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년 왕위에 오른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와는 달리 의회와의 타협보다는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절대왕정을 추구했다. 그의 치세는 영국 헌정사에 있어 가장 격동적인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되는데, 의회 권리를 무시하고 전권 통치를 시도하다가 결국 내전과 공화정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왕위 계승과 초기 갈등의 씨앗
찰스 왕자는 1600년에 태어나 형 헨리 프레드릭이 1612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궁정에서 자란 그는 왕권의 절대성과 신성함을 깊이 믿었고, 의회는 왕의 조언기구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1625년 즉위 직후부터 찰스 1세는 의회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스페인과의 전쟁 수행을 위해 막대한 군사비가 필요했지만, 의회는 왕의 정책에 반대하며 세금 승인을 거부했다. 특히 조지 빌리어스 버킹엄 공작에 대한 의회의 탄핵 요구는 왕과 의회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권리청원과 헌정 위기의 심화
1628년 의회는 역사적인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을 제출했다. 이 문서는 마그나카르타의 전통을 이어받아 왕권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려는 시도였다. 권리청원의 주요 내용은 의회 동의 없는 과세 금지, 자의적 구금 금지, 평시 군대 주둔 금지, 계엄령 선포 제한 등이었다.
찰스 1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곧 권리청원의 조항들을 우회하거나 무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강제차관(Forced Loan)' 제도를 통해 의회 승인 없이 자금을 조달하려 했고, 이에 반대하는 지주들을 구금하기도 했다. 이런 행위는 권리청원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의회 해산과 개인통치의 시작
1629년 찰스 1세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의회가 종교 정책과 관세 문제로 왕을 비판하자, 그는 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때 하원에서는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는데, 의장이 퇴장하려 하자 의원들이 의장석에 붙잡아 앉히고 왕의 전제정치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후 1640년까지 11년간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개인통치를 실시했다. 이 시기를 '개인통치 시대(Personal Rule)' 또는 '십일년 폭정(Eleven Years' Tyranny)'이라고 부른다. 왕은 의회 없이도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재정 위기와 편법적 해결책들
의회 승인 없이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찰스 1세는 다양한 편법을 동원해야 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선박세(Ship Money)' 제도였다. 원래 해안 지역에만 부과되던 해군 건조비를 내륙 지역에도 확대 적용한 것이다.
또한 오래된 봉건 의무를 부활시켜 기사 작위를 받지 않은 지주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거나, 왕실 산림 지역을 확대해 벌목권을 판매하는 등의 방법으로 수입을 늘리려 했다. 독점권 판매도 대폭 늘려서 왕실 재정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이런 조치들은 법적으로는 왕의 고유 권한 범위 내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의회 승인 없는 과세나 다름없었다. 특히 선박세 사건에서 존 햄든이 납부를 거부하며 법정 투쟁을 벌인 것은 왕권에 대한 공개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종교 정책과 사회적 갈등
찰스 1세의 종교 정책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고 '로드주의(Laudianism)'라 불리는 고교회적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가톨릭적 의례와 성직자 권위를 강화하는 방향이었는데, 청교도들에게는 종교개혁 정신에 역행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교회 내부 장식을 화려하게 하고, 제단을 동쪽 끝에 설치하며, 성직자의 권위를 강조하는 등의 조치는 단순하고 검소한 예배를 선호하는 청교도들의 반발을 샀다. 더욱이 이런 정책이 가톨릭 부활의 전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스코틀랜드 문제와 통치 체제의 한계
1637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새로운 기도서를 강제로 도입하려 하자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에든버러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에서 제니 게데스가 의자를 던지며 항의한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은 '국민언약(National Covenant)'을 체결하고 왕의 종교 정책에 맞서기로 했다.
스코틀랜드 반란군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막대한 군사비가 필요했지만, 개인통치 11년 동안의 재정 운영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찰스 1세는 1640년 '단기의회(Short Parliament)'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회는 스코틀랜드 전쟁보다는 지난 11년간의 전제정치에 대한 문제 제기에 더 관심을 보였다.
