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여왕의 등극
1558년 11월 17일, 메리 1세가 사망하고 그녀의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가 25세의 나이로 영국 여왕에 즉위했다. 앤 불린과 헨리 8세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3살 때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이복언니 메리의 통치 기간에는 반역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엘리자베스를 신중하고 정치적으로 영리한 통치자로 만들었다.
엘리자베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영국과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처녀 여왕(Virgin Queen)'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미혼 상태는 정치적 계산의 결과이기도 했다. 외국 군주와의 결혼은 영국이 외국 세력의 영향 아래 들어갈 위험이 있었고, 영국 귀족과의 결혼은 귀족 간 권력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종교 정착
엘리자베스의 첫 번째 주요 과제는 영국의 종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복형제인 에드워드 6세의 극단적 개신교와 이복자매인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고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1559년 '통일령(Act of Uniformity)'과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통해 국교회 체제를 재확립했다.
이 종교 정착은 '엘리자베스 타협'이라고도 불리는데, 교회의 외형과 의식은 가톨릭적 전통을 일부 유지하면서도 교리는 개신교적 성격을 띠는 절충안이었다. 이 타협을 통해 영국 국교회는 독특한 '중도의 길(Via Media)'을 걷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신하들의 마음 속 창문을 열고 싶지 않다"며 외적인 종교적 순응만을 요구하고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했다.
외교적 도전과 스코틀랜드 메리
엘리자베스 통치 초반의 가장 큰 외교적 위협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는 프랑스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헨리 8세의 언니인 마가렛 튜더의 손녀로서 영국 왕위에 대한 강력한 주장을 펼쳤다. 특히 가톨릭 국가들은 엘리자베스보다 메리를 영국의 정통 여왕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1568년, 스코틀랜드에서 추방된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망명을 요청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보호하되 감시 아래 두었다. 그러나 메리는 지속적으로 음모에 연루되었고, 결국 1587년 엘리자베스의 승인 하에 처형되었다. 이 결정은 엘리자베스에게 어려운 것이었지만, 영국의 안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대결
영국과 스페인의 갈등은 엘리자베스 통치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종교적 차이, 식민지 경쟁, 영국의 해적 행위 등이 양국 관계를 악화시켰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네덜란드 개신교도들의 스페인에 대한 반란을 지원한 것은 결정적인 갈등 요인이 되었다.
1588년, 스페인의 필립 2세는 130척의 대규모 함대(아르마다)를 영국 침공을 위해 파견했다. 영국은 찰스 하워드와 프랜시스 드레이크 같은 뛰어난 해군 지휘관들의 리더십 아래 스페인 함대에 맞섰다. 영국 함선들은 더 작지만 기동성이 뛰어났고, 장거리 함포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결정적으로, 악천후가 영국의 편이 되었다. 폭풍우가 북해를 강타하면서 스페인 함대는 크게 손상되었고, 아일랜드 해안을 우회해 귀환하는 과정에서 많은 배들이 침몰했다. 이 승리는 영국 해군의 명성을 높였고, 엘리자베스의 통치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강화했다.
해외 팽창과 초기 식민지
엘리자베스 시대는 영국의 해외 팽창이 시작된 시기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월터 롤리, 존 호킨스 같은 모험가들은 여왕의 묵인 또는 지원 아래 세계 곳곳을 탐험했다. 드레이크는 1577년부터 1580년까지 세계 일주를 완성했고, 스페인 보물선을 나포하는 준해적 행위로 영국 왕실의 재정에 기여했다.
1585년, 롤리는 현재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로아노크 식민지를 설립했다. 비록 이 첫 시도는 실패했지만, 영국인들의 북미 진출의 서막을 열었다. 또한 1600년에는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아시아 무역에서 영국의 위상을 높이기 시작했다.
문화적 황금기
엘리자베스 시대는 영국 문화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문학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크리스토퍼 말로, 에드먼드 스펜서, 필립 시드니 같은 거장들이 활동했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글로브 극장에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고, 영국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음악에서는 토마스 탈리스, 윌리엄 버드, 존 다울랜드가 두각을 나타냈고, 과학 분야에서는 존 디와 같은 학자들이 활약했다. 건축과 미술에서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영국식 양식이 발전했다.
이 시기의 문화적 번영은 부분적으로 엘리자베스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그녀는 시와 음악, 연극을 사랑했고, 궁정에서 다양한 문화 행사를 개최했다. 또한 상인과 중산층의 부상으로 문화 소비층이 확대된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국내 정치와 의회 관계
엘리자베스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 군주였지만, 의회와의 관계도 중요시했다. 그녀는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의회를 소집했으며, 의회의 조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종교와 왕위 계승 같은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의회의 간섭을 꺼렸다.
그녀의 최측근인 윌리엄 세실(버클리 경)은 유능한 행정가로서 영국의 관료제를 발전시켰다. 세실과 프랜시스 월싱험 같은 조언자들의 도움으로 엘리자베스는 복잡한 국제 정세와 국내 문제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튜더 왕조의 종말
엘리자베스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지만, 사망 직전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메리 여왕의 아들)를 암묵적으로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03년 3월 24일, 69세의 나이로 엘리자베스가 세상을 떠나자,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며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죽음은 튜더 왕조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녀는 자신의 통치를 "모든 영국인의 선한 의지 속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예언적인 말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결론
엘리자베스 1세의 45년 통치는 영국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그녀는 종교적 안정을 가져왔고, 스페인이라는 당대 최강국에 맞서 승리했으며, 영국의 해외 팽창을 장려했다. 또한 그녀의 통치 기간은 문화와 예술이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린 시기였다.
'황금시대'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시대는 영국 국가 정체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빈곤과 종교적 갈등 같은 문제가 여전히 존재했지만, 이 시기는 영국이 유럽의 변방에서 세계 무대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통치는 단순히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영국의 글로벌 강국으로서의 역할이 시작되는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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