭감과 종교 정책 수정을 요구했다.

크롬웰은 의원들에게 호국경 체제를 인정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100명이 넘는 의원이 이를 거부하고 의회를 떠났다. 남은 의원들도 계속 반대했고, 결국 1655년 1월 의회가 해산되었다.

1656년 선출된 제2차 호국경 의회에서는 더 큰 갈등이 벌어졌다. 의회는 '겸손한 청원과 권고(Humble Petition and Advice)'를 통해 크롬웰에게 왕위를 받을 것을 제안했다. 이는 호국경 체제의 불안정성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크롬웰은 왕위 제안을 놓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군부에서는 강력한 반대가 있었고, 자신도 왕정 복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결국 1657년 5월 왕위를 거부하고 호국경 지위를 유지하기로 했다. 대신 상원을 부활시키고 크롬웰의 후계자 지명권을 인정하는 수정 헌법이 채택되었다.

메이저 제너럴 체제

1655년부터 1657년까지 크롬웰은 '메이저 제너럴 체제(Rule of Major-Generals)'라는 군정을 실시했다. 잉글랜드를 11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메이저 제너럴을 파견해 지방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

메이저 제너럴들은 강력한 권한을 가졌다. 치안 유지, 세금 징수, 도덕성 감시 등 모든 행정 업무를 관할했다. 왕당파를 감시하고, 청교도적 생활 방식을 강요했으며, 10% 세금(Decimation Tax)을 통해 왕당파에게 가혹한 부담을 지웠다.

이 체제는 효율적이었지만 극도로 불인기였다. 전통적인 지방 자치권이 무시되었고, 군인들이 민정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컸다. 젠트리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는다고 느꼈고, 일반 국민들도 과도한 간섭에 불만을 가졌다.

1657년 메이저 제너럴 체제가 폐지된 것은 이런 반발 때문이었다. 의회에서 10% 세금 폐지안이 통과되면서 체제 유지가 불가능해졌다. 크롬웰도 지방 세력들의 지지 없이는 안정적 통치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교 정책과 사회 변화

호국경 시대의 종교 정책은 복합적이었다. 성공회는 폐지되었지만 가혹한 탄압은 받지 않았다. 대신 장로교, 독립교회, 침례교 등 다양한 개신교 종파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관용적인 정책이었다.

하지만 가톨릭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가톨릭 미사는 금지되었고, 가톨릭 신자들은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아일랜드 정책에서 보듯 가톨릭은 정치적 적으로 간주되었다.

퀘이커 교도들에 대한 정책은 애매했다. 크롬웰 개인적으로는 조지 폭스 등 퀘이커 지도자들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이들의 평화주의와 권위 거부는 군사 정권과 충돌했다. 많은 퀘이커들이 감옥에 갇혔지만 심각한 탄압은 받지 않았다.

교육과 학문도 발전했다. 더럼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도 청교도적 개혁이 단행되었다. 존 밀턴, 앤드루 마벨 같은 문인들이 활동했고, 과학 연구도 장려되었다.

경제 발전과 사회 이동

호국경 시대에는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내전으로 파괴된 생산력이 복구되었고, 새로운 토지 소유자들이 효율적인 농업을 도입했다. 상업과 무역도 활발해졌고, 특히 식민지 무역이 급성장했다.

사회적 유동성도 증가했다. 능력 중심의 등용으로 출신이 낮은 사람들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군대와 행정부에 많은 중간계층 출신들이 진출했고, 상업 분야에서도 신흥 부유층이 등장했다.

하지만 귀족과 젠트리들의 반발도 컸다. 전통적 특권이 위축되고 새로운 세력들이 부상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축적되었다. 이는 후에 왕정복고의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여성의 지위에도 변화가 있었다. 종교 활동에서 여성의 역할이 늘어났고, 일부 급진적 종파에서는 여성 설교자도 등장했다. 하지만 정치적 권리는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크롬웰의 죽음과 체제 위기

1658년 9월 3일 올리버 크롬웰이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호국경 체제에 치명적 타격이었다. 크롬웰의 카리스마와 권위로 유지되던 체제가 급격히 불안정해졌다.

크롬웰의 아들 리처드가 후계 호국경이 되었지만, 그는 아버지만한 능력과 권위가 없었다. '텀블다운 딕(Tumbledown Dick)'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리처드는 군부와 의회 사이에서 중재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659년 4월 리처드 의회가 소집되었지만 곧 군부와 충돌했다. 의회는 군사비를 삭감하고 장교들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려 했다. 군부는 이에 반발해 의회 해산을 요구했고, 결국 리처드는 5월에 사임했다.

리처드 사임 후 잔여 의회가 복귀했지만 안정을 찾지 못했다. 군부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났고, 각지에서 왕당파 활동이 활발해졌다. 호국경 체제는 사실상 붕괴 상태에 빠졌다.

결론

공화정과 호국경 체제는 영국사에 독특한 11년을 기록했다. 찰스 1세 처형으로 시작된 이 정치 실험은 왕 없는 국가 운영이 가능함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그 한계도 드러냈다. 올리버 크롬웰의 개인적 능력과 카리스마에 의존한 체제는 그의 죽음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성과는 무시할 수 없다. 종교적 관용의 확산, 사회적 유동성의 증가, 의회제도의 발전, 성문헌법의 실험 등은 후에 영국 정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해상 패권 확립과 식민지 확장으로 영국이 세계 강국으로 부상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군사 독재의 한계도 분명했다. 정치적 정통성의 결여, 지속적인 의회와의 갈등, 사회적 반발 등은 체제의 안정성을 해쳤다. 특히 크롬웰 개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한 구조는 후계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공화정 시대의 경험은 영국인들에게 왕정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왕권도 무제한적일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는 후에 입헌군주제 발전의 바탕이 되었다. 크롬웰과 호국경 체제는 실패했지만, 그 실험 정신과 개혁 의지는 영국 정치사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