장기의회 소집과 왕권 제약
단기의회를 3주 만에 해산시킨 찰스 1세였지만,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점령하고 하루 850파운드의 점령비를 요구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1640년 11월 '장기의회(Long Parliament)'가 소집되었고, 이 의회는 1660년까지 20년간 지속되며 영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장기의회는 즉시 왕의 측근들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토머스 웬트워스 스트래퍼드 백작과 윌리엄 로드 대주교가 체포되었고, 개인통치 시대의 각종 편법적 과세 제도들이 불법으로 선언되었다. 또한 3년마다 의회를 소집하도록 하는 '삼년법(Triennial Act)'이 통과되어 왕이 임의로 의회를 해산하고 소집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내전으로 향하는 길
1641년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군 통제권을 둘고 왕과 의회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의회는 왕이 군대를 이용해 의회를 해산시킬 것을 우려했고, 찰스 1세는 의회가 왕권의 핵심인 군사권까지 침해한다고 분노했다.
1642년 1월 찰스 1세는 의회에 무력으로 들어가 반역 혐의로 5명의 하원의원을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의원들은 미리 피신해 있었고, 왕은 "새들이 날아가 버렸다"는 말만 남기고 물러나야 했다. 이 사건은 의회 특권에 대한 직접적인 침해로 받아들여져 양측의 화해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했다.
정치 이론과 현실의 충돌
찰스 1세의 통치는 17세기 유럽의 절대왕정 추세와 맥을 같이 했다. 프랑스의 루이 13세, 스페인의 펠리페 4세 등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있었고, 찰스 1세도 이런 모델을 따르려 했다.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왕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직접 부여받는 것이므로 의회나 신민의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영국의 정치 전통과 사회 구조는 대륙과 달랐다. 마그나카르타 이래로 왕권에 대한 제약 의식이 뿌리 깊었고, 의회의 역할과 권한도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특히 과세 승인권은 의회의 핵심 권한으로 인식되었고, 이를 우회하려는 시도는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회경제적 변화와 정치적 갈등
17세기 초 영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면서 젠트리 계층이 성장했고, 이들은 정치 참여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 성장한 청교도들은 개인의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중시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전통적인 왕권 중심 체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신흥 세력들은 정치적 발언권 확대를 요구했고, 왕의 자의적 통치에 대해서는 법적, 제도적 제약을 가하려 했다.
종교적 분열과 정치적 대립
찰스 1세 시대의 종교 갈등은 단순한 신학 논쟁을 넘어 정치적 정체성의 문제였다. 청교도들은 왕의 고교회적 정책을 가톨릭 복귀의 전조로 해석했고, 이는 종교개혁의 성과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찰스 1세의 왕비 앙리에타 마리아가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은 이런 의심을 더욱 키웠다.
종교적 우려는 정치적 저항의 정당성을 제공했다. 청교도들에게 왕에 대한 저항은 단순한 정치적 반대가 아니라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신성한 의무였다. 이런 종교적 신념은 후에 내전에서 의회군의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결론
찰스 1세의 의회 해산과 개인통치 시도는 영국 헌정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왕권의 절대성을 추구한 그의 시도는 의회 제도와 법치주의 전통이 뿌리 깊은 영국에서는 성공할 수 없었다. 11년간의 개인통치는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긴장을 축적시키는 시간이었다.
의회 권리를 무시하고 편법적 과세에 의존한 통치 방식은 결국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왕과 의회 사이의 타협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했다. 종교 정책에서의 성급한 개혁 시도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반란을 촉발했고, 이는 왕정의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흔들었다. 찰스 1세의 통치 실패는 단순히 개인적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구시대적 왕권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절대왕정 추구는 결국 공화정과 입헌군주제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의 탄생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